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과 탑도 ‘유행’탑니다

특정 지역 독특한 불상·탑들
통일신라 요충지 명주 ‘공양상’?
월정사 공양상과 지역색 보여

안동 지역에는 전탑들 산재해?
통일신라 후기 조성으로 추정

지역풍을 보여주는 불교 성보. 강릉 신복사지 3층 석탑과 공양상으로, 평창 월정사 공양상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풍과 유행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라는 유물을 볼 수 있다. 경주에 남산신성을 세울 때 세운 비다. 남산신성은 〈삼국유사〉에도 그 기록이 보이는데 “별본(別本)에 말하기를 건복(建福) 8년 신해년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0보(步)였다”고 쓰여 있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건복(建福) 8년 신해년’은 진평왕 13년, 서기로는 591년이다. 이 비는 한 기가 아니다. 비마다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6보에서 20보 사이에 하나씩 세워졌다.

1보를 현재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1.4m 내외이니 10m에서 20m 사이의 거리에 하나씩 세운 셈이다. 1934년 처음 발견된 이래 1994년까지 9기 그리고 2000년 들어 다시 한 기가 더 발견되어 지금까지 모두 10기가 남아 있다. 돌에는 빼곡히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다르지만 형식은 모두 동일하다. 맹세의 글, 참여한 인물, 각 집단이 쌓은 거리 등이 기록돼 있다.

그런데 비문 내용이 흥미롭다. 각 구간마다 공사 책임자와 공사에 종사한 사람들의 출신 지역을 명시해 놨다는 것과 ‘만일 3년 내에 성이 무너지면 벌을 받는다’는 서약이 있다. 요즘 짓는 아파트의 하자보수 기간이 2~5년 사이인 것처럼 성에도 하자보수와 책임을 물었던 것 같아 재미있다. 비가 6보에서 20보로 불규칙하게 섰던 것도 아마 공사의 난이도와 참여 그룹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더 주목할 만한 내용은 바로 출신 지역이다. 함안, 의령, 의성, 상주, 옥천, 선상, 영풍 등 당시 신라가 관할하고 있던 주요 지역의 장인들이 모두 모였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총괄은 중앙에서 했지만 각 구간의 책임자는 지방관의 명령을 받아 노동력을 동원하고 공사를 책임졌던 ‘지방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고구려나 백제도 중앙에서 토목 사업을 전개할 때는 이런 형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는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서는 이런 토목공사 진행을 아예 군사조직처럼 운용했다. 법당(法幢)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중앙정부의 명에 의해 전국 촌락을 대상으로 인력이 동원되는 노동부대였다.  

역으로 생각하면 각 지역 또는 지역 세력도 독자적인 기술자 그룹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후에 이 ‘독자적인 기술자 그룹’은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9세기가 넘어가면서 지방 호족세력이 신라 왕권을 무시하고 주민에 대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거두기도 하고 급기야 새 왕국을 세우는 단계로까지 나간다. 이런 지방 기술자들은 호족과 그 명운을 같이 하는데, 고려시대 전반기까지 그 세력을 떨친다.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불교문화재의 특성이 하나 있으니 바로 특정한 지방에서만 유력하게 나타나는 불상이나 탑 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지역마다 여럿이 있으나 대표적으로 북쪽 명주의 공양상과 남쪽 안동의 전탑이다.  
 
