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이 된 ‘곰’과 산신된 ‘호랑이’

단군신화 주인공 곰·호랑이
해당 동물 숭배한 토템 ‘흔적’
불교에 습합되며 벽화에 남아

‘산신’ 호랑이 벽사 의미로 활용
곰 소재 도상, 상대적으로 적어
참선흉내 곰 그린 성주사 ‘눈길’

창원 성주사 설법전에 그려진 곰 벽화. ‘곰절’로 불리는 성주사에만 전해지는 독특한 전설이 담긴 그림이다. 참선을 흉내 냈던 곰은 이를 공덕으로 인간으로 환생했고, 사찰 부목으로 살다가 주지 스님의 도움으로 고승이 됐다. 사진제공=창원 성주사

어른이나 아이를 막론하고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거개는 곰과 호랑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우문이다. 단군신화이니 주인공은 당연히 단군이다. 물론 가끔 ‘인간 세상을 탐하여 환인에게 천부인 세 개를 받고 무리 3천과 함께 태백산에 표표히 나타난’ 환웅이 진짜 주인공이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다. 이야기의 얼개는 환웅이 만들었으니 역시 틀린 대답이 아니다. 하

지만 단군신화의 주인공을 곰과 호랑이라고 생각할 만큼 둘의 출연은 강렬하다.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신스틸러(Scene Stealer, 주연보다도 많은 주목을 받는 명품 조연)’급은 된다. 

그런데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역사 시간에, 그리고 가끔은 국어 시간에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의 등장은 ‘토템’이라고 외웠다. 곰과 호랑이를 숭배하던 집단, 그리고 새로운 세력인 단군의 결합. 이게 한반도에 최초로 세워진 고조선이라는 국가 출현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건국신화에는 이런 토템의 흔적이 뚜렷하다. 

산과 바다가 있는 한반도는 뚜렷하기도 하고 흔하기도 하다. 물고기, 거북이, 닭, 고래, 돼지, 그리고 신화 속의 동물인 용까지 동물과 식물을 숭배했던 집단에 대한 이야기는 한반도 전역에 걸쳐서 발견된다. 또 이런 흔적은 ‘습합’이 주특기인 우리나라 불교 사찰 곳곳에서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단군 신화에서 동굴에 들어갔던 호랑이는 사찰이나 무속을 신앙하는 곳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지만 곰은 아주 미미하게만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왜일까?

눈 씻고 찾아본 곰 이야기
한반도에 살았던 곰은 주로 불곰과 반달곰이다. 불곰은 현재도 유라시아 북쪽 지역에 주로 살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도 주로 북쪽 지역에서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한반도 전역에 걸쳐 살았던 곰은 주로 반달곰이다.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 다큐에서 흔히 보는 북극의 하얀색 곰 같은 건 없었다. 

북극에 사는 곰은 몸무게만 1000㎏이 나가는 지상 최대의 육식 동물이다. 반면 반달곰의 크기는 전체 길이가 180㎝ 그리고 몸무게 100㎏ 내외다. 몸집이 좀 큰 씨름선수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게다가 반달곰은 다래나무, 산딸기 같은 식물을 주로 먹고 산다. 잡식이라고 하지만 육식은 개미 등 소소한 먹잇감을 즐긴다. 한 대라도 맞으면 치명상을 입기 때문에 피해야 할 동물이긴 하지만 두려운 동물까지는 아니다. 호랑이와는 ‘급’이 다르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런지 한반도에서 자생한 반달곰에 대한 신화나 전설 그리고 그림이나 조각이 거의 없다. 가끔 발견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반달곰보다는 불곰에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공주의 옛 이름은 웅천(熊川)이었다 백제가 도읍을 정하면서 웅진(熊津)이라는 지명으로 바뀐다. 풀어쓰면 곰나루다. 어떤 사내가 굴속에서 처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알고 보니 곰이어서 몰래 금강을 헤엄쳐 건넜는데 이에 절망한 처녀가 금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리 불렀다고 한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온 나라다. 그 기원이 ‘북쪽’에 있었으니 이런 곰 설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찰이나 불교문화재에서 곰과 관련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다. 그래도 꼽으라는 토함산 마동사지 삼층석탑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곰절’로 불리는 창원 성주사 이야기가 제일 유명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건립한 김대성이 청년 시절 토함산에 곰 사냥을 나갔다. 그날 밤 사냥에서 죽임을 당한 곰이 김대성의 꿈에 나타나 자신을 죽인 까닭을 묻고 서러워하자 명복을 빌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꿈을 꾸었던 자리에 몽성사, 곰을 잡았던 곳에 장수사를 지었다. 마동사지 삼층석탑 자리가 바로 장수사 터라고 한다. 

