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치고는 꽤 많은 눈이 와, 발등이 묻힐 정도로 쌓여있다. 오늘은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밝은 태양이 빛난다. 거실에서 유리창을 뚫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눈 덮인 뜰을 바라본다. 눈송이 꽃을 손에 든 솔잎도, 나목의 하늘 끝 작은 가지도 미동(微動)조차 없다. 작은 바위에 정좌한 석불은 어깨에 백설가사를 걸친 채 삼매에 잠겨있다. 이따금 한 포기 억새의 보일 듯 말 듯 하늘거리는 손짓은 삼매를 깨지 않으려는 미풍의 조심스러움이다. 흔들리지 않는 솔가지에서 간혹 눈송이 일부가 수직으로 땅으로 내려앉는 것은 그 미풍 탓일까
충남 태안의 신두리 해안 사구(砂丘)는 200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도반들과 자주 해안 사구를 등에 업은 해변 사장(沙場)의 고운 모래를 밟으며 걷기 명상을 한다. 밀썰물의 해조음(海潮音)과 파도와 바람의 어울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제일 먼저 바람소리가 구분되고, 이윽고 해조음과 파도소리가 구분된다. 그리고 해조음이 밀물소리인지 썰물소리인지도 구분된다. 해조음이 마음을 씻어주니,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한 불보살의 설법 소리에 비유될 만하다.계절에 따라 바다 가운데로 또는 섬의 산봉우리로 떨어지는 해와, 수시로 변하는
〈벽암록(碧岩錄)〉 제7칙의 평창(評唱)에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의 선화(禪話)가 나온다. 법안 문익(法眼 文益, 885~958)이 보은 현칙(報恩 玄則, 900~975)의 갈등선(葛藤禪 종지를 알지 못하고 말에 떨어진 선)을 깨우친 내용이다.현칙은 중국 오대(五代) 송 초의 스님으로 활주(滑州, 현재 하남 활현) 위남(衛南) 사람이다. 처음에는 청봉 전초(?峰 傳楚)를 찾아뵙고 문답하였으나 뜻에 맞지 않자 문익에게 가서 참구하여 말끝에 문득 깨닫고는 그에게 의지하여 머물렀다.“현칙 감원(監院, 선원의 살림을 총괄하는 직
원(元)의 석옥 청공(石屋 淸珙, 1272~ 1352)은 임제종 양기파(楊岐派)로, 임제(臨濟)의 19세 법손이다. 20세에 소주 숭복사(崇福寺)에 출가하여 고봉 원묘(高峰 原妙, 1238~1295)에게 배우고, 후에 급암 종신(及庵 宗信)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절강성 당호의 복원선찰(福源禪刹)의 주지로 7년 동안 머물다가 절강성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 주석하였다. 고려의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가 1346년에 중국에 들어가 1347년에 천호암에서 그의 인가(印可)를 받고 가사를 전해 받아 고려
가로의 은행나뭇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바로 옆의 은행나뭇잎은 아직도 파랗다. 5m도 안 될 지척거리라 환경조건이 거의 같을 텐데도, 일찍 물길을 닫은 부지런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계속 물길을 열어놓은 게으른 나무도 있다.집 뜰의 은행나무는 한껏 게으름을 부리다가 늦게야 황금빛으로 변했다. 간밤에 영하로 내려가고, 무서리 내린 아침에 보니 은행나무는 하늬바람에 잎을 모두 떨구어 앙상해지고, 밑동 주위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여있다. 풍성한 여름을 만끽하며 풍경이 울 때마다 부채춤을 추어대던 그였다. 이제 화려하지만 군더더기 속박이었
생물[有情]이 미망의 세계[迷界]에 생사윤회[流轉]하는 것은 불공업[不共業ㆍ개인이 지은 선악의 행위]이 원인이고, 바깥 세계의 삼라만상[諸法]이 생성전개(生成展開)하는 것은 공업[共業ㆍ 공동으로 지은 선악의 행위]이 원인이다. 이러한 업인(業因)을 발하게 돕는 근본 동력은 근본번뇌[惑, 隨眠]이다. 6근본번뇌[6수면(隨眠)]는 탐(貪)·진(瞋)·치[痴, 무명(無明)]·만(慢)·의(疑)·악견[惡見, 부정견(不正見)]이다. 곧 탐진치 3독심과 아만심, 의심, 나쁜 견해가 여섯 가지 근본번뇌로 〈구사론〉 제19권에 나온다.“앞(권 제13
현실세계는 번뇌[惑]를 연(緣)으로, 신구의(身口意) 3업인(業因)을 지어, 고과(苦果)를 받는 혹업고[惑業苦, 곧 연인과(緣因果)]의 반복이다.사제의 고집(苦集)은 ‘미계(迷界)인과[연기의 입장에서 본 범부의 삶]’ 곧 유전(流轉)인과로, 표면적 현상인 고과(苦果)의 심층적 원인인 집인(集因)은 3애[三愛; 欲愛·有愛·無有愛] 또는 3독[三毒; 貪瞋痴], 한마디로 무명업(無明業)이라는 것이다.사제의 멸도(滅道)는 ‘진리를 깨닫는 세계[悟界]의 인과’ 곧 환멸(還滅)인과로 고를 멸[滅苦]하려면 중도인 8정도(正道), 한마디로 정견[