강릉서 유행한 약왕보살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앞에는 특이한 불상이 하나씩 있다. 왼쪽 다리는 세우고 오른쪽 다리는 끓은 우슬착지(右膝着地)를 하고 양손을 모아 향을 들고 있는 공양상이다. 원통형의 높은 관도 썼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12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신복사지석탑은 정확한 건립 시기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월정사 팔각구층석탑보다는 조금 앞선 시기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강릉은 서기 전후부터 동예, 하슬라 등의 명칭으로 독자적인 성읍국가 또는 읍락국가가 형성되어 있던 지역이다. 비록 태백산맥 줄기로 서쪽 편과 단절된 지역이지만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 양측 모두 요충지로 생각했던 곳이다. 통일신라 시대가 되면 전국을 9개 권역으로 나눠 9주로 개편했는데 현재의 강릉은 명주에 포함되었다. 명주는 당시는 위로는 통일신라 영토 최북단에서부터 아래로는 경주 가까운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이 명주로 와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대장노릇을 하던 곳이다. 후삼국 시대에는 궁예의 든든한 뒷배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곳이니 자연스레 그들만이 공유하는 문화와 종교적 지향이 있었을 터이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공양상이다. 공양상이라는 명칭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 혹은 ‘약왕보살’이라는 명칭이 있다. 〈법화경〉에 따르면 약왕보살은 〈법화경〉을 듣고 고행하여 정진해 깨달음을 얻었다. 약왕보살은 깨닫게 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1200년 동안 최고의 향을 자신의 온몸에 바르고 먹이는 정성을 들인 후 마지막에는 소신공양을 올렸다. 소신공양 후에 다시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 이가 바로 일체중생희견보살이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탑을 세우고 장엄하는 소임을 맡아 이를 수행하면서 탑 앞에서 또 다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7만 2000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다. 탑 앞에서 공양하는 모습은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물론 이 보살상은 ‘명주’ 지역에만 있지 않다. 논산에도 고려 시대 만들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공양상이 하나 있다. 하지만, 현재 강릉지역에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살상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로 논산의 공양상도 어디에서 옮겨왔는지 모른다. 명주지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한 가지 더욱 흥미로운 점은 고려 시대 문인 정추의 시에는 월정사 석탑 앞의 공양상을 ‘문수보살’이라고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오대산 일대의 문수신앙과 잇닿아 있다. 정추의 ‘오해’였을 수도 있고 또 세운 사람들이 그리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수보살인 줄 알고 계속 세웠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역풍을 보여주는 불교 성보들. 사진은 안동 신세동 7층 전탑이며, 안동 지역에는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전탑들이 산재해 있다.

안동서 유행한 전탑
또 하나 ‘지역 특성’이 다분히 반영된 유물들이 있다. 바로 안동 지역의 전탑이다. 현재 안동 지역에 산재한 전탑은 대부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예가 극히 드물다. 이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오간다.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소개한다. 

첫 번째가 화엄종의 유행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다. 의상 스님을 필두로 중국 유학파들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이 땅에도 화엄종이 만개한다. 그런데 이들이 중국 유학을 하던 당시 중국에서는 전탑이 유행이었고 이에 따라 전탑 양식이 흘러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화엄종’을 표방했던 다른 지역의 사찰들은 왜 전탑 양식을 따르지 않았는지가 해명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가 안동지역 지질의 특성상 화강암에는 균열이 많아 낙동강을 낀 퇴적암 지대에 있는 양질의 점토와 강모래를 이용해 벽돌을 만들었다는 설이다. 주로 ‘건축’을 전공한 학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역으로 안동지역의 점토와 강모래가 다른 지역보다 ‘우수’하다는 증거는 없으며 벽돌을 구웠던 가마터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풍수비보설의 영향을 세웠다는 설이다. 답사를 해 보면 전탑이 선 지역 대부분은 강을 끼고 있다. 사실이다. 그런데 비보를 꼭 ‘벽돌’로 해야만 했던 이유는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여하튼 앞의 어떤 주장들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없다. ‘출발’이 어떠하였든 ‘유행’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지역풍’밖에 없다.

돌(화강암)을 깎고 다듬는 것도 엄청난 공력이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네모반듯하게 돌을 만들어 높이 쌓는다는 것도 결코 쉬운 기술이 아니다. ‘특별한 기술자’들이 필요했을 터이고 이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반복해 제작해냈을 것이다. 여기에 이의를 달기는 어려워 보인다.

명주의 공양상이나 안동의 전탑 외에도 ‘지역풍’이 가미된 불상이나 탑은 더 있다. ‘지역’을 논하기에는 사실 탑이나 조각보다도 불화가 더 어울리기도 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지역별로 활약하던 ‘화승’이 있어 이것만 별도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다. 

물론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 지금 그런 모습을 찾아보는 건 불가능하다. 최근 만들었지만 아주 특이한 불상이 있어 눈여겨 봐둔 적이 있었는데 돌아다니다 보니 다른 곳에서 또 찾았던 적이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불상을 만드는 석재소에 갔다가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있다.

‘대량 생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정도면 다행이다. 요즘은 ‘지역풍’ 대신 불상이나 탑도 ‘중국풍’이 한창 드세다. 무턱대고 탓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뒷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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