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개경의 수원승도

각종 사료에 “승려가 30%” 기록
고려 인구 150만 명이 승려인 셈
무분별 출가 막고자 출가 제한해?
사원전 부역하는 ‘수원승도’ 형성?
75%가 승도 이고 25%만 수행승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있는 개경 현화사 석등. 고려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에서 개경 현화사 수원승도 승려 300명이 이자겸 편에 서서 왕당파와 일전을 벌였다. 당시 현화사에는 출가한 이자겸의 장남 의장이 있었다.

‘고려시대 불교가 흥성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사람들도 실제 규모를 기술한 자료를 보여주면 놀라는 사람이 많다.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완간한 〈신편한국사〉에 따르면 나말여초 승려의 숫자를 전체 인구의 1/3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정확한 인구 통계는 없으나 각종 사료가 이를 증명한다. 고려가 막 멸망하고 4년차에 접어들 무렵인 조선 태조 4년 2월 19일자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대사헌 박경이 상서를 올리며 “백성 가운데 승려의 숫자가 10분의 3”이라고 명토박아 말하고 있다.

중국 사서의 기록은 좀 더 많다. 〈송사(宋史)〉 고려전에 따르면 “고려 인구는 남녀 210만 명이고, 이 가운데 병(兵), 민(民), 승(僧)이 각각 1/3”이라고 적고 있다. 실록의 기록보다 조금 더 높게 잡았다.  

개인 문집에는 이 숫자가 더 올라간다. 이규보와 이색은 개인 문집에서 ‘백성의 반은 승(僧)’이라고 묘사했다. 

여하튼 송사에서 기록한 대로 고려 시대 인구를 210만으로 잡으면 70만 명 이상, 최근 통계청 〈인구대사전〉에서 추정한대로 500만 명으로 잡으면 150만 명 이상이 승려였던 셈이다.

그런데 〈송사〉의 기록대로 병이 1/3, 승이 1/3이면 민 1/3이 나머지 2/3를 먹여 살려야 하는 구조다. 이게 가능했을까?

가능했다. 이걸 가능하게 했던 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토지다. 고려 말 사찰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전체 국토의 약 1/8로 추정되고 있다. 국가와 백성의 지원은 물론 사찰 자체적으로 그 많은 승려의 뒷바라지가 가능한 경제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님들이 땅을 갈고 김을 매지 않았을 터이니 토지가 1/8이었다고 하더라도 이걸 경작해야 하는 건 어차피 민(民)이었고 그러면 도긴개긴이 아니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비밀이 있다. 바로 ‘수원승도(隨院僧徒)’라는 존재다.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원에 ‘예속된 하급 승려’라는 규정도 있고, ‘일반 하층계급이 입산해 형성된 승려층으로 노비와 다름없다’는 주장도 있다.   

연구자들에 따라 조금씩 주장은 다르지만 수원승도는 승려와 노비 사이의 어떤 존재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이고 있다. 승려 70만 혹은 150만 명의 ‘비밀’은 이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숫자다.   

1/4은 ‘승려’ 3/4는 ‘승도’
수원승도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고려시대 출가제도를 좀 살펴봐야 한다. 

고려시대 스님들이 구족계를 받은 장면을 묘사하는 문서들을 보면 ‘관단(官壇)’이라는 용어가 종종 등장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계단(戒壇)이라는 뜻이다. 사미계까지는 불교계 자율에 맡겼지만 이후 구족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관리했다.  

그런데 이 관단에서 수계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향·소·부곡(鄕·所·部曲)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대개 전쟁 포로나 역모죄인이 모여 사는 동네거나 또는 민란 발생 지역이었던 곳이다. 또 한 군데는 진역(津驛)의 주민들이다. 강이나 내 등에서 나룻배가 닿고 떠나던 곳이라 출가를 제한했다. 마지막으로 양계(兩界)지역 출신들이다. 시기에 따라 증감은 있었지만 대개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 그리고 평안도 지역에 해당한다.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지역 제한’만으로도 출가할 수 있는 인원은 현격히 줄어든다. 하지만 여기에 한 집안에서 출가할 수 있는 숫자 제한까지 뒀다. 정종 2년에는 ‘아들이 네 명(이상이)이 있는 경우 한 명의 출가를 허락’했고, 문종 13년에는 이 규제가 조금 완화되어 ‘아들이 세 명(이상)이 있는 경우 한 명의 출가를 허락’했다. 

