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보유전] 11. 용미리 쌍석불입상·해인사 쌍비로자나불
[성보유전] 11. 용미리 쌍석불입상·해인사 쌍비로자나불
  • 이상근/ 불광출판사 편집주간
  • 승인 2020.05.3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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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家 러브 스토리’ 불상에 담다

용미리석불 남녀 불상 구별해
‘1471년 왕후 왕생’ 기원 명문
평생 정희왕후만 사랑한 세조
둘의 愛史 담아 불상으로 조성
​​​​​​​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
‘진성여왕·위홍의 불상’ 기록
친족이자 연인… 당시엔 가능
파주 용미리 쌍석불입상의 모습. 세조와 정희왕후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다.
파주 용미리 쌍석불입상의 모습. 세조와 정희왕후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다.

사찰에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있는 게 없다. 건물이나 조각은 물론이고 문양이나 그림에 있는 작은 조연들까지도 다 의미와 사연이 있다. 

멀리 인도에서부터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중국을 거쳐 이 땅까지 전해져온 이야기도 있고, 인도는 빼고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 잘 가공돼 이 땅으로 전해져온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이 땅에서 자생한 이야기도 우리 사찰에는 담겨 있다.

중국에서 넘어온 것 중에는 숫자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탑이 대표적인데 팔각구층석탑처럼 수직(위)으로 1·3·5·7·9·13 등 양수를, 수평(옆면)으로 음수인 짝수를 쓴다. 음양오행이나 삼재(三才)사상이 녹아든 결과다. 가끔 10층탑은 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10층탑은 하단이 3, 상단이 7로 구성돼 있는 걸 알 수 있다. 

불상을 법당에 모실 때도 마찬가지다. 홀로 모시거나 삼존불, 삼세불처럼 세 분을 모신다. 홀로 모셨을 때도 좌우에 협시는 짝수로 배치해 전체적으로 홀수를 유지한다. 가끔은 칠불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배치가 적용이 되지 않는 예들이 있다. 우선 문을 지키는 보살이나 신중을 배치할 때다. 좌우에서 지키고 가운데로는 지나가야 하니 피칠 못할 배치다. 경전에 근거해 조각하거나 그리는 때도 좌우 배치가 나타난다. 이불병좌가 대표적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에 나온 이야기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형상화했는데 석가불과 다보불이 칠보탑 안에 ‘나란히’ 등장한다. 다른 예로는 관음·지장보살병립도(혹은 조각)이나 아미타불·지장보살병립도처럼 망자추선(亡者追善)을 목적으로 제작된 그림이나 조각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나 고려불화 등에 간혹 보인다. 이런 ‘특수 목적’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상 배치는 모두 홀수다. 하지만 역시 ‘예외’는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사랑이야기
파주 혜음원지와 멀지 않은 용미리에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이 있다. 커다란 바위에 몸체를 새기고 여기에 각각 머리를 올렸다. 한 분은 원형 삿갓(圓笠佛, 부처님이 서 계신 것을 기준으로 오른쪽 편)을 쓰고 있고 한 분은 사각형의 삿갓(方笠佛, 부처님이 서 계신 것을 기준으로 왼쪽 편)을 쓰고 있다. 불상의 성별을 구별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원형 삿갓을 쓰고 계신 부처님을 ‘남자’, 사각형 삿갓을 쓰고 계신 부처님을 ‘여자’로 부른다. 듣고 다시 보면 실제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불상이 조각된 시대를 ‘고려시대’로 추정했다. 실제 ‘전설’도 이를 방증했다. 고려 선종(재위 1083~1094)이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원신궁주)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이때 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인데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꿈에서 깬 궁주가 이 내용을 왕에게 아뢰었고 이에 왕이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장지산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왕이 즉시 이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니 그 해에 궁주에게 태기가 있었다.

