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호 9월 26일]

 학승이 물었다.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꺼릴 뿐이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학승이 말했다.
“그것은 간택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 밭일이나 하는 촌놈아, 무엇이 간택이란 말인가?”

問 至道無難唯嫌揀擇 如何得不揀擇 師云 天上天下唯我獨尊 云此猶是揀擇 師云 田奴 什?處是揀擇

조사들의 공격은 날카롭다. “무엇이 간택이란 말인가?”하고 반문했을 때 노승이 창을 들고 찌르는 것이다. 이때 학인은 한 손으로는 방패로 막고 한 손으로는 창을 들고 찔러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방패와 창을 동시에 쓰는 것인가? “견공은 던지는 흙덩이를 쫓아가지만 사자는 던지는 자의 눈빛을 째려본다.”

학승이 물었다.
“삼계 밖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어쩌나 노승은 3계 안에 있는 걸.”

問 如何是三界外人 師云 爭奈老僧在三界內

삼계를 벗어난 초인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증득한 사람이다. 삼계를 벗어난 초인은 아무도 그를 이 세상에 끌어내릴 수 없다. 그는 이미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가? 삼계 안에 있다. 명안자(明眼者)는 삼계가 곧 출삼계이다.

학승이 물었다.
“있음과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가 만약 다시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노승을 묻는 것이야.”

問 知有不有底人如何 師云 ?若更問 卽故問老僧

첫 번째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만 만약 한 번 더 질문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대 앞에 있는 사람이라네. 겸손한 조주 스님.
조주 스님이 문하 대중들에게 가르쳐 이야기했다.
“남쪽을 향해 총림(叢林)으로 달려가거라. 여기에 있지 말고.”
어떤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 계시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의 이곳은 시림(柴林)이야.”

師示衆云 向南方趨叢林去 莫在者裡 僧便問 和尙者裡是甚處 師云 我者裡是柴林

총림(叢林)은 나무가 빽빽이 나있는 곳이다. 그 곳에서는 나무가 옆으로 자랄 수가 없다. 시림은 풀과 잡나무가 엉켜서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는 나무가 똑바로 자랄 수 없다. 나이 들어 고목나무와 같은 조주 선사는 자연스러움을 좋아하고 형식을 싫어했다. 눕고 싶으면 눕고 가고 싶으면 가는 곳에서 살았다. 누가 선사라는 호칭을 불러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은 채 그저 한 사람의 노인으로 살았다. 그곳이 조주 선사가 사는 곳이다. 초심자들은 그런 조주 선사를 보고 실망할지도 모른다. 도에 들어가기 전에 나태하고 방일한 것을 먼저 배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주 선사의 뜻은 명확하다. 납자들에게 ‘가려거든 남쪽으로 가라’고 했다. 남쪽은 육조 혜능 선사의 뜻을 이은 곳이다. 선불교가 융성한 곳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비로자나불의 스승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본성이 제자이다.”

問 如何是毗盧師 師云 性是弟子

그분은 본성을 제자로 삼는다. 만약 누가 비로자나불의 스승을 알려면 본성[心性]을 잘 관찰하면 된다. 본성은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본성이 하는 것은 그분이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고, 본성이 가는 길은 그분이 가라해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성을 알면 그분을 안다. 어떻게 본성을 알 것인가? 마음을 촌보(寸步)도 움직이지 말고 잠시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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