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바이러스가 바꾼 종교사
독감 바이러스가 바꾼 종교사
  • 이상근 불광출판사 편집주간
  • 승인 2020.06.1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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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민족종교 몰락과 불교의 성장

1918~1919년 스페인 독감 창궐
韓도 상륙… ‘무오년 독감’ 명명
당시 742만명 감염, 13만명 사망
불확실한 상황서 종교에 의지해
2012년 화마에 휩싸이기 전 내장사 대웅전. 보천교의 보화문을 해체해 옮겨 지은 것이다. 원래 2층까지 건물이었지만 해체 이운을 하면서 1층으로 고쳐 세웠다.
2012년 화마에 휩싸이기 전 내장사 대웅전. 보천교의 보화문을 해체해 옮겨 지은 것이다. 원래 2층까지 건물이었지만 해체 이운을 하면서 1층으로 고쳐 세웠다.

보천교 등 신흥민족종교계 부흥
일제 의해 보천교 해체 후 쇠락
민족종교 후퇴… 불교 쏠림 현상
현 상황서 종교지형 변화 주목을


코로나19 때문에 강제 소환되는 역사가 몇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스페인 독감’이다. 1918년 봄에 시작돼 1919년 여름까지 1년 넘게 유행한 이 독감은 전 세계적으로 5억 명이 넘는 감염자와 500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기록했다. 당시 전 세계 인구가 16억 명이었던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치다. 치사율은 거의 10%에 육박했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과 관련한 흔한 착각이 하나 있다. 바로 스페인 독감이 스페인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오해다. ‘스페인 독감’이 발발한 곳은 스페인이 아니다. 이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곳은 미국의 군부대였다. 동부인 시카고를 시작으로 서부인 캔자스시티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 독감은 왜 ‘스페인’이라는 이름을 달게 됐을까?

당시는 1차 대전이 한창일 때다. 전시 중에는 적국에 이로운 상황이 알려지지 않도록 언론통제, 즉 전시 검열을 한다. 반면 스페인은 1차 대전 당시 연합국과 동맹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중립국이었다. 전쟁 보도뿐 아니라 급격하고 치명적인 이 독감 보도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독감을 다룬 스페인의 라디오와 신문을 접한 ‘연합국’ 사람들이 이 바이러스를 ‘스페인 독감’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냥 ‘스페인 독감’이 되어버렸다.

여하튼 1차 세계대전 참호 속에서 급격히 확산된 이 바이러스는 아이러니 하게도 전쟁 종결자가 된다. 독감 피해가 급격히 확산되자 연합국과 동맹국 양쪽은 서둘러 평화협상을 마무리 짓는다.

스페인 독감과 무오년 독감

스페인 독감은 결국 1918년 그해 우리나라에도 상륙한다.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전체 조선 인구 1678만 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742만 명이 감염됐다고 한다. 이중 사망자는 13만 명이다. 120~130명 당 한 명씩 이 독감으로 죽어나간 것이다. 학교는 일제히 문을 닫았고 회사도 휴업을 했다. 사람들은 스페인 독감을 가리켜 ‘무오년(戊午年) 독감’이라고 명명했다. 무오년인 1918년에 유행한 독감이라는 뜻이다.

당시 조선을 통치하고 있던 일본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군인 출신 하세가와 요시미치란 인물이 조선 2대 총독으로 부임했는데 정치와 관료 생활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자였다. 나중에 그는 한반도에서의 방역 실패와 이듬해 일어난 3.1 운동에 대한 책임으로 본국으로 소환돼 청문회에서 지탄을 받은 뒤 사임하게 된다.

이런 지경에서 사람들이 기댈 곳은 한 군데였다. 바로 종교다. 당시는 조선 붕괴에 따른 종교적 진공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연감에 따르면 종교 인구는 채 200만 명이 되지 않았다.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100만 명으로 홀로 앞서갔고 개신교는 30만 명, 불교는 고작 15만 명이었다. 이 종교적 공백 상태를 비집고 민족종교 계열의 신흥종교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난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출범 후 어느 정도 교세를 유지하고 있던 신흥종교만 30곳이 넘는다. 이 중에서도 독야청청 급성장하게 되는 신흥종교가 있으니 차경석에 의해 1921년 전북 정읍에 본부를 두고 만들어진 ‘보천교’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당시 민족종교 성장 배경에는 무오년 독감이 있었다. 개신교가 ‘의료’를 무기로 한반도 서북지역에서부터 강력한 신장을 기록하긴 했지만 민족종교의 포교 전략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당시 민족종교들은 동학 당시부터 한 손에는 전염병에 대한 예언과 공포를, 한  손에는 위생 관념과 예방 방법을 가르쳤다. 여기에 보천교는 ‘태을주’만 외우면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다녔다.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보천교로 몰려갔다.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당시 미국 국무부에 보냈던 밀러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때 보천교는 접주 55만 명, 신도 6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구 1600만 명에 신도 수 600만 명이면 우리나라 인구 셋 중 한 명은 보천교 신도였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다. 밀러가 보낸 보고서는 조선총독부 통계 자료에 근거했을 터인데 조선총독부의 통계자료라는 게 지금의 인구센서스처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으니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마 접주 한 명당 10명의 신도가 있다고 가상해 계산한 것이 아닌가 싶다.

