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보유전] 19. 왕의 스승이 된 스님
[성보유전] 19. 왕의 스승이 된 스님
  • 이상근/ 불광출판사 편집주간
  • 승인 2020.10.1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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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왕들, 스님께 가르침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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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지정 예고된 ‘희랑대사좌상’
고려 태조 스승상으로 유명하나
공식기록 스승, 법경·진경 대사
최초의 國師는 신라의 경흥 스님
국사 관련 사지·유적 도처 존재
고려 태조 왕건의 왕사였던 진공대사의 탑(사진 위)과 석관(사진 아래)이다. 부도라고 하지 않고 탑이라고 하는 이유는 탑 앞에 사리를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관이 따로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왕사였던 진공대사의 탑(사진 위)과 석관(사진 아래)이다. 부도라고 하지 않고 탑이라고 하는 이유는 탑 앞에 사리를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관이 따로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일 문화재청은 합천 해인사에 있는 희랑 대사 좌상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보물 제999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나말여초 고승의 실제 모습을 조각한 상이 300여 개밖에 없는 ‘국보’로 승격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면에 글이 나갈 때쯤이면 한 달의 지정 예고가 끝나고 국보로 승격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도 희랑 대사 좌상의 국보 승격에 대해 비교적 크고 상세히 보도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초상 조각이인 데가 깎고 칠한 솜씨가 사실적이기도 하고 또 유려하기도 해 그 가치에 충분히 수긍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언론이 리드글로 뽑은 건 따로 있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아니었다. ‘왕건의 스승’, ‘北 제자 왕건상 기다리던 희랑 대사’, ‘태조 왕건 도운 희랑 대사’ 등 한때 있었던 왕건과 희랑대사의 인연에 집중했다. 

희랑대사가 왕건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고려 전기 스님인 균여의 삶을 다룬 <균여전>(1075년), 조선의 관료 유탁기(兪拓基)의 쌍계사와 해인사 기행문인 <유가야기>(1712), <가야산 해인사 고적>(1874) 등에 등장한다.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다.신라 말에 가야산 해인사에는 관혜공과 희랑공 두 분의 고승이 계셨다. 두 분 모두 화엄의 대가였으며 서원이 같았다. 하지만 관혜공은 백제 견훤의 복전(福田)이 되었고, 희랑공은 태조 왕건의 복전이 된다. 정치적 격변기에 선택한 인물이 각각 달랐다. 

사람들은 관혜공의 법문을 일컬어 남악이라고 했고, 희랑공의 법문을 일컬어 북악이라 했다. 둘 사이가 벌어진 만큼 나중에는 문도 사이도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

여기에 전설도 끼어드는데 어려움에 봉착한 왕건이 해인사에 들어와 희랑공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백제를 물리칠 방법을 청하자 희랑공이 용적대군야차왕(勇敵大軍夜叉王)을 보내 도왔다는 것이다. 또 기록에는 희랑 대사가 입적하자 고려 광종이 시호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려사>나 <절요>에서 희랑대사 이야기를 찾을 수는 없다. 앞에 말한 세 책 역시 모두 개인의 문집이나 후대 사찰의 기록이다. 물론 그렇다고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거나 기록에 나온 내용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는 것뿐이다. 

왕건의 공식 스승 법경·진경 대사
그렇다면 공식적인 ‘왕건’의 스승은 누구였을까? 고려 시대에는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가 있었다. 왕사는 그야말로 국왕의 스승 또는 사표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고, 국사는 거개가 국가의 원로 역할을 했다. 왕사는 고려 태조 때부터 그 제도가 있었고 국사는 광종 때부터 보인다. 

고려 태조 왕건의 공식적인 스승은 법경 대사 경유(慶猷, 871∼921) 그리고 진공 대사 충담이었다. 경유 스님은 신라 진성여왕 1년(888) 조공사(朝貢使)를 따라 당나라에 건너갔고 효공왕 11년(908)에 귀국했으며 고려가 개국하자 첫 번째 왕사가 되었다. 경유 스님은 태조 4년(921)에 입적했으니 왕사로 있었던 기간은 무척 짧았을 것이다. 경유 스님에 대한 기록 역시 <고려사>나 <절요>에는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재 개성에 남아 있는 그의 비문은 입적 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비문에 적힌 ‘왕사의 예우를 받다 입적했다’는 기록은 ‘공식적’으로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공식적인 두 번째 스승은 진공 대사 충담이다. <고려사>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첫 번째 왕사다. <고려사> 태조 23년 7월 기사에는 “가을 7월 왕사(王師) 충담(忠湛)이 죽자, 원주(原州) 영봉산(靈鳳山) 흥법사(興法寺)에 탑을 세우고 왕이 직접 비문(碑文)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공 대사 충담 역시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유학승이다. 특이한 것은 충담 스님이 신라 신덕왕의 왕사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신라와 고려 두 개의 왕조에 걸쳐 왕사가 되었던 인물이다. 

