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석공관(析空觀)

마음의 병은 내가 아닌 것을 나와 동일시하는 습관에서 기인한다. 우리의 개아는 우리가 보고 접촉할 수 있는 사물들, 곧 우주의 모든 조각들을 자기의 것처럼 여기려고 한다. 이렇게 사물을 소유함으로써 우리의 참 자아는 점점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고 소유물(이라 여겨지는 것)에 집착하는 동안 그에 상응하는 두려움이라는 벌칙을 받게 된다.

붓다는 이러한 집적현상[集積現象ㆍ사물들에 집착하여 내 소유물이라고 쌓아가는 현상]을 제거함으로써만 생사윤회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건전한 계율을 실천하면 소유물이 우리에게 지운 짐의 무게가 어느 정도는 경감된다. 불교에서는 ‘부유’보다는 ‘청빈’을 소중히 하며, 받기보다는 주기[보시ㆍ布施]를 좋아하는 등, 가능한 한 소유를 줄이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게다가 선정[定]의 수행도 그런 방향으로 행해져, 상식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의 제법(諸法)이 망상이고, 거짓이고, 꿈같이 여겨지므로 이들이 궁극적으로 실재한다는 믿음을 털어버리고,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慧]가 계발된다. 이러한 지혜만이 오래된 습관으로 굳어진 우리 생각으로부터 개아가 있다는 망상을 몰아내고 (인연생멸을 떠난) 무위(無爲)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무위의 세계는 (인연생멸하는) 유위(有爲)의 세계와 구분된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것은 유위(인연생멸의 조건이 지어진 것)의 사물들을 우리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며, 그 사물들에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일어난 일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수행으로 우리는 유일하게 지고의 가치를 지닌 무위(조건지어지지 않은 것)를 제외한 모든 유위의 사물들을 거부하고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유위를 나와 동일시하지 말자는 것이다.

사물을 나와 동일시하기 위한 전제는 사물이 실재한다는 믿음이다. 사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면 나와 동일시하지 않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사물 자체가 공(空)하다는 당체즉공(當體卽空)을 깨닫기 전에, 사물을 분석해서 사물이 실재하지 않는 공(空)임을 이해하는 방법이 석공관(析空觀)이다. 금타 화상이 짓고 청화 스님이 엮은 〈금강심론(金剛心論)〉의 ‘석공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수행자는 먼저 해와 달과 별들[日月星宿] 및 산과 내와 대지[山河大地] 등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사람과 짐승 내지 꿈틀거리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남김없이 파괴하여 ‘문틈의 햇살에 비치는 티끌[日光塵]’화(化)하고 점차 나아가서 묘유의 극치인 인허(隣虛)의 백길이나 되는 장대 위[百尺竿頭]에서도 오히려 한걸음 더 전진하여 진공(眞空)의 경계에 도달할지니…”

〈金剛心論 第1編 第2章 菩提方便門 第6節 析空觀 중에서〉

우주 만물 곧 무생물[無生物ㆍ무정중생(無情衆生)]과 생물[生物ㆍ유정중생(有情衆生)]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되, 문틈에 햇살이 비칠 때 부유물로 보이는 정도의 가루[日光塵, 隙遊塵]로 만들고, 더 부수어 우모진[牛毛塵ㆍ분자], 양모진[羊毛塵ㆍ원자], 토모진[兎毛塵ㆍ전자각(電子殼)], 수진[水塵ㆍ원자핵], 금진[金塵ㆍ원자핵의 본질], 미[微ㆍ식립(識粒, 식의 알갱이), 천안(天眼)으로만 보임], 극미[極微ㆍ색구경(色究竟, 물질의 끝), 법안(法眼)으로만 보임]로 쪼개고, 묘유의 극치인 인허[?虛ㆍ물질과 비물질의 경계, 염심근(染心根, 오염된 마음의 뿌리), 혜안(慧眼)으로만 보임]의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하여 진공원명[眞空圓明ㆍ진공의 온전한 빛, 불안(佛眼)으로만 보임]의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 석공관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