부처님법의 핵심인 사성제를 요약하면, 인생이 일체개고(一切皆苦)[苦]인데, 그 원인[苦集]은 관능적인 갈애(渴愛)[欲愛], 당길심[무엇이 되고 싶은 갈애, 有愛(貪愛)], 밀칠심[무엇을 회피하거나 제거하고 싶은 갈애, 無有愛(瞋?)] 등의 삼애(三愛)이다. 질병상태를 건강상태로 바꾸듯, 일체개고를 열반적정(涅槃寂靜)[苦滅]으로 바꾸려면 팔정도[苦滅道]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우리의 느낌[受]은 세 가지[三受]로 대분할 수 있으니, 곧 즐거운 느낌[樂受]·괴로운 느낌[苦受]·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 捨受]이 그것이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의 일이다. 한 청신녀(淸信女)가 청화 스님께 “진달래가 참 아름답게 피었네요”라고 하니, 스님께서 “네 아름답습니다”고 하셨다. 진달래꽃 풍경에 흠뻑 취한 청신녀가 한마디 말만으로는 감흥 표현에 미진하였던지 “진달래가 너무 아름다워요”를 두세 번 되풀이하였다. 물끄러미 청신녀를 바라보시던 스님께서 “수행자는 아름다움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고 말씀하셨다.해마다 봄이면 앞뜰에 나리 몇 그루가 새 싹을 틔운다. 나리대가 부쩍 자라 6~7월에 꽃봉오리가 맺히면, 매일 이른 아침에 뜰에 나가 꽃이 피었나
어린이에게 막대기 다섯 개를 주고 오각형을 만들라고 하면, 막대기들의 끝과 끝이 서로 맞닿도록 고리를 만들고 오각형이라고 한다. 이 중 막대기 하나를 떼내어 “이 막대기가 오각형이냐?”고 물으면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머지 막대기 네 개의 모양이 오각형이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한다. 막대기도 없느냐고 물으면 “막대기는 있다”고 한다.범부는 오온(五蘊)이 일정 조건으로 모인 것을 나(我)라고 한다. 오온에서 색[色, 몸]을 떼 내어 “색이 나인가?” 물으면 “나가 아니”라고 한다. 수상행식[受想行識, 감수·표상·의지·인식 작
붓다께서 5비구에게 〈전법륜경〉을 처음 설하신 후, 두 번째로 설한 경은 〈무아상경(無我相經, Anattalakkhaa Sutta, SN 22.59)〉, 또는 〈오비구경(五比丘經, 잡아함경 권2 34번〉이라 불린다. 이 경은 한 마디로 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므로 고(苦)에 이르게 되고, 이 무상, 고, 무아를 확실히 깨달아 고멸[苦滅, 해탈(解脫), 열반(涅槃)]에 이르게 됨을 설한 것이다. 설법장소는 〈전법륜경〉과 같이 바라나시의 이시파타나(예언자의 숲) 녹야원이고, 설법 대상 역시
초전법륜(初轉法輪)은,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 바라나시 이시파타나(예언자의 숲)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안냐 콘단냐(Ann?-Kondanna), 왑파(Vappa), 밧디야(Bhaddiya), 마하나마(Mah?n?ma), 앗사지(Assaji))등 5비구에게 하신 설법으로서 중도, 사성제[집인고과의 유전연기와 도인멸과의 환멸연기], 팔정도, 등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는 , 구나발타라 번역의 , 안세고(安世高) 번역의
〈반야심경〉의 ‘제법공상(諸法空相)’이란 ‘우주만물[諸法]의 참모습[實相]이 공한 모습[空相]’이라는 것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나아가 오온개공(五蘊皆空)]과 같은 말이다. 이 공상(空相)은 생멸(生滅) 및 더러움과 깨끗함[垢淨]도 없고, 흠축(欠縮) 없이 원만해 늘고 줌[增減]도 없다. 이 공상은 다만 비어있는 것[但空]이 아니라 ‘연기를 통해 묘하게 있음[妙有]’이기도 한 ‘참공[眞空]’이니, 곧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을 수학(數學)의 입장에서 보면, ‘색=공’과 ‘공=색’의 수식으로 치환되니 같은 수
절에 들러 각 전각을 돌며 참배를 하다보면, 전각 기둥의 주련(柱聯)이 눈길을 끈다. 주련은 전각을 장식하는 역할과 함께 참배객 또는 관광객에게 불교사상의 일단을 드러내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이다. 그런데 주련의 글귀는 으레 한자로 새겨져 있다. 한자세대가 아닌 영어세대들은 읽을 수가 없다. 해서체[楷書體, 정자체(正字體)]가 아닌 경우에는 한자세대도 잘 읽지 못한다. ‘읽을 수 없는 캐치프레이즈’는 현대와의 접점이 취약한 불교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절에 따라 간혹 주련 글귀의 정자체와 한글번역을 주련 옆 눈
