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불교 시작·중흥 이끈 이방인 선지식

中한족 이외 전래되면 ‘胡’로 붙여
호승 마라난타, 백제에 불교 전파
고려불교 새바람 일으킨 호승자공
한반도 불교의 발전, 호승 영향 커

신륵사 조사당 내에 모셔진 지공·나옹·무학 대사의 진영들. 가운데가 호승 지공 화상의 진영이다. 1363년 고려를 찾은 자공 화상은 당시 고려불교에 새바람을 일으켰고 나옹 선사에게 선맥을 전수했다.

한족의 중국이 영토와 문화에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사상에 대해서 기원이 언제인지는 학자마다 이론이 있지만 대개 이민족과의 충돌이 잦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미 정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춘추전국시대라면 이미 기원전 이야기다. 그 주장에 따르면 한족의 중국 이외 지역은 동서남북 순서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다. 그런데 이 중화사상은 자발적이든 강요에 의해서든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정 기간 공유된 세계관이었다. 

정치나 외교는 차치하고 단어나 표현에 있어서도 우리가 이런 중화사상을 공유했다는 증거는 분명하다. 당나라에서 들어온 나귀는 당(唐)나귀고 당나라에서 들어온 면은 당면(唐麵)이다. 그런데 한족 문화권이 아닌 곳에서 들어온 것에는 모두 ‘오랑캐 호(胡)’를 앞에 붙였다. 호주머니, 호밀, 호떡, 호도(호두), 호초(후추) 등이 그렇다. 

특이한 건 한족이 아닌 이들이 영토를 차지하자 중국 본토에서 들어왔어도 ‘호(胡)자’를 붙였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호란(胡亂)이라고 불렀고, 또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상인들이 들어와 팔던 떡은 호(胡)떡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일본에서 들어온 물건이나 먹거리에도 ‘호(胡)자’를 붙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전해진 호박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사도 얘기하면서도 ‘호(胡)자’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시작이 그랬고 한국 선불교의 법맥 중 가장 중요한 고리가 그랬다. 그들의 존재를 우리는 ‘호승(胡僧)’이라고 불렀다. 

호승, 한반도에 불교를 전하다
여전히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온 허황옥 일행에 의해 가야에 불교가 전해졌고 이게 초전이라는 남방전래설이 한 축이긴 하지만 여하튼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건 중국으로부터다. 

하지만 오해가 있다.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건 맞지만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건 중국 승려가 아니라 ‘호승(胡僧)’이었다.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1145년 전후 편찬), 〈해동고승전〉(1215년 전후 편찬), 〈삼국유사〉(1285년 전후 편찬) 공히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진(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면서’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사기〉와 〈유사〉의 기록에는 없지만 〈해동고승전〉에는 순도의 출신이 ‘서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백제 불교의 시작도 역시 서역의 승려였다. 〈사기〉에는 “(384년) 9월 호승 마라난타가 진(晉)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고승전〉에도 호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고승전〉을 참고했을 〈유사〉 역시 분명히 호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기〉와 〈유사〉와는 달리 마라난타의 삶을 몇 줄 더 기록할 수 있었던 〈고승전〉에는 마라난타가 ‘천축’으로부터 중국으로 들어왔고 다시 백제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인도’를 가리킨다. 최근에는 마라난타의 출신지를 놓고 간다라라는 설과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는 설이 맞붙어 지면상에 주장과 반박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왜 중국의 스님들이 아니라 인도 출신(상황에 따라서는 중앙아시아)의 스님들이 한반도로 들어왔을까?