1937년 상량식을 마친 태고사(조계사) 대웅전 공사는 1938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진은 1938년 모습.
1937년 상량식을 마친 태고사(조계사) 대웅전 공사는 1938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진은 1938년 모습.

보천교 십일전과 보화문

보천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민족종교를 신봉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천교가 실제 민족정신을 개척했다고 평가한다. 독립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자금줄이었다. 그 무렵 항일운동 관련 기사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보천교 147건, 기독교 23건, 불교 18건으로 보천교의 항일 운동 관련 기사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긍정적 평가 뒤에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무리수가 많았다. 재산 약탈은 물론 부녀자 강간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기사 역시 보천교가 압도적이다.
여하튼 항일운동 때문이든 ‘사회적 물의’ 때문이든 일제는 보천교 해산에 착수한다. 1936년 차경석이 사망하자 1937년 전격 해체가 진행됐다. 정읍경찰서 소속 수십 명의 경찰이 들이닥쳐 주요 간부를 연행한 것은 물론 성상과 제기, 벽화나 도금된 제단 등을 모두 철거한다.
철거가 끝나자 ‘재산처리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때 보천교 정전인 십일전을 비롯한 2만 평의 부지에 있던 45채의 건물과 10여 채의 부속 건물이 경매에 들어간다.

잘 아는 얘기지만 이때 정읍에 있던 보천교의 정전 십일전은 총본산 건설 운동이 한창이었던 불교계에 팔려 현재 조계사 대웅전이 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십일전에 들어간 건축 비용은 50여 만 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찰에 유찰을 거듭하다 불교계에 500원에 낙찰된다. 1937년 3월부터 십일전 건물을 답사하던 불교계는 십일전 매입을 결정하고 그해 10월 상량식을 갖는다. 사찰 건축에서 흔히 사용하지 않는 네 면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나 법당 바깥 면에 새긴 도교식 장식물 등은 그대로 보천교 십일전의 흔적이다.

불교계에서 매입한 다른 건물도 있다. 바로 보천교의 정문에 해당하는 보화문이다. 이 보화문은 1958년 내장사가 매입해 대웅전으로 사용했다. 원래 2층까지 건물이었지만 해체 이운을 하면서 1층으로 고쳐 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2년 10월 알 수 없는 화재로 전소되고 만다. 현재는 옛 건물에서 돌기둥만 취해 새로 지어졌다. 다행히 불타기 직전에 답사를 갔던 적이 있어 그때 찍은 사진을 지금도 가끔 꺼내보곤 한다.  

민족종교 해체와 불교

일제에 의해 강요된 보천교 해체였지만 그 영향은 불교계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는 이전까지 지지부진하던 불교계 총본산 건설 운동이 마무리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불교계는 중앙총무원과 중앙교무원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1925년 타협으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고 1929년 승려대회를 통해 제반 사항을 정비했다. 하지만 총독부가 통일 기관을 계속 승인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명목만 남아 있던 터였다. 그러다 1937년 보천교 건물을 매입하고 태고사(현 조계사)가 완성되면서 중심이 잡힌 것이다. 물론 일제의 협조도 있었다.
또 하나는 자의든 타의든 민족종교 계통의 종단들이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면서 불교로의 쏠림 현상이 시작됐다는 거다. 조선총독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1920년대 불교 인구는 14만9천714명이었는데 1942년이 되면 36만2천487명으로 급속히 불어난다. 이후에는 더 가파른 성장을 하게 된다. 당시 민족종교를 이끌던 사람들 혹은 그 밑에서 공부했던 많은 인물이 불교로 ‘개종’을 하게 된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탄허 스님을 들 수 있다.

탄허 스님의 아버지는 보천교의 재무를 총괄하고 있던, 사실상 보천교의 2인자 김홍규였다. 물론 탄허 스님의 출가 연도는 보천교 해체 이전인 1934년이고 그 이전부터 여러 스님과 편지로 문답을 주고받는 등 탄허 스님과 보천교와는 애초에 관련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보천교의 지도자, 아들은 불교계의 거목이라는 ‘상징’은 당시 민족종교와 불교의 관계와 겹쳐 보이는 게 사실이다. 물론 당시 불교의 급성장을 이 한 측면만으로 모두 분석할 수는 없다.

여하튼 ‘독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멀리 왔다. 미국의 참호 속에서 시작된 바이러스 하나가 우리 역사 그리고 종교 지형까지 흔들어 놓았다.
아마 이번에 창궐한 코로나19 역시 세계 역사, 우리 역사 그리고 종교 지형까지 어떻게든 흔들 것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은 없지만 지금처럼 흘러가서는 종교에 미래는 없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꺼내놓는 얘기다. 새겨듣자. <불광출판사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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