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火가 앗아간 ‘성스런 보물’들 ??

역사상 최악의 전쟁 ‘여몽전쟁’
몽고군 29년간 한반도 유린해
황룡사 9층목탑, 장육상 소실
金 소재 황룡사 대종도 사라져
‘이동 중 동해에 빠졌다’ 구전돼

경주 황룡사 목탑지의 모습. 2만 평이 넘는 규모에 세워진 황룡사에는 70m 높이의 ‘랜드마크’ 9층 목탑이 서 있었다. 중금당에는 거대한 장육삼존불상과 함께 19존의 불·보살·제자의 상이 있었다. 하지만 여몽전쟁으로 인해 모두 소실됐다.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전쟁
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제목에 이끌려 클릭을 하게 된 사이트가 있다.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 TOP3’다.

3위는 1580년대 생이었다. 10~20대 임진왜란을 겪었고 40대에는 정묘호란, 50대에는 병자호란을 겪은 세대다. 

2위는 1660년대 생이다. 10대 때 경신대기근, 30대 때 을병대기근을 겪은 세대다. 당시는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고 한다. 이 시대를 살던 노인들 중에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겪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차라리 전쟁 때가 나았다’는 회고를 했을 정도다.

1위는 어떤 세대였을까? 바로 1220년대 생이다. 10대쯤 몽골의 첫 침입을 경험한 이 세대는 이후 29년 동안 총 아홉 차례의 몽골 침입을 겪은 세대다. 

한국사 교과서에 여몽전쟁이라고 명명된 이 전쟁을 역사가들 역시 공히 ‘최악의 전쟁’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기간도 무려 29년이었지만 전개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었고, 그 피해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그리고 한국전쟁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몽골과 강화에 나서면 자신들의 정권이 무너질 걸 걱정한 무인정권(당시는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무인정권 최고실력자였다)은 왕을 데리고 부리나케 강화도로 피난했다. 왕보다 먼저 강화도에 도착한 것은 최이의 재산을 실은 수레 100대였다. 전쟁이 나서 왕들이 피난을 간 경우는 우리 역사에 흔한 일이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무인정권은 강화도에 들어가서도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사태가 수습되는 순간 권력은 자신들의 손을 떠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성은 안중에 없었고 오직 ‘권력’이었다. 기껏 내린 지시라는 게 ‘알아서 피해있으라’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정말 ‘알아서’ 피했다. 지금도 설악산 주봉인 대청봉 근처에는 천연의 암벽 요새지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몽골 침입 당시 백성들이 쌓았다는 권금성이다. 권(權)씨와 김(金)씨가 쌓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3세기 전반에 활동한 석익장(釋益莊)의 〈낙산사기(洛山寺記)〉를 인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유래가 분명히 밝혀져 있다. 

싸움을 걸어도 아예 반응하지 않고 섬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니 몽골군은 전쟁이 아니라 유린을 했다. 도성인 개경 근처는 물론 저 남쪽 경주나 대구도 모두 쓸어버렸다. 그러다가 또 지치면 우리 백성을 동원해 농사까지 지으며 섬에서 왕과 최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이게 무슨 ‘전쟁’인지 의아하기만 하다.

여하튼 전쟁은 1259년 무인들 사이의 내분으로 무오정변이 일어나면서 최이 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의 강화 조약이 체결돼 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역사책에 항쟁으로 대서특필된 삼별초는 사실 무인정권의 사병 무리였다. 군사정권 시절 이들의 항쟁은 치켜세운 역사 기록이 횡행했는데 지금 삼별초를 ‘민족의식의 발로’라고 이야기하는 역사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29년의 전쟁으로 무엇보다 백성들의 피해가 컸지만 불교계 그리고 문화재의 수난 역시 만만치 않았다. 1차 침입 때는 지난 연재에 언급했던 흥왕사가 불탔으며, 2차 침입 때는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고 말았다. 3차 침입 때는 경주에 있던 황룡사가 소실되었는데 9층 목탑이 불타고 대종은 사라지고 말았다. 

