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지혜와 자비

절에 들러 각 전각을 돌며 참배를 하다보면, 전각 기둥의 주련(柱聯)이 눈길을 끈다. 주련은 전각을 장식하는 역할과 함께 참배객 또는 관광객에게 불교사상의 일단을 드러내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이다. 그런데 주련의 글귀는 으레 한자로 새겨져 있다. 한자세대가 아닌 영어세대들은 읽을 수가 없다. 해서체[楷書體, 정자체(正字體)]가 아닌 경우에는 한자세대도 잘 읽지 못한다. ‘읽을 수 없는 캐치프레이즈’는 현대와의 접점이 취약한 불교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절에 따라 간혹 주련 글귀의 정자체와 한글번역을 주련 옆 눈높이에 곁들여 붙여놓은 곳이 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 가족이 그 앞에 서서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읽으며, 어린이가 낯선 단어를 물으면 부모가 아는 만큼 더 쉽게 풀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외국인 친구에게 열심히 설명해주는 젊은이도 볼 수 있다. 각 절마다 이런 조그만 친절을 베푼다면, 국민의 정서함양과 불교홍포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영어번역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이겠다. 대웅전 주련에서 자주 보이는, 〈석문의범(釋門儀範)〉이 출처인 글귀 하나를 소개한다.

“부처님 몸 시방(十方) 세계 두루하시고, 삼세(三世)의 부처님 모두가 그러하시네. 광대한 서원(誓願)의 구름 항상하여 다함이 없고, 넓디넓은 깨달음의 바다 아득하여 다 밝히기 어렵네.” [佛身普遍十方中 三世如來一切同 廣大願雲恒不盡 汪洋覺海渺難窮] 〈釋門儀範 諸佛通請 香華請 中〉

부처님은 무량한 수명[無量壽]과 무량한 광명[無量光]으로, 시방삼세의 시공(時空)에 걸리지 않고 편만(遍滿)하면서, 무상정등정각자(無上正等正覺者)로서 무변중생(無邊衆生)을 다 건지겠다는 홍서(弘誓)를 갖추고 계시다. 네 번째 구의 ‘묘(渺)’자는 ‘아득함’을 뜻한다. ‘아득함’은 무한소[無限小. 더할 수 없이 작음)이자, 무한대[無限大. 한없이 큼]이다.

〈금강경〉에서는, 보살이 구류중생(九類衆生)을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할 서원을 지니고 제도하지만,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중생이 아상(我相) 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보살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당연히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온갖 중생들의 종류인, 알을 깨고 나온 생명·태에서 낳은 생명·습한 곳에서 생긴 생명·변화하여 생긴 생명·모습 있는 생명·모습 없는 생명·생각 있는 생명·생각 없는 생명·생각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생명들을, 내(보살)가 모두 번뇌와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無餘涅槃]에 들게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 받은 바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에게 나라는 관념[?tman]·사람이라는 관념[pudgala]·중생이라는 관념[sattva]·생명이라는 관념[jva]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곧 보살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金剛般若波羅密經 T0235_.08.0749a05-a11〉

보살은 자비를 비롯한 사무량심(四無量心)과 반야지혜(般若智慧)를 함께 닦는다. 자비는 내(보살)가 다른 중생을 모두 열반에 들게 할 때 완성된다. 반야지혜는 ‘제법(諸法)’의 체계적인 관조(觀照) 곧 선정을 통해, 아견[我見, 내가 있다는 견해]이라는 미망(迷妄)을 벗어난 지혜이다. 자비는 나[我]를 무한대로 확산해가면서 모든 중생이 나와 동체(同體)임을 구현하는 것이고, 지혜는 나[我]를 무한소로 축소해가면서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증득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되,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보살이며, 이러한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모순이 아닌) 도리는 ‘아득하여 다 밝히기 어려운 것[渺難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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