여하튼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누구나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은 철저히 법으로 금지되었다. 당연히 공사노비가 출가하는 건 불가능했고,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향·소·부곡을 넘어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 주민들의 출가도 막았다. 현종 대에는 여성 출가를 엄격히 금지했고, 충숙왕 대에 이르면 도첩을 발행했는데 조건은 포 50필이었다. 당시 무명 한 필이 쌀 다섯 말에 해당하는 가치였으니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계속 이런 ‘금지’조항이 생겼다는 건 이런 사람들의 출가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정식 승려가 아니었지만 사찰에서 비승비속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사찰 근처의 민가에 살며 사원 소유의 토지를 경작했다. 당연히 사찰의 토지를 붙여먹고 살았으니 수확의 일정량은 사찰에 내야했다. 필요하면 사찰의 각종 잡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들이 어떻게 발생하게 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국가에서 사원전을 지급할 때 대개 노비도 딸려 보냈는데 그들로부터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 부역을 피하기 위해 온 사람들, 혹은 무전민일 가능성이 높다. 송나라 사절 서긍이 한 달 동안 고려에 머물며 저술했던 〈고려도경〉에는 ‘수원승도’로 추정할 만한 사람들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서긍은 그들을 ‘재가화상’이라고 불렀다.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은 색 끈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만들며 아내를 두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며 도량을 내며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에 종사한다. 변경된 정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데 익숙하지는 않기는 하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군대에 가게 되면 스스로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서 전쟁을 할 수 있다. 듣기로는 거란이 고려인에게 패한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의 힘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 형벌을 받은 복역자들인데 이쪽 사람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버린 것을 두고 화상이라고 붙였다.”

그렇다면 실제 ‘공인’된 승려와 수원승도의 비율은 어떻게 되었을까? 15년 전 동국대 역사교육과 임영정 교수는 〈고려시대 수원승도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을 분석하며 “통도사에 4천 명의 승려가 거주하였고 이중에 1000명의 승려는 매일 본사를 왕래하며 사리 가사를 첨례하는 등 수도생활에만 전념했고, 3000여 명은 사역승”이라고 밝혔다. 

비록 한 사찰의 예이긴 하지만 1/4만이 수도에 전념하는 ‘수행승’이었고 나머지 3/4은 사찰 토지를 경작하거나 사찰의 잡역에 동원된 ‘승려’였다는 것이다.  

격변기 역사와 수원승도 
〈고려도경〉의 묘사에서도 얼핏 보이듯 수원승도의 특징 중 하나는 단순히 비승비속으로 살며 사찰과 관련된 ‘일’을 했다는 것뿐 아니라 ‘무장’을 했거나 ‘무장’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사찰의 사병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고려사 격변기에는 수원승도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우선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이들을 차출해 군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는 “승도를 뽑아 항마군을 만들었다. 나라 초기부터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원에 모두 수원승도가 있어 항상 노역을 담당하였는데, 마치 군현의 거민과 같고, 항산(恒産-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자가 많아 천백에 달하였다. 매번 국가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면 중앙과 지방의 여러 사원의 수원승도를 징발하여 여러 군부대에 분속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시대가 ‘격변’에 접어들자 수원승도도 사찰에 따라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었다. 인종 2년 왕당파가 외척 이자겸의 수하인 척준경의 아들 척순, 척준신 등을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자겸의 난에서 당시 현화사 승려로 출가해 있던 이자겸의 아들 의장(義莊)은 개경 현화사 승려 300명을 끌고 와 왕당파와 일전을 벌인다. 왕당파는 승려들의 기세에 밀려 쫓겨나고 인종도 선위하겠다는 문서를 이자겸에게 건넨다. 평소 훈련된 무장 세력이 아니었다면 쉬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왕을 옹위하기 위한 수원승도의 반란도 여러 건 있었다. 횟수가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사찰 이름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기록 하나만 더 살펴보자. 〈고려사〉 열전 최충헌조의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흥왕사(興王寺)·홍원사(弘圓寺)·경복사(景福寺)·왕륜사(王輪寺)·안양사(安養寺)·수리사(修理寺)의 승려로 종군하는 사람들이 최충헌을 죽일 것을 모의한 후, 패잔병으로 가장하여 새벽에 선의문에 와서 다급하게 외치기를, ‘거란군이 이미 도착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수문군이 막아서 들어오지 못하자, 승병(僧兵)들은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수문군 대여섯 명을 죽였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사찰들은 대부분 개경 도성 안팎에 위치한 사찰들이다. ‘수도권’에 있는 사찰이니 친위대나 반란군이 되기 쉬웠다. 또 왕실과 권문세가들은 이들을 동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식을 출가시키거나 사찰의 단월이 되었다.

이렇게 수원승도의 존재와 역사적 격변기에 그들이 활동했던 무대는 대부분 개경이었다. 물론 지역의 대찰에도 수원승도의 존재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앙정치의 무대인 개경에서의 ‘활약’이 사서에 자주 등장한다.

개경(개성)은 지금은 북녘 땅이라 당연히 갈 수도 볼 수도 없다. 하지만 꽤 많은 유물이 서울에 남아 있다. 물론 사찰이 아니라 박물관이다. 

물론 제일 유명한 유물은 경천사지 10층 석탑이다. 규모나 조각 솜씨로 볼 때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앞에 이자겸의 난에도 등장했던 현화사의 유물 하나도 몹시 눈길을 끈다. 석등인데 그 규모만으로 사찰의 위세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박물관에는 한때 남계원 7층 석탑이라고 불렸던 개국사 탑 등 꽤 많은 개경 ‘출신’ 사찰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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