전설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전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전이 생겼다. 1995년 석불입상 앞쪽에서 200여 자의 명문이 발견된 것이다. 희미해 모든 글자가 판독되지는 않았지만 ‘성화(成化) 7년’이라는 글자 그리고 세조와 그 비인 정희왕후와 관련된 내용은 확인되었다. 우선 성화 7년은 1471년, 조선 성종 2년에 해당한다. 가끔 용미리 불상을 소개하며 ‘세조와 정희왕후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라는 글들이 보이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희왕후는 1483년 사망했다. 죽기 전에 극락왕생을 빌었다는 말인데, 말이 안 되지는 않지만 흔하지는 않은 경우다. 그보다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러브스토리 그리고 정희왕후의 불교 후원을 살펴보는 게 더 설득력 있는 얘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조는 잔인한 사람이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한명회가 기획한 살생부 작성을 용인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개인사 곳곳에는 의외의 면도 자주 발견된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정희왕후와의 사랑이다. 세조에게 정희왕후는 첫사랑이자 끝사랑이었다. 비록 신하들의 등쌀에 후궁을 한 명 들이기는 했지만 조선 역사를 통틀어 한 명의 후궁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들이 때는 꼭 정희왕후와 동반했으며 사냥터에도 데려갔다고 한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말년 세조의 호불(護佛)도 유명하지만 정희왕후의 호불 역시 남달랐다. 세조의 아들 예종 때 상원사 토지 문제로 신하들이 문제를 삼자 반대로 “강릉부(江陵府) 산산 제언(蒜山提堰)을 상원사(上元寺)에 주고, 또 잡역(雜役)과 염분세(鹽盆稅)를 면제해 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희왕후의 작품이었다. 이밖에도 정희왕후의 불교 후원은 손자 성종이 왕위에 올라 수렴청정을 할 때도 끊임이 없었다. 

이런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용미리 석불이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이라는 주장에 힘이 될 수도 있다. 

또 하나, 앞에서 얘기했지만 불상을 쌍으로 세우는 예는 거의 없다. 어디어디에서 쌍으로 발견된 불상이 있다고 해서 살펴보면 어떤 불상의 좌우협시가 발견된 예들이 대부분이다. 하나의 힌트가 더 있다. 사람들이 둥근 갓을 쓴 미륵은 남자 미륵, 네모 갓을 쓴 미륵은 여자 미륵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음양으로 따져도 하늘, 남자 등을 뜻하는 모양은 동그라미고, 땅, 여자를 뜻하는 모양은 네모다. 갓으로 남자와 여자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남자와 여자를 표현했다면 스토리텔링 상으로는 두 승려보다는 세조와 정희왕후인 남녀가 맞을 것이다.

기법으로 시대를 추정하는 것에 많은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기법에 속아 또한 연대 측정을 잘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꿈 이야기보다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러브스토리에 한 표를 주고 싶다. 

그런데 이런 러브스토리로 또 예외를 만든 불상이 한 쌍 더 있다. 바로 해인사 쌍비로자나불이다.

해인사 쌍비로자나불의 모습. 진성여왕과 그의 숙부 위홍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다.
해인사 쌍비로자나불의 모습. 진성여왕과 그의 숙부 위홍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다.

진성여왕과 위홍의 사랑이야기
해인사 중심 법당은 대적광전이다. 법당의 이름에 걸맞게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원래 해인사 것이 아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해인사 대적광전에 자리했고 좌우에 문수·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비로자나불과 문수·보현보살 사이에 각각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 그리고 문수, 보현보살 좌우측에 각각 관음보살과 법기보살을 모셨다는 것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여하튼 홀수를 유지하고 있다. 불상의 배치는 다르지만 칠불을 모신 법당은 심심치 않게 있다. 오히려 해인사에서 가장 특이한 불상 배치는 대적광전이 아니라 대적광전 우측, 그러니깐 원래 명부전, 응진전, 독성각이 있던 자리에 지난 2007년 낙성된 대비로전에 있다. 이곳에도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모두 두 분이다. 좌우의 모습도 똑같다. 

이런 배치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지난 2005년 대장경판전의 법보전에 모셨던 비로자나불의 개금불사를 위해 복장 유물을 개봉하는 과정에서 연기문이 발견된 것이다. 연기문에는 두 불상이 ‘대각간과 비(妃)의 부처님이며 중화3년(883년) 계묘년 여름 금칠을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신라 시대는 세 명의 여왕이 있었다. 그 중에 통일신라 시기 여왕은 진성여왕 한 명이다. 진성여왕은 왕이 되기 전 숙부인 위홍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신라 그리고 고려 초까지는 ‘가능한’ 이야기였다. 진성여왕의 재위 기간이 887년부터 897년까지였고 불상이 만들어진 것이 883년이니 아마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각별했던 두 사람의 사랑을 발원하기 위해 만들었던 불상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사랑에도 끝이 있는 법. 위홍은 진성여왕 즉위 2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공교롭게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이때부터 나라가 몹시 혼란스러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인과의 사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정치할 의욕마저 꺾였으리라. 결국 계속된 혼란에 진성여왕은 다른 이에게 선위(禪位)하고 물러난다. 진성여왕은 선위한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그와 위홍의 사랑 이야기는 해인사의 암자인 원당암에도 뿌려져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종교 건축은 예외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딜 가도 구조와 형식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다만 흔치 않은 이형들이 있으니 그곳에는 대개 ‘이야기’가 끼어든다. 저 불상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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