[901호 8월 15일자]

학승이 물었다.
“길에서 도인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무엇으로 대해야 좋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진주(陳州)에서 온 사람은 허주(許州)의 소식을 알 수 없어.”

問 路逢達道人 不將語黙對 未審將什麽對 師云人從陳州來 不得許州信

길에서 도인을 만나 뭔가 뜻을 통해보려면 말이나 침묵 등으로 응대해서는 안 된다. 말이나 침묵으로는 진정한 도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응대하면 될까? 학인의 질문에 조주 스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지역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진주에서 살던 사람은 허주에 대한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인이 아니면 도인들의 대화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전문 용어가 있고 전문기술이 있어 보통 사람은 못 알아듣는데,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산 아래를 다 내려다 본 사람과 산 아래에서 맴도는 사람이 어찌 대화가 통할 것이며 뜻이 통하겠는가. 도의 대담은 즉문즉답이다. 당시 상황에 따라 문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것이 없다. 또한 가르쳐주어도 그 뜻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 이익이 없다.

학승이 물었다.
“입을 여는 것은 유위입니다. 무엇이 무위입니까?”
조주 스님은 손을 보이면서 말했다.
“이것이 무위다.”
학승이 말했다.
“그것은 유위입니다. 무엇이 무위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무위이다.”
학승이 말했다.
“그것은 유위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래, 유위이다.”

問 開口是有爲 如何是無爲 師以手示之云 者箇是無爲 云者箇是有爲 如何是無爲 師云無爲 云者箇是有爲 師云是有爲

무위(無爲)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했다는 생각이 없어야 무위(無爲)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전혀 했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 무위이다. 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하거나 해를 주는 일을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위이다. 무위행(無爲行)은 진실행(眞實行)이다. 만약 무위를 제대로 실천하기만 한다면 가히 모든 근심은 사라진다.
뭐라고 입을 열어 말하면 그것은 곧 유위(有爲)가 된다. 설사 선사가 빈손을 보였다 해도 그것은 유위이다. 또한 “무위!”하고 무위라는 문자를 외쳐도 그것 역시 유위이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어도 유위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위인가? 만일 나에게 무위를 묻는다면 묻는 자에게 주장자 일방(一榜)을 내겠다.

조주 선사가 문하 대중에게 보였다.
“나는 부처(佛)라는 한 글자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학승이 물었다.
“화상은 사람이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부처야, 부처.”

師示衆云 佛之一字吾不喜聞 問 和尙還爲人也無 師云佛佛

선(禪)을 알고 도(道)를 아는 자라면 부처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충분하다 도인, 선사, 성인, 부처 등은 모두 깨끗한 것을 더럽히는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을 교화하는 선사라면 스스로를 부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는 망하고 만다. 남이 부처라고 불러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자기는 자신은 부처라고 말하는 자들이 선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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