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6호 11월 28일]

어떤 스님이 조주선원을 떠나겠다고 하자 조주 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다른 데에 가서 혹시 남에게 ‘조주를 만났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학승이 말했다.
“다만 ‘뵈었을 뿐이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한 마리의 당나귀다. 그대는 어떻게 보겠는가?”
학승은 말이 없었다.

因僧辭去 師云 闍黎出外 忽有人問 還見趙州否 你作麽生祇對 云只可道見 師云 老僧是一頭驢 你作麽生見 僧無語

이때는 “일일부작 일일불식(日日不作 日日不食)하라” 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스님이 설봉(雪峰) 스님이 있는데서 찾아왔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네. 내가 있는 장소는 한낱 난을 피할 장소일 뿐이야. 불법은 모두 남쪽에 있다. 그런데 자넨 그쪽에서 와놓고선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학승이 말했다.
“불법에 어찌 남쪽의 것, 북쪽의 것이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는 혹 운거(雲居)나 설봉(雪峰)이 있는데서 왔다고 하더라도 다만 하나의 널판을 지고 다니는 사내일 따름이야.”
학승이 말했다.
“그쪽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 무엇 때문에 간밤에 오줌을 쌌는가?”
학승이 말했다.
“도달한 후라면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번에는 똥을 쌌군.”

有僧從雪峰來 師云 上座莫住此間 老僧者裡 只是避難所在 佛法盡在南方 云佛法豈有南北 師云 直饒你從雲居 雪峰來也 只是箇擔板漢 云未審那邊事如何 師云 你因甚夜來尿床 云達後如何 師云 又是屙屎

당시 조주 선사는 북방에 있었고, 그보다 남쪽에 선법이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널판은 스승의 스승들을 기록한 승려들의 족보다. 예전에 납자들은 자기의 계보를 알릴 수 있는 널판을 가지고 다녔다. 진정한 납자라면 한 사람의 스승으로 족하다. 스승이 할 일은 제대로 가리키는 것이고, 제자에게 필요한 것은 스승을 알아보는 안목이다. 간밤에 오줌 싸고 똥을 싸는 것은 지저분한 일이다. 선사들은 남의 집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설사 남쪽에 어떤 선사가 약간의 문제가 있다 해도 불법을 크게 그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그 문중의 가풍으로 인정하고 만다. 그렇지 않으면 장삼을 입고 진흙탕에 들어가 싸우는 꼴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보였다.
“나의 이곳에는 동굴을 나오는 사자도 있고, 동굴 속에 있는 사자도 있다. 다만 사자를 얻기가 어려울 뿐이구나.”
그때 어떤 학승이 탄지(彈指)함으로써 그 말에 응답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학승이 말했다. “사자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내가 사자라고 말한 것도 이미 죄를 범한 것인데, 자네는 더욱 뛰거나 밟거나 하면서 사자의 흉내를 내는가?”

示衆云 我此間有出窟師子 亦有在窟師子 只是難得師子兒 時有僧彈指對之 師云是什麽 云師子兒 師云 我喚作師子兒 早是罪過 你更行趯踏

한국 불교의 납자들은 누구든지 사자 새끼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사자의 굴에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어미 사자의 젖을 찾는 새끼로 만족하고 굴속에서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사자들이 모두 어미 사자처럼 늙어 가는데도 사자의 굴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탄지(彈指)까지는 좋았다. 그 뒤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었을 때 대답이 중요하다. 이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조주 선사가 “오늘 하나의 사자 새끼가 하나 밖으로 나왔구나” 하고 말하겠는가? 여기에 적절한 대답이 있지만 혹 여우가 사자의 흉내만 낼까 두려워 지금 당장 발설하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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