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수문장 된 인도의 神

인도 神서 부처님 수호 神將 변화
명부전 삼원장군, 금강역사로 대체
금강 역사 기원 헤라클레스 주장도
경주 괘릉 이국적 무인상 ‘금강역사’?

흥국사 무사전 금강역사

꽤 오래전 얘기다. 문화재 관람료 징수 문제로 몇몇 사찰이 산문(山門) 폐쇄를 단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산문 폐쇄’라고 적어야 할 곳에 ‘삼문 폐쇄’라고 적고 말았다. 단순한 오타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산문과 삼문의 발음을 구별할 수 없어 한 실수 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 켠으로 생각해 보면 삼문 폐쇄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사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통 문을 세 개 통과해야 한다. 거쳐 가는 순서대로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이다. 이 문을 모두 막아버렸으면 삼문(三門) 폐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삼문 구조가 사찰마다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일주문·금강문·천왕문 순서로 배치한 사찰도 더러 있다. 불이문 대신 좌우에 금강역사를 세운 문을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넣은 것이다. 또 어떤 사찰은 아예 일주문·금강문·천왕문·불이문 순서로 문을 네 개 만든 곳도 있다. 사문(四門)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삼문 형식을 파괴하기도 그렇고 금강역사를 뺄 수도 없으니 어떤 곳은 천왕문 벽 좌우에 금강역사를 그림으로 새겨놓은 곳도 많다. 

금강역사는 원래 인도 고유의 신이었다. 그때도 수문장 역할을 했고 불교의 신을 자리매김하고 나서도 ‘수문장’ 역할을 하는 신장(神將)이 되었다. 다만 역사(力士)와 천왕(天王)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천왕보다는 위계가 낮다. 그래서 더 멀리서 부처님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수문장의 역할을 하다 보니 금강역사의 쓰임은 많다. 석탑과 부도에도 새겨지고 신중탱화 등에도 자주 보인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는 금강역사가 있다.

명부전으로 간 금강역사
몇 개월 전 연재에서도 밝힌 적이 있지만 사찰에서 가장 복잡한 전각 중에 하나가 명부전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로 지장전과 시왕전이 통합돼 만들어진 전각이니 지장보살과 협시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비롯해 좌우로 나란히 선 열 분의 시왕, 시왕을 대신해 심판을 하는 판관 두 명, 기록과 문서를 담당하는 녹사 두 명, 그리고 입구에 문을 지키는 장군까지 도합 29체의 존상이 있다.

이 중에 명부전 문을 지키는 장군은 도교에서 유래한 지옥의 권속이다. 원래 지옥의 장군은 세 명이었다. 흔히 삼원장군(三元將軍)으로 부른다. 상원주장군·중원갈장군·하원당장군이다. 그런데 세 명이 지키자니 한 명이 길을 가로막을 것 같고 길을 갈라 셋을 배치하자니 좌우수가 맞지 않는다. 하여 보통 중원갈장군을 빼고 좌우에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을 배치한다. 대개는 창이나 칼로 무장하고 있다. 나중에 이들은 명부전만 아니라 마을을 지키는 역할도 맡게 된다. 마을 장승 중 명문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대개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표시가 뚜렷하다.  

그런데 앞에서도 살펴봤지만 불교에서도 ‘수문장’ 역할을 하는 신장(神將)은 많다. 금강역사도 있고 사천왕도 있고 12신장, 그리고 익숙하지는 않지만 16선신(十六善神)도 있다. 문을 좌우에서 지켜야 한다면 둘인 금강역사가 맞춤이다. 하여 명부전의 장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금강역사로 대체되어 간다. 아직도 사찰을 방문하면 칼을 들고 험상 굳은 얼굴로 명부전을 지키는 도교의 신장과 (대개는) 험한 얼굴에 맨 주먹을 쥐고 있는 금강역사를 번갈아 볼 수 있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헤라클레스가 금강역사의 모델?
금강역사가 언제부터 신장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와 관련해 십여 년 전에 고대 인도신화와 의례연구로 박사를 받은 심재관 상지대 교수가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금강역사의 기원이 ‘헤라클레스’라는 것이다. 학술회의에서 논문으로 발표가 됐는데 “금강역사가 헤라클레스로 서력기원 전후에 간다라 불교미술에 정착됐으며, 이후 대승불교 경전 찬술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이 요지다. ‘손에 곤봉을 쥔 모습으로 인해 헤라클레스라는 인도식 표현법인 바즈라빠니, 즉 곤봉이나 몽둥이를 쥔 자라고 불렸고 이것이 고유명사로 정착했다’는 내용도 있다.