또 다른 곰 이야기로 유명한 곳은 창원의 성주사다. 성주사는 지금도 ‘곰절’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 원래 성주사는 가락국 수로왕의 처남, 그러니깐 허황옥의 동생(또는 오빠)인 허보옥을 위해 창건했다는 설이 하나가 있고, 신라 시대 무염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하나가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성주사는 전소되고 만다. 그래서 중창을 위한 불사를 시작했는데 원래 있던 절터에 건물을 지으려고 하니 곰이 나타나 하룻밤 사이에 400m 떨어진 지금의 성주사 자리에 목재를 모두 옮겨놓았다고 한다. 결국 지금의 사찰 건물들은 원래 있던 성주사 터에서 400m 떨어진 자리에 세워진다. 그때가 1604년이다. 이후 절 이름이 웅신사(熊神寺)가 되었고 사람들은 ‘곰절’로 불렀다. 

성주사와 곰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불모산에 살던 곰이 스님들이 하는 참선 수행을 흉내 내다 그것이 공덕이 되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곰은 그 절의 부목이 되었는데 전생의 습 때문인지 배가 고플 때는 자신도 모르게 참선에 열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지 스님이 머리를 내려친 적이 있는데 그 순간 깨달음을 얻어 고승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찰에서는 이 기록을 대웅전과 설법전 벽화 등으로 남겨 놓고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두려운 존재도 영험한 존재도 아니었던 ‘미련한 곰’ 또는 ‘착한 곰’은 절에서 흔히 발견되는 동물이 아니다. 

통도사 해장보각의 까치호랑이 벽화. 벽사의 의미가 있는 ‘송하맹호도’를 기반으로 한 도상이다. 액운을 물리치는 호랑이와 복을 가져다주는 까치가 함께 그려 액운과 구복의 의미를 담아냈다.

무서운 호랑이, 비굴한 호랑이
반면에 사찰에 자리 잡은 호랑이는 그 수도 많고 그 표정도 다양하다. 산신령과 함께 산신각에 자리 잡은 호랑이는 근엄하다. 토템이라는 것이 대개는 두려운 존재를 아예 수호신으로 만들어버린 경우가 많은데 산신각의 호랑이도 역시 그렇게 볼 수 있다. 거기에 우리 민족은 ‘산신’인 호랑이에게 다른 임무도 부여했다. 바로 악귀를 쫓는 역할이다.

호랑이 그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송하맹호도’다. 소나무를 배경으로 호랑이를 그린 것인데 여기서 나무를 뜻하는 수(樹)는 지킨다는 의미의 수(守)와 발음이 같아 액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킨다는 맹호도에 그 의미를 더 얹은 것이다. 

그래서 산신각에 그려진 산신도에도 역시 배경은 거개가 소나무로 되어 있다. 소나무에 까치가 앉아 있는 그림도 있는데 이를 보통 작호도(鵲虎圖)라고 부른다. 까치는 좋은 소식을 알리는 길조다. 액운을 물리치는 호랑이에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까치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다. 사찰에서도 가끔 까치 호랑이를 발견할 수 있다. 통도사 해장보각 벽화에는 까치와 소나무 그리고 호랑이가 함께 있는 그림이 있다. 

역발상으로 호랑이 그림을 그린 사찰도 많다. 무서운 호랑이를 우스꽝스럽게 그려 두려움을 없애고자 한 경우다. 

비교적 흔한 그림 중 하나가 바로 ‘담배 먹는 호랑이다’다. 수원 팔달사 용화전 벽면, 화계사 명부전 벽면 등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개 긴 담뱃대를 호랑이가 물고 있고 토끼 한 마리가 그 담뱃대를 받쳐주고 또 한 마리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장면이다. 이런 벽화들은 170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민화의 유행을 사찰에서 수용하면서부터 발견되기 시작한다. 이때 함께 들어온 동물과 식물 중에는 과거 합격을 기원하며 그린 게, 다산을 상징하는 포도, 화마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던 수달, 풍요를 상징하는 모란 등이 있다. 

담배 먹는 호랑이보다 더 파격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호랑이도 많다. 해남 대흥사 침계루에는 ‘벌 받는 호랑이’ 그림이 있었다. 우리나라 호랑이 그림 중에 가장 ‘비굴한’ 호랑이가 아닐까 싶다. 다만 지금 그 자리에는 옛 그림은 없고 모사한 그림만 남아 있다. 아쉽게도 모사한 그림은 전혀 익살스럽지 않다. 그냥 웃기기만 하다.

호랑이에 상상의 ‘날개’를 그려준 것도 있다. 용연사 극락전 외벽의 많은 그림 중에는 호랑이에 박쥐날개를 날아 ‘비호’라 불리는 그림도 있다. 

사찰 벽화나 불단에는 가끔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나 조각이 많다. 다람쥐나 수달을 보기도 했고 천마나 비호를 보는 일도 있다. 가르쳐줘서 본 경우도 있지만 우연히 본 경우도 많다.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더 많은 동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 하나씩 ‘염원’이나 ‘전설’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사찰에는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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