전소된 9층 목탑, 장육상 그리고 사라진 종
규모로 따지자면 신라 최대 규모의 사찰은 불국사였다. 하지만 신라인들이 황룡사에 가진 자부심은 남달랐을 것이다. 도성과 멀리 않은 곳 평지에 2만 평이 넘는 규모에 세워진 황룡사에는 70m 높이의 ‘랜드마크’ 황룡사 9층 목탑이 서 있었다. 중금당에는 거대한 장육삼존불상과 함께 19존의 불·보살·제자의 상이 있었다. 법당에는 솔거가 그린 늙은 소나무 그림이 있었는데 어찌나 사실적이었는지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 벽에 부딪쳐 죽는 일까지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얼마나 화려했을까. 하지만 1238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만다. 

고구려, 백제, 신라 중에 목탑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고구려 때 세운 청암리사지 목탑은 60m, 정릉사지 목탑은 40m로 추정하고 있다. 만만치 않은 높이다. 반면 석탑을 만드는 기술은 황룡사 창건이 있던 진흥왕 30년 전후(569) 당시까지만 해도 백제가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미술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실제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주도한 사람도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였다. 

그런데 황룡사 9층 목탑은 밖에서 보기만 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직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그 안에서 예경이나 참배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연유로 항상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 기록에는 정종 4년(949년), 헌종 원년(1094년) 각각 황룡사 목탑 화재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전소에 대한 기록이 없던 걸로 봐서는 부분적인 피해만 입고 진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황룡사는 몽골의 침입으로 활활 타올라 이제는 터만 남아 있다. 그런데 불타 없어진 유물 말고 ‘사라진’ 유물이 하나 있다. 바로 황룡사 대종이다.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대종은 성덕대왕신종보다 몇 배는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몽골 군대는 이 대종을 감포 앞바다를 통해 배에 싣고 어디로 가져가려고 했던 모양이다. 

토함산 자락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해 감은사 앞을 거쳐 동해로 이어지는 길목에 ‘대종천(大鍾川)’이라는 이름이 붙은 물길이 있는데, 몽골 군대가 토함산에서 굴린 이 종을 대종천을 이용해 동해로 빼내려다가 그만 종을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몇십 년 전만 해도 근방에 사는 사람들 중에 파도가 심하게 치면 종소리가 난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역사적 사실과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실제 몇 차례 발굴 시도도 있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직도 황룡사 대종은 동해바다 어디쯤 가라앉아 있을지 모른다. 

세계서 두 번째로 간행된 한역대장경
초조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관판 대장경(官版大藏經, 971∼983)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간행한 한역(漢譯) 대장경이다. 몽골에 의해 불타기 전 부인사 장경각에 있었던 목판은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의 두 배가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권수로는 1만 권이 넘었을 것이다. 사서에 등장하는 숫자만 신뢰한다면 6천 권 안팎이다. 

초조대장경은 물론 공식적으로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칠 목적’으로 판각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저간의 사정을 보면 그 이전부터 대장경 간행을 위한 꾸준한 작업이 있었던 것 같다. 〈고려사〉에는 경전 수집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물론 이 중심에 문종의 아들이자 순종, 선종, 숙종의 친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이 있었다. 초초대장경은 그가 초대 주지로 있던 개경의 흥왕사에서 기획되고 처음 추진되었다.   

그런데 초조대장경은 학자에 따라 착수 시기와 완성 시기를 각기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 1011년에 시작하여 1087년까지 77년이 걸려 새겼다는 설이 있고, 1019년에서 1087년까지 69년 동안과 1011년에서 1051년까지 41년이 걸려 완성했다는 설이 있다. 대체로 〈고려사〉 기록에 ‘대장경 완성을 축하하다’는 기록을 따라 추정하는데, 사실 ‘대장경’이라는 칭호가 꼭 초조대장경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게 현재 학계의 대체적인 결론이다. 게다가 초조대장경은 정황을 보자면 사실 ‘완성’이라는 말이 적절하지가 않다.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경전을 수집해 새로 새기는 작업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1232년 몽골의 2차 침략으로 부인사에 옮겨져 있던 초조대장경은 모두 소실됐다. 다만 일본의 남선사에 꽤 많은 분량의 인경본이 남아 있어 현재까지도 한창 연구 중에 있다. 

물론 몽골 침입 당시에는 황룡사, 부인사 외에도 더 많은 사찰이나 유물이 한 점 불꽃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어차피 남아 있었다 해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같은 전란을 피해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랬을 것이다. 

전쟁이나 정치적 격변으로 사라진 유물을 짚어볼 때마다 나라의 운명이 곧 유물의 운명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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