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 두개골 탈취… 韓中불교 비사

쌍계사 금당 內 조성된 육조정상탑
혜능 두개골 탈취·봉안 설화 전해
결론적으로 탑엔 육조 두개골 없어

〈육조단경〉 나온 혜능 예언 기반한
한국불교만의 연기설화 스토리텔링

쌍계사 금당 전경. 안에 부처님이 아닌 탑이 모셔져 있는 것이 보인다. 현판에도 보이듯 육조정상탑으로 신라 스님이 육조 혜능의 두개골을 탈취해 모셨다는 연기설화가 있다. 하지만 육조 혜능 두개골은 탑에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찰의 축선이 두 곳이 된 곳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하동 쌍계사를 들 수 있다. 쌍계사의 경우는 좁은 공간 탓에 중창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축선이 두 개가 됐다. 동서의 축선을 가진 대웅전 영역과 남북의 축선을 가진 금당 영역으로 나뉜다. 금당 영역의 중심 법당은 역시 금당(金堂)이다. 하지만 일반인은 금당에 아무 때나 출입할 수 없다. 선원이 있기 때문이다. 동안거 3개월, 하안거 3개월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이 같은 금당 자리는 옛부터 ‘설리갈화지지(雪裏葛花之地)’라고 했다. 아주 양지바른 곳이라 한겨울 눈 속에도 칡꽃이 피는 곳이다. 아주 길상한 땅이라는 뜻이다. 봄바람이 찬 이른 아침에 쌍계사에 가보면 다른 전각의 문들은 꼭꼭 닫혀 있어도 금당 출입문만은 활짝 열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햇빛도 잘 들어오고 바람도 잘 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터만큼이나 금당이 갖고 있는 사연이 흥미롭다. 중국 불교 선종의 6대조인 혜능 선사의 두개골을 모셨다는 육조정상탑이 법당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탑을 법당 안에 배치한 것도 흥미롭고 그 탑 안에 육조 혜능의 두개골이 모셔졌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육조정상탑 이야기는 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혜능 스님이 입적하고 얼마 뒤 신라 스님이 중국에 건너가 혜능 스님의 머리를 탈취해 우리나라로 돌아와 모셨다는 것이다. 조금 엽기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사실은 아니다’이다.

실제 광둥성 남화선사에는 혜능 선사의 등신불이 지금도 온전히 모셔져 있다. 물론 머리 부분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 관련 문헌을 검토한 학자들 역시 일관되게 육조정상탑에 ‘혜능의 두개골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 역시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혜능으로 대표되는 선종이 이 땅에 법으로 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자리 잡고 있다고 하는 자부심을 갖고 싶었던 한반도 수행자들의 그 갸륵한 마음은 또 한 켠으로 인정해야 한다. 
 
혜능의 예언
이야기의 출발은 〈육조단경〉이다. 자신의 열반을 알리는 법문 중에 대중이 육조 스님에게 묻는다.

대중: 뒷날 스님 때문에 무슨 변란이 없겠습니까?
육조: 내가 열반 한 뒤 5, 6년이 지나 한 사람이 내 머리를 가지러 올 것이다. 
이어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진다. “정만이가 밥을 구하기 위해 육조 목을 팔려했지만 관리 양간 유무첨이 해결을 한다.” 

〈육조단경〉은 혜능 스님의 말년 법문 모음집이다. 그런데 그 말미에 혜능 스님은 ‘예언’을 하나 한다. 내가 죽은 뒤 누군가 나의 머리를 가지러 올 것이라는 것이다.(이 대목은 돈황본 등에는 없고 덕이본 등에 나온다.) 

예언이 맞은 것인지 아니면 말이 씨가 된 것인지 실제 육조 혜능 머리 강탈 사건이 벌어진다. 

〈육조단경〉의 후기에는 탑을 지키던 영도 스님이 쓴 글도 실려 있다. 이야기의 전말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대사께서 열반에 드신 후 개원십년 임술 팔월 초사흘에 이르러 한밤중에  홀연 탑 속에서 쇠줄 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중들이 놀라 잠자리에서 쫓아가 보니 상복 차림을 한 사람이 탑 속에서 나와 도망을 갔다.”

