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9호 10월 10일]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 학인에게 지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눈앞에 학인은 없다.”
학승이 물었다.
“그러시면 세상에 나오시지 않는 것 아닙니까?”
스님은 곧 ‘안녕히’ 하고 헤어지는 인사를 했다.

問 如何是和尙示學人處 師云 目前無學人 云與麽卽不出世也 師便珍重

조주 선사에게 학인은 없다. 누가 학인인가? 오로지 부처만 있을 뿐이다. 그런 조주 선사의 뜻을 모르고 학인은 “그러면 선사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묻었다. 그렇다. 선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는 없다. 다만 스스로 살아갈 뿐이다. 누가 물으면 대답해주고 묻지 않으면 조용히 풀이 돋아나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헤아리며 살아간다. 인생의 의미를 묻지 말라. 인생의 의미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조사의 뜻[祖意]과 교리의 뜻[敎意]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주 스님은 주먹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도 그것이 있으시군요.”
스님은 모자[주먹]를 내려놓으면서 이르기를
“자넨 내게 도대체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問 祖意與敎意同別 師作拳安頭上 云和尙猶有者箇在 師卸下帽子云 你道老僧有箇什麽

3천 년 전에 한 원숭이에게 길을 물으면 항상 머리에 주먹을 올려놓았는데, 이번에 조주 스님도 조사의 뜻과 부처의 뜻이 다른가같은가 묻는데 머리에 주먹을 올려놓다니, 이제 보니까 그 원숭이가 제대로 가리킨 것이었네.

학인이 물었다.
“마음이 머무르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물건이야. 바로 심식(心識)에 사용 당하고 있어.”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하여야 사용 당하지 않겠습니까?”
조주 스님은 곧 머리를 숙였다.

問 心不停不住時如何 師云 是活物是者箇 正被心識使在 云如何得不被心識使 師便低頭
마음은 한 날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것은 심식의 사용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은 것은 그대가 곧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심식에 사용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검지와 중지로 V자를 그려 보이겠다. 빅토리[victory]라고 생각하지 말라. 적어도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단순한 뜻은 내보지 않는다.


학승이 물었다.
“도는 무엇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은 나오기는 하지만 도는 생멸에 속하는 것이 아니야.”
학승이 물었다.
“그것은 천연적인 것이군요?”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은 천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도는 그렇지 않아.”

問 道從何生 師云 者箇卽生也 道不屬生滅 云莫是天然也無 師云 者箇是天然 道卽不與麽

도라고 하면 벌써 형상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나온 곳은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다. 그것은 우주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으므로 천연적인 것은 맞으나 도가 되어 나올 때는 천연적인 것이 아니다. 검은 색이 되었다가 흰 색이 되었다가, 동쪽이 되었다가 서쪽이 되는 등 자유자재로 변하고 바뀐다. 그러므로 선사가 말하고, 걷고, 일하고, 밭을 갈고, 비틀게 걸어가고, 옷을 입고, 세수할 때, 코를 풀 때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잘 보인다. 선사는 도를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일상사에 절대 도가 들락거리지 않는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