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이 된 사찰, 사찰이 된 서원

백운동 서원. 숙수사터에 창건
당간지주 등 흔적들 여럿 남아
동학사, 유생 내분에 사격 유지
도산서원 승려 장인 참여 건립
아산 강당사, 폐서원서 연원 둬

소수서원에 남아있는 숙수사의 당간지주. 소수서원은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을 모셨는데, 안향이 공부한 곳이 숙수사라고 한다.

숙수사지에 세워진 ‘최초’ 서원
‘남순북송(南順北松)’이라는 말이 있다. 한강 이남엔 순흥, 한강 이북엔 송도라는 뜻이다. 순흥은 지금의 경북 영주 일대를 가리킨다. 어떤 기준인지는 몰라도 여기가 한때는 나름 번다한 지역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고려 말까지 얘기다. 

순흥부(順興府)가 첫 번째 파란을 맞은 것은 세조 3년이다. 순흥으로 귀향 와 있던 금성대군(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사전에 발각된다. 1457년(세조 3년) 6월이었다. 그해 8월에 세조는 순흥부를 아예 없애 버린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순흥부 폐지와 함께 “그 고을만을 혁파하는 것으로 족히 악(惡)을 징계할 수가 없다”며 “그 창고(倉庫)와 관사(館舍)를 파괴하고, 그 기지(基地)를 허물어버리라”고 이조에서 건의를 하고 왕 역시 그리 하라고 허락한다. 이때 엉뚱하게 유탄을 맞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숙수사(宿水寺)다. 일설에는 숙수사 스님들도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혐의를 받았다고 하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공식’ 기록은 없다. 유자(儒者)들의 난리에 한창 위축되어 있던 스님들이 또 다른 유자들의 ‘거사’에 동참했을 개연성은 낮다. 여하튼 신라 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숙수사의 역사는 관군이 지른 불에 허무하게 사라졌다.
 
순흥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된 건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에 의해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나중에 소수서원 편액을 받는다)이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그 위치가 얄궂다. 불탄 숙수사 터 위에 자리 잡은 것이다. 물론 ‘인연’을 찾자면 찾을 수는 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모셨는데, 안향과 그의 후손들이 한때 숙수사에서 글공부에 매진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하튼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된 최초의 사찰 터는 숙수사다. 아직도 당간지주를 비롯해 옛 숙수사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이밖에도 서원이 옛 절터 위에 들어선 경우는 많다. 가장 확실한 기록으로는 영봉서원을 들 수 있다. 16세기 이후 불교 세력이 크게 밀리고 유자들이 득세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서원이 될 뻔했던 동학사 
한때 서원이 될 뻔 한 사찰도 있다. 바로 공주 동학사(東鶴寺)다. 동학사의 창건 연대는 길게 잡아 신라 시대까지로 올라가지만 그때는 지금의 터도 지금의 이름도 아니었다. 작은 암자였던 동학사는 신라가 망하고 류차달이라는 이가 이곳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을 제사하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라는 사당을 지으면서 함께 일신했다. 사당이 번창하자 절 이름도 아예 동학사(東鶴寺)로 고쳐지었다. 현재 박제상을 모신 사당 이름은 동계사(東鷄祠)다. 동학사도 한때 동계사(東鷄寺)라는 이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동학사에는 이밖에도 조선 단종을 모신 사우인 숙모전,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 이색, 길재를 모신 삼은각 등이 있다. 이 세 곳은 현재 사찰 건물들과 잇대어 있는데 이를 통틀어 동학삼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세가 기울자 아예 여기 서원이 들어선다. 이름도 동학서원(東學書院)이었다. 그런데 헌종 때 사달이 나고 만다. 본래 정규흠이라는 사람은 공주 향교 담당자였는데 동학서원을 관리하던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규흠이 동학서원의 관리를 맡으려고 하자 일이 틀어진 것이다.

서로 관에 고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급기야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헌종 2년, 왕은 “서원을 다시 헐어 절로 만들게 하고 옛날대로 스님들에게 수호할 것”을 명한다. 유생들 간의 내분으로 절이 기사회생한 경우다.  