물론 금강역사가 ‘인도 신’ 출신(?)이라는 게 정설이다. 비슷한 역할을 했던 야차(Yakkha, 약카) 같은 신중이 니까야(DN23)에도 간혹 보이고, 증일아함경 ‘육중품’은 니건자(尼乾子, 백의파 자이나교도)가 부처님을 논파하겠다고 찾아왔다가 토론하다가 궁지에 몰리자 부처님의 질문에 못들은 척 하며 대답을 피하고 이때 ‘밀적금강역사’가 나타나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을러대자 니건자가 공포에 떠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여기에는 두 개의 함정이 있다. 간다라 미술은 기원 전후로 그 출발이 확실한데 경전의 결집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많다. 특히 증일아함경은 아함경 중 가장 후대에 결집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기원해 자리 잡았던 금강역사가 경전 속으로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반면 반대편의 증거도 있다. 남방불교에서도 수문장 역할을 하는 신중이 있다. 몇 년 전 태국 왓 프라깨우 사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건물마다 거대한 신장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기원을 살펴보니 힌두교의 야차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또 그 외형이 얼굴만 빼고는 금강역사와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헤라클레스는 간다라에서 가까운 미얀마나 태국, 라오스 등으로는 가지 않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에만 전해진 것일까? 약간 의문이 들었다. 

경주 괘릉의 이국적 무인상의 모습. 괘릉의 무인상은 금강역사라는 주장도 있다.

괘릉 무인상도 금강역사인가 
마지막으로 금강역사와 관련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흔히 괘릉이라고 불리는 원성왕(재위 785~798)의 능에는 아주 이국적인 무인상이 두 기가 마주보고 서 있다. 높이도 2.5미터를 훌쩍 넘어서고 왕방울만한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으며 코며 입술이며 모두 크고 두껍다. 이걸 교과서에서 배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이 무인상을 두고 역사학자들은 대개 “서역문화의 영향을 통해 당시 통일신라의 교역이 중앙아시아 및 페르시아 지역까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해석해 왔다. 

그런데 몇 년 전 임영애 경주대 교수가 아주 흥미로운 주장 하나를 내놨다. 이 무인상이 금강역사라는 것이다. 

임 교수가 근거로 제시한 것 중에는 최치원이 쓴 숭복사 비명(碑銘)이 있다. 이 비명에는 경문왕이 곡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숭복사로 이름을 바꾼 경위가 들어가 있는데 “선대(원성왕)를 계승해 절을 중수하고 위엄으로 능역을 ‘호위’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라는 문장이 있고 임교수는 ‘호위’의 구체적인 의미를 석인상 설치로 봤다. 

또 하나의 근거로는 무인상에서 머리에 두른 띠나 허리에 찬 둥근 주머니와 같은 복식은 서역뿐만 아니라 당대 중국 복식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라 왕릉 십이지상이 입고 있는 갑옷이 사천왕상과 흡사하고 사자상도 불교 사자상을 닮는 등 불교 조각의 광범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직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이런 주장을 더 밀고 나갈 추가적인 주장이나 논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금강역사가 헤라클레스라는 주장, 우리가 서역인을 모델로 한 것으로 만 알았던 괘릉의 무인상이 금강역사라는 주장 등이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나 지식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이런저런 측면에서 문화재를 볼 수 있게 해준 여러 학자들의 혜안에 감사할 뿐이다. 가끔씩 이렇게 비틀어서 보거나 의심을 갖고 보는 게 답사를 더욱 풍부하게 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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