이에 대해서는 우선 중국불교사를 살펴봐야 한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건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재위 58~75년) 때다. 물론 중국과 서역의 교통로가 개척되기 시작한 건 훨씬 전인 진한 무제(재위 BC 141~BC 87) 때로 알려져 있다. 물자가 오고 갔으니 자연스레 문화와 종교의 교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식적(?)이지는 않았을 터. 여하튼 중국에 불교가 수입된 건 서기 65년 전후로 본다. 그런데 터를 잡는 데는 또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대략 기원후 2세기~ 3세기 정도부터 산스크리트 경전의 한역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토대가 닦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또 이후 100년의 기간은 격의불교 시대였다. 불교 본래의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 구마라습(344~413)이다. 격의불교의 시대와 구마라습의 신역(新譯)이 있던 기간 사이에 대체로 중국에 불교교단이 성립된 것으로 보는데 호승 불도징(佛圖澄, 233~348)과 그의 제자인 도안(道安, 312~385)이 활동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계를 받는 한족이 없었는데 335년 전후로 한족 출가자들이 출현하게 된다.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372년과는 불과 40년 차이도 나지 않는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와는 또 50년 차이도 나지 않는다. 중국 교단이 이제 막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려고 했던 때 해외에 포교승까지 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불교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인도 혹은 중앙아시아 승려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다만,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의 출신에 대해서는 기록이 난잡하고 헷갈린다. 〈고승전〉에는 “승려 아도(釋阿道)는 혹은 본래 천축 사람이라고도 하고, 혹은 오나라에서 왔다고도 하며, 혹은 고구려에서 위나라로 들어갔다가 뒤에 신라로 돌아왔다고도 하지만 어느 말이 옳은지는 모르겠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흔히 같은 인물로 여겨지기도 하는 묵호자와는 “비슷하게 생겼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일연 스님도 〈고승전〉의 기록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논’을 따로 붙여 헷갈리니 정리해주겠다고 나서고 있다. 일연 스님 주장에 따르면 아도와 묵호자는 동일인물이며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왔다고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아도 화상은 240년~248년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위나라 사람 아굴마(我堀摩)와 고구려 사람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며 위나라에 들어갔다 다시 고구려로 넘어온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아도화상이 아니라면 신라에는 호승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기〉에는 신라 진흥왕 37년(576)에 수나라에 불법을 배우러 유학했던 안홍 법사가 호승 비마라(毗摩羅) 등 두 명의 승려와 함께 귀국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사기〉보다는 〈고승전〉의 내용이 조금 더 길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고승전〉은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며 “북천축오장국의 비마라진제의 나이는 44세, 농가타의 나이는 46세, 마두라국의 불타승가의 나이는 46세였다. 52개국을 경유하여 비로소 중국에 들어갔다가 드디어 해동으로 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해 내니, 신라의 승려 담화가 받아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삼국 모두 중국에 교단이 안착되기 전부터 불교를 수입하기 시작했으며 불교를 전한 이들은 한족 출신이 아니라 모두 인도 혹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한국 선불교 중심축, 지공 화상
고려 시대에도 호승은 꾸준히 한반도를 찾아왔다. 천축국 승려 마후라가(태조 12년, 929년)를 비롯해 서천축의 홍법 대사(태조 21년, 938년) 등이 잇따라 방문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송나라 승려의 입국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고려 중기를 넘어서면서는 토번 즉, 티베트 승려의 입국(원종 12년, 1271)이나 일본 승려의 입국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바로 호승 지공 화상의 입국이다.

자료를 종합하면 지공 화상은 인도 마가다국 만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여덟 살에 계를 받는다. 인도 나란다 대학의 마지막 졸업생이었으며(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슬람의 인도 침략으로 나란다 대학이 폐교한 시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인도 전역 순례를 마치고 원나라에 들어와서 교화를 펼친다. 지공 화상이 고려에 들어온 건 충숙왕 13년(1326)이었다. 이후 3년도 안 되는 기간에 지공 화상은 고려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다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고 이때 나옹 선사가 지공 화상에서 법을 전해 받는다. 지공 화상이 열반에 든 건 공민왕 12년(1363)년 연경 천수사에서 였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372년 제자가 지공 화상의 영골을 고려에 모셔왔고 공민왕은 명을 내려 회암사에 부도와 부도비를 세우고 사리를 안치한다. 사리 안치를 담당했던 이는 지공 화상의 제자였던 나옹 선사였다. 

이후 한국 선불교의 법맥은 지공→나옹→무학으로 이어진 것으로 본다. 나옹 선사 이후의 법맥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지만, 한국불교의 선맥(禪脈) 중간에 호승의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지공 화상에 대한 유물은 꽤 많은 편이다. 회암사지에 부도도 남아 있고 통도사, 대곡사, 신륵사 등에 삼화상(지공·나옹·무학) 진영도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호승은 한반도 불교의 시작 그리고 절정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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