도산서원 중 도산서당. 퇴계 살아생전에는 서당만이 있었다. 이 서당을 지어 준 사람들이 승려 장인들이다.

사찰이 지어준 도산서원
앞에서 이야기한 소수서원이 ‘최초’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면 그 이름과 규모면에서 국내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서원은 도산서원이다. 우리나라 성인치고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은 많아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75년 발행돼 2007년 신권이 발행되기 전까지 1,000원 권의 뒷면에는 도산서원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이 처음부터 그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퇴계가 환갑을 맞았을 즈음인 1560~1561년 사이에 우선 ‘도산서당’이 완성되었고 퇴계가 죽은 지 6년 후(1576년)에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도산서원이 지어진다.

그런데 도산서당을 지어준 이가 사찰, 정확히는 두 승려의 공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스로 평면도를 그린 퇴계는 안동 용수사의 법연(法蓮) 스님에게 서당 건립을 부탁한다. 그런데 건물이 완성되기 전에 법연 스님이 입적을 하자 법연 스님의 제자인 정일(淨一 ) 스님이 마무리한다. 

기록에는 두 스님의 법명만 등장하지만 정황으로 보면 법연과 정일 스님은 공사를 총괄한 ‘대목’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용수사 그리고 인근 사찰의 스님들이 동원돼 서당 건축에 힘을 보탰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역에 건축을 할 수 있는 세력은 승려 집단이 유일했을 것이다. 특히 용수사 스님들은 지역의 건축 불사에 수시로 나섰던 기록이 있다. 1972년 봉정사 극락전 해체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23년(공민왕 12년, 1363) 예안의 용수사 축담 스님이 중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밖에 퇴계와 용수사와의 인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1500년경 서울에 있던 퇴계는 고향에 있던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이번에는 용수사에서 있는 기제사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전갈이었다. 이어 ‘한 달 안에 있을 단오제 때는 절에 들어가기로 하고 아들도 절에 오도록 당부’한다. 용수사는 퇴계 집안의 기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고 퇴계도 거의 빠짐없이 절에서 행하는 기제사에 참석했다. 이런 인연이 서당(서원) 건립에 절이 앞장섰던 이유다. 물론 젊은 시절 용수사는 퇴계의 공부방이기도 했다. 

사찰이 된 서원 ‘강당사’
마지막으로 짧게 사찰 하나를 소개한다. 번외편이라고 불러도 좋다. 

아산의 강당사다. 이 사찰도 아주 흥미로운 역사를 갖고 있다. 원래 이곳은 조선 영조 때 경연과(經筵官)을 지낸 이간(李柬)이 지기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서원이었다. 그런데 1868년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이를 모면하고자 가까운 마곡사에서 불상 한 분을 모셔다 봉안하게 된다. 절이 시작된 내력이다. 

그런데 불상을 모시고도 한동안은 절의 기능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1995년 조계종 소속의 비구니 스님들이 사찰에 들어와 살면서 사찰이 현재의 모습으로 일신하게 됐다. 예전 서원의 모습도 일부 남아 있고 책을 보관하던 서고 터도 그대로다. 대웅전은 옛 서원 영역 뒤편에 새로 지어 놓았다. 

빈대(儒子)가 들끓어서… 
조선조 500년 내내 사찰과 스님들은 유자(儒子)들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렸다. 산천 유람길에 스님들에게 경마잡이를 시키는가 하면 사찰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때론 불상을 부수기도 하고 값이 나가는 건 훔쳐가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폐사가 된 곳에는 서원을 세우거나 조상의 묘를 쓰기도 했다. 

조선 시대 폐사된 사찰에 남아 있는 구전 중에는 유독 ‘절에 빈대가 들끓어서 스님이 불태우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많다. 실제 절에 그렇게 빈대가 많아서 스님이 절을 불태웠을 리는 없다. 그게 전국에 폐사된 사찰마다 반복되었다는 것도 개연성이 전혀 없다. 여기서 등장하는 빈대는 아마 유자(儒子)였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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