원주 흥법사에 있던 진공 대사의 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관에 모셔져 있다. 진공대사의 탑이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탑 앞에 놓인 석관 때문이다. 대부분 승탑이 탑 안에 사리공을 만들고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지만 진공대사의 탑은 석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그곳에 사리를 모신 것이다. 

최초의 國師 경흥 법사
한걸음 더 나가 보자. 왕사나 국사 제도가 처음 생긴 건 신라시대였다. 기록에 따르면 신문왕 때 경흥 스님이 처음으로 국로(國老)로 임명되었다. 

신문왕의 뜻은 아니었던 듯하다. 문무왕이 죽을 때 신문왕에게 “경흥 법사는 가히 국사로 삼을 만하니 나의 명을 잊지 말고”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이력이 낯설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 때 대덕 경흥 법사는, 성이 수씨이며, 웅천주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수(水)라는 성은 백제 성씨였고 웅천주는 지금의 공주, 그러니깐 삼국통일 전 백제의 수도였던 곳이다. 또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는 당나라가 도독부를 설치해 한반도 지배를 꿈꾸던 곳이기도 하다. 통일 군주 문무왕의 문화통일에 대한 꿈이 얼핏 읽힌다.

물론 경흥 법사는 이런 ‘배려’가 없었어도 국사가 될 만한 충분한 재목이었다. 경·율·론 삼장에 능통했다고 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모두 47종의 저서를 남겨 그 무렵 원효 스님에 이어 가장 활발한 불교 연구와 저술에 힘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그는 ‘국사’에 임명되자 신문왕의 지시로 신라 수도인 경주의 삼랑사에 머물게 된다. 삼랑사는 경주 시내를 흐르는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김유신 장군묘와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왕궁과는 걸어서 40~50분 거리다. 

그래서 그런지 한때 경흥 법사는 삼랑사에서 왕궁까지 말을 타고 다녔던 것 같다. <삼국유사>에는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고 신과 갓도 제대로 갖추었으므로 길 가던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습이 몹시 엉성한 차림의 승려가 마른 물고기가 있는 광주리를 들고 하마대(下馬臺) 앞에 앉아 있었다. 경흥 법사를 시종하는 이가 그를 보고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어찌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지고 있느냐”고 책망하자 엉성한 차림의 승려는 “산 고기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삼시(三市)의 마른 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라고 일갈한다. 

말을 타고 궁궐로 향하는 ‘승려’의 모습을 힐난한 것이다. 경흥 법사가 문을 나오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쫓게 했는데 그는 남산 문수사 문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어버렸다. 그가 짚었던 지팡이는 문수사 문수보살상 앞에 놓였고 마른 고기는 소나무 껍질이 되었다고 한다. 
경흥 법사는 이 말을 전해 듣고 탄식하며 “문수보살이 와서 내가 말 타고 다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구나”고 탄식하며 그 뒤로는 일체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밖에 <삼국유사>에는 어떤 비구니 스님이 경흥 법사의 병을 치료해주고 삼랑사 남쪽에 있던 남항사로 숨어들었는데 그가 짚고 있던 지팡이가 “새로 꾸민 불화(佛畵) 십일면원통상 앞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경흥 법사가 머물렀다는 삼랑사 터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고 주변이 비교적 보존이 잘 된 편이다. 이번 여름에 들렀을 때도 시에서 나왔는지 문화재청에서 나왔는지 아저씨, 아주머니들 여럿이 열심히 제초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전설의 장소인 남항사터의 성보는 그렇지 않다. 석불입상이 하나 남아 있는데 그 처지가 애처롭다. 높이 1.2m의 석불입상은 보호각 안에 갇혀 있는데, 하필이면 이곳에 버스 차고지가 들어서 있다. 차고지 한쪽 구석에 천덕꾸러기처럼 모셔져 있는 석불입상은 수십 대의 버스 뒤꽁무니에서 나오는 매연에 얼룩덜룩하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이정도면 차라리 박물관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을 정도다.

신라의 일정한 시기 그리고 조선 초 국사와 왕사 제도가 폐지되던 시기의 잠깐을 제외하고 왕사나 국사는 ‘정치’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당연히 원래 주석하던 절에 그대로 머물렀으며 왕궁에 출입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답을 하사하는 등 예우는 있었지만 그래도 ‘정신적 스승’의 역할만 했을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서로 정치와 종교가 음이나 양으로 결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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