그렇다면 정말 혜능 스님의 머리는 도난을 당했을까? 영도 스님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탑 속을 살펴보니 대사의 목에 상처가 있어서 이 사실을 고을 관아에 알렸다. 관리 양간과 자사 유무첨이 통보를 받고 그 도적을 잡으려 노력한지 닷새째에 석각촌에서 체포하고 소주에서 심문을 하였다. 도적의 이름은 장정만으로 여주 양현 사람이었다. 그는 홍주 개원사에서 신라 승려 김대비에게 돈 20천(2만) 냥을 받고 육조 스님의 머리를 취해 해동으로 모시고 돌아가 공양하려 했다는 것이다.”

혜능 스님은 714년 전후에 열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도 스님이 말한 개원십년(開元十年)은 722년이다. 혜능 스님이 말한 5~6년에서는 조금의 시차가 있다. 여하튼 〈육조단경〉 덕이본 후기에서는 이 사건이 ‘미수’에 그쳤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은 실제 벌어졌던 것이 확실하다. 〈육조단경〉 외에도 이 ‘사건’을 기록한 기록은 더 있다. 801년 간행된 〈보림전〉에도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다만 〈보림전〉은 유실됐는데 〈보림전〉을 인용한 송나라 시대 〈조정사원(祖廷事苑)〉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역사’를 다르게 기록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해동(海東)의 사람들이다. 
 

쌍계사 금당 내 조성된 육조정상탑. 육조 혜능 두개골 탈취 설화는 〈육조단경〉의 육조 혜능의 예언에 기반해 한국불교만의 스토리텔링이 가미돼 나온 결과물이다.

다르게 기록하고 싶은 사람들
우선 탈취 사건의 주모자와 공모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육조단경〉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일의 총기획자는 신라의 삼법 스님이다. 기록에 따르면 삼법 스님은 혜능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던 차에 규창(圭晶)이라는 스님이 당나라로부터 가지고 온 〈육조단경〉 초본을 보게 된다. 그리고 무릎을 쳤다. “내가 입적한 후 5, 6년 뒤에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다”라는 기록을 본 것이다. 

당나라까지 가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영묘사(靈妙寺)의 비구니 법정(法淨) 스님을 찾아간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법정 스님은 출가 전 김유신 장군의 부인이었던 지소(智炤)였다. 김유신 장군이 죽자 출가한 것이다. 충분히 자금을 댈 만한 여력이 있었을 것이다. 삼법 스님이 법정 스님에게 받은 돈은 2만금이었다. 

그 후 상선을 통해 당나라로 건너간 삼법 스님은 백방으로 궁리를 했지만 스스로 일을 마무리 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던 중에 백률사 스님인 대비(大悲) 선사가 마침 홍주 개원사 보현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비 선사 역시 삼법 스님의 계획에 동조하고 당시 절에 살던 장정만(張淨滿)이라는 사람을 섭외한다. 법정 스님에게 받은 2만금이 장정만에게 전달됐다. 

여기까지는 중국 측 기록과 우리 기록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수에 그쳤다는 중국 측 기록과 달리 각훈 스님이 썼다는 ‘동래연기’, 최치원이 쓴 쌍계사 진감 선사 비문 등은 미수가 아니라 ‘성공’으로 기록하고 있다. 종합하면 ‘거사에 성공한 후 항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신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곁가지 얘기가 더 있다. 각훈 스님의 동래연기에는 1차 시도는 김대비 스님이었으며 삼법 스님이 다시 김대비 스님과 협력해 2차 시도를 했고 2차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학자들은 각훈 스님이 썼다는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1차 사료가 문제가 있으니 이후 ‘동래연기’를 토대로 썼던 글들 역시 신뢰할 수 없다. 

무엇보다 지금도 육조 혜능의 진신이 훼손되지 않고 전해져오는 것이 ‘계획’이 성공하지 않았다는 걸 방증한다. 

하지만 물 한 잔도 진심이 있다면 성스러워지는 것이고 돌 하나도 닦고 다듬고 기도하면 성보가 되는 것이 이치다. 1000년 넘게 갈고 닦아온 한국불교사 최고의 스토리텔링에 역사적 사실을 들이대며 참배하지 않을 일이 없다. 게다가 엽기 탈취 사건이라니 흥미롭지 아니한가.

앞에도 얘기했지만 육조정상탑은 아무 때나 볼 수 없다. 그런데 올해는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윤 4월 8일(양력 5월 30일)로 옮겨지면서 하안거 역시 한달 늦은 윤 4월 15일(양력 6월 6일)로 미뤄졌다. 덕분에 육조정상탑이 있는 쌍계사 금당을 참배할 기회가 자연스레 늘어났다. 독자들에게 어서 가서 참배하라고 재촉하고 싶은 마음에 흔하고 묵은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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