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호 8월 8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모든 것의 근원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이야.”
학승이 말했다. “학인은 모르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두공(斗拱)은 차수(叉手)하고 있지만 알지는 못해.”

問 如何是萬法之源 師云 棟梁椽柱 云學人不會 師云 拱斗叉手不會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은 집을 짓는데 없어서 안 될 중요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집을 대표한다. 조주 스님이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이 근원이라고 말한 것은 집의 중심이 이들이듯 만물도 그 중심이 되는 것이 근원이라고 비유로서 말한 것이다.

그러면 만물의 중심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도(道)다. 그러면 도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만물이다. 그러므로 조주 스님이 집이 근원이라고 말한 것을 단순히 비유라고 치부할 것만은 아니다. 집도 도이기 때문이다. 집은 사람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다. 사람은 집에서 자고, 휴식하고, 밥을 먹는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한다. 사람은 집을 의지해서 만사를 지으므로 집은 삶의 근원이다.

사람은 몸과 마음의 결합체이다. 몸이 없으면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몸이 편안하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쓰려면 몸을 잘 보호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몸은 마음이 의지하는 집이다. 집이 없으면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우주의 주인이다. 그러나 몸이 없으면 마음의 존재는 없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다. 만약 몸을 중시하고 마음을 방치한다면 도가 없다. 몸을 방치하고 마음을 중시해도 역시 도는 없다. 몸과 마음을 같이 닦는 것이 수행이다. 마음의 근원은 몸이고 몸의 근원은 집이다. 몸이 의지하는 집은 만물의 근원이다.

지붕을 받쳐주는 긴 가로 목을 대들보라고 한다. 이 대들보를 수직으로 받쳐 들고 있는(拱) 4각으로 된 작은 조각나무가 있는데, 마치 양 손목을 붙이고 양손으로 대들보를 받들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이 두공(斗?)이다. 혹은 마루의 가로 목을 세로로 받쳐 들고 있는 나무를 두공이라고도 한다. 두공은 중요한 일을 하지만, 자신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그 일을 하고 있는 줄 몰라야 진정한 선(善)이 된다. 우주 만물은 서로서로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학승이 물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내려놓아라.”

問 一物不將來時如何 師云 放下著


방하착에 대한 법문이다. 이 법문은 유명한 법문이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에 아무것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실은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다. 따라서 무념 무심(無念無心)이 진실에 합당한 마음이고 무심하면 행복에 이른다.

학인이 대무심을 얻어 한 물건도 세우지 않았을 때는 어떠하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조주 선사는 뜬금없이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데 내려놓으라니, 도대체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것인가?

선(禪)을 말하는데 말이나 명자(名字)를 빌려서 표현하면 즉시 틀려진다. 말이나 명자가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과 명자를 떠나서 진실 그 자체를 보여야 한다. 예를 들어 사과에 대한 설명보다는 사과 맛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행동으로 보인다 하여도 틀린다. 행동 역시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행동이 진실의 뜻을 담고 있을 때는 가능하다.

한 물건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말할 필요도 없고, 그 경계가 어떠냐고 질문할 것도 없어야 한다. 한 물건도 없다면서 어찌 의심하는 그 놈은 있단 말인가. 말이 안 맞지 않느냐? 그러니 그것조차도 내려놓아라. 그래야 정말 한 물건도 세우지 않는 것이니라 라는 뜻이다.

오등회원 엄양장에서도 이 대담이 나오는데 엄양장에서는 조주 선사가 내려놓으라는 대답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에 학인이 “나에게 한 물건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하고 반문하였고, 조주 선사는 이어서 “그러면 짊어지고 가거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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