독실한 불자라면 하루에 한 번 이상 독송하게 되는 것이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은 한문 번역본도 여러 가지이고 해설서도 많다. 우리가 의식을 행할 때 삼귀의(三歸依) 다음에 봉독하는 것은 당의 현장(玄唆)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반야심경〉의 한역(漢譯)들은 크게 약본(略本)과 광본(廣本)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광본이 일반적인 불경의 형식인 6성취[六成就, 곧 신성취(信成就)인 ‘如是’·문(聞)성취인 ‘我聞’·시(時)성취인 ‘一時’·주(主)성취인 ‘佛’·처(處)성취인 在某處·중(衆)성취인 ‘與衆若干人
마음의 병은 내가 아닌 것을 나와 동일시하는 습관에서 기인한다. 우리의 개아는 우리가 보고 접촉할 수 있는 사물들, 곧 우주의 모든 조각들을 자기의 것처럼 여기려고 한다. 이렇게 사물을 소유함으로써 우리의 참 자아는 점점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고 소유물(이라 여겨지는 것)에 집착하는 동안 그에 상응하는 두려움이라는 벌칙을 받게 된다.붓다는 이러한 집적현상[集積現象ㆍ사물들에 집착하여 내 소유물이라고 쌓아가는 현상]을 제거함으로써만 생사윤회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건전한 계율을 실천하면 소
제법(諸法ㆍdharma)은 ‘우주에 있는 유ㆍ무형의 모든 현상과 사물’을 말한다. 우리는 제법을 나와 동일시하는 오랜 습관에 따라 자신의 경험을 ‘나’와 ‘나의 것’이라는 용어와 결부해왔다. 제법을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 반야지(般若智)이다.불교도에게 ‘지혜[반야(般若)]’는 ‘제법(諸法)’의 체계적인 관조(觀照)이다. 이는 붓다고사(Buddhaghosa)의 공식적이고 학술적인 용어 정의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지혜는 제법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제법의 본성을 뒤덮은 무명의
오조 법연(五祖 法演, ?~1104) 선사는 송(宋)나라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출신으로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에 속한다. 35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유식학(唯識學)을 배우고, 호북성(湖北省) 오조산(五祖山)에서 선풍(禪風)을 일으켰으며, 조주(趙州)의 ‘무(無)’자 수행을 역설하였다. 〈법연선사어록(法演禪師語錄)〉이 있으며, 그는 ‘삼불(三佛)’로 불리는 불과 극근(佛果 克勤, 1063~1125), 불안 청원(佛眼 淸遠, 1067-1120), 불감 혜근(佛鑑 慧懃, 1059~1117) 등의 제자를 배출한 당대 고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의 철학자 레우키포스(Leukippos)는, 세상을 '비어있는 공간(Kenon)'과 이를 채울 ‘충만한 것[Atom, 원자(原子)]’으로 나누었다. 아주 작아 더 이상 분할 할 수 없으며 단단한 원자는 무수히 많으며, 비어있는 곳을 움직이고 있어, 허공 안에서 일어나는 원자의 재배열로 세상의 다양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BC 460? ~ BC 370?]는 원자의 운동과 다원성을 거부하지 않았고, 원자들이 허공에서 모였다 흩어짐을 반복하며 집적하고 여기에서
우리 모두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 불성의 공덕은 무량하다. 무량공덕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 열반이다. 열반은 번뇌가 다 멸해버렸으므로 멸도(滅度)이고, 영생이므로 불생(不生)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므로 불생(不生)이어야 영생이 되는 것이다. 열반은 또 지극히 안락하므로 극락(極樂)이며, 얽매임 없이 자유자재이므로 해탈이다. 이를 네가지로 정리한 것이 열반의 네가지 공덕[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다.열반사덕에서, 상덕(常德)은 항상 변함이 없고 생멸이 없음을 말하고, 낙덕(樂德)은 무위안락함, 곧 인연생멸을 떠난 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