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미얀마 승단 과거와 현재 1

예부터 교육·법관 역할 담당
국가와 백성간 중재자 역할도
왕보다 높은 지위로 존경받아
국정 운영의 지혜 조언하기도
스님 곁에 여성은 금기로 제한

미얀마 담마스쿨은 사찰교육기관이다. 바간 시대 등 과거에서부터 승단은 미얀마 사람들의 교육을 책임졌으며, 이를 통해 모든 미얀마 백성들이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본권을 보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스님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여자 옆에 스님이 앉으면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전혀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혹은 ‘스님이 만석인 버스에 승차했다면 누군가가 비켜줘야 할까?’라고 묻는다면 ‘불자라면 비켜줄 수 있지만 반드시 비켜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미얀마에서 같은 질문에 우리나라식으로 대답을 한다면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미얀마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게 될 것이다.

우선 미얀마에서는 스님 옆에 여성이 함께 앉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 있다. 맨 처음 미얀마 불교문화를 몰라 큰 결례를 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2015년 미얀마 큰 스님이신 시따구(Sitagu) 스님이 한국에 방한하셨을 때 스님과 사진을 찍기 위해 나란히 옆에 서자, 내 주변에 있던 미얀마 사람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만류하며 무릎을 꿇게 했던 적이 있다. 처음엔 무척 당황했지만, 스님 옆에 여성이 나란히 서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스스로가 무척 부끄러웠다.

그러고 나서 미얀마 친구들에게 스님에게 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금기사항을 물어봤는데 아주 흥미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제일 신기했던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였다. ‘스님 옆에 여성이 앉을 수 없다’는 버스를 탈 때도 적용된다. 여성은 스님 옆자리에 앉을 수 없고 버스마다 스님 좌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만약에 스님 3명이 같이 버스에 탔는데 자리가 없다면, 일반 사람들이 자리를 반드시 양보해야 한다. 만약 일반 사람 중 남녀가 앉아 있었다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먼저 스님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자는 스님 옆에 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승단, 미얀마 모든 계층의 스승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시절 재가자 학생들과 스님 학생들이 함께 어우러져 새내기 배움터, 추계답사, 연등회, 차담 행사 등을 자유롭게 했던 나에게는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스님들과 대화도 잘 나누고 친하게 지냈던 나는 오히려 많은 스님에게 칭찬을 받았는데, 미얀마에서는 한국과 같이 행동을 했다가 정말 뭇매를 맞을 정도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어떤 이유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도 이러한 사회적 규범이 당연한 걸까?’를 고민하다 미얀마 역사에서 마침내 그 정답을 찾았다.

미얀마에서 스님은 사회적인 계층이 가장 높다. 미얀마에서는 ‘부자보다는 정치인, 정치인보다는 스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스님들은 많은 사람의 존경심을 받는다. ‘미얀마에서 제일 똑똑한 미얀마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절’이다. 미얀마 출가자 중에는 엘리트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인식은 미얀마 바간 왕조시대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변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미얀마 테라와다(Theravada) 승단의 시작은 바간 시대의 제1대 왕인 아노야타(Anawrahta) 때부터 시작되었다. 신아라한(Shin Arahan)은 아노야타 왕의 왕사(王師) 역할을 했다. 자연스럽게 백성들은 왕의 스승인 스님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왕보다 더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미얀마의 승단은 왕의 왕사 역할을 넘어 백성들의 스승 역할도 했다. 바간 지역 전역으로 퍼진 승단은 각 마을의 절을 통해 부처님의 경전을 가르쳤다. 경전을 읽기 위해 알아야 할 필수적인 언어와 함께 불교적 가치관을 가르친 것이다. 이처럼 승단은 미얀마의 교육도 담당했으며, 승단 교육자의 역할은 현대 미얀마에서도 ‘담마스쿨(Dhamma school)’이라는 사찰 교육기관을 통해서 현존하고 있다.

담마스쿨 모습.

교육자로서 스님들의 역할은 미얀마 사회에 뚜렷한 교육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스님들의 교육을 통해 어려운 미얀마 문자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사람들이 글자를 읽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시절, 영국 사람들의 조사에 의하면 미얀마 사람들의 문맹률이 영국 사람들보다 현저히 낮았다고 한다. 현대 사회만큼 정부의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바간 시대와 같은 시대부터 승단의 교육자 역할을 통해 모든 미얀마 백성들이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킬 수 있었다.

미얀마 승단은 교육자 역할을 넘어 미얀마 왕조를 구성하는 강력한 주축 구성원이기도 했다. 왕은 국가에 대해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자신의 스승인 스님에게 국정운영에 대한 지혜를 구하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국정 운영에 반영됐다. 14세기 미얀마 문헌에 따르면 왕의 상징인 ‘흰 우산’도 왕사라면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왕보다도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었다. 특히 파고다 위치 선정·경전 암송대회·국가 행사의 길일 등은 12명으로 구성된 스님들에게 반드시 자문을 구했다.

승단이 가진 사회적 권위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어떠한 결정을 할 때 승단의 발언이 굉장히 중요했다. 현재는 사법기관이 잘 정비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미얀마 승단이 사법기관에 준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자신의 신도가 범죄를 저지른 후 재판을 받게 되면 피고가 된 신도를 위해 선처를 구할 수 있었고,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의 사형수를 구할 수 있는 힘도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살아난 사형수들은 절에서 평생 참회를 하며 봉사로 삶을 마감했을 정도로 스님들은 미얀마 백성들에게 있어 변호사와 판사의 역할도 했었다.

백성들과 국가 간의 정책으로 인한 갈등이 빚어지면 미얀마 승단은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국가가 세금과 같은 문제로 백성들에게 새로운 정책을 제시할 때는 승단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달하게 하여 불만이 누그러지게 하였다. 민심을 잃지 않아야 했던 왕들은 국민들의 절대적 신뢰 대상인 미얀마 승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반대로 백성들은 천재지변과 같은 상황으로 세금을 납부하기 힘들 때는 승단에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였고, 승단은 백성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국가의 최고 결정권자인 왕에게 전달해 백성들의 힘든 상황을 덜어주었다. 미얀마 승단의 중재자 역할은 백성과 지도자 사이를 넘어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적인 역할로도 확대되었다. 12세기경 미얀마가 스리랑카와 외교 관계가 악화됐을 때 ‘미얀마 평화 승단 사절단’을 통해 두 나라의 관계가 회복되는 계기가 됐다. 19세기에도 미얀마와 태국의 외교 관계 회복을 위해 양국의 ‘승단 사절단’이 조직되기도 했었다.

정부 운영의 주축·중재자 되기도

바간 왕조시대부터 미얀마 승단은 미얀마 국민들의 든든한 교육자, 왕의 스승, 백성들의 대변인, 준사법기관의 역할, 외교관 등과 같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오면서 왕을 포함한 미얀마 국민들에게 말로 할 수 없는 존경을 받아왔다.
왕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왕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에서부터 백성들의 스승 역할을 하면서 그들에게 지혜의 그늘을 선사해주었다. 미얀마에는 ‘스님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미얀마 사람들이 미얀마 스님, 그리고 승단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 수 있다.

간혹 테라와다 불교를 마하야나 불교와 비교하면서 “테라와다 불교는 자신의 깨달음만 추구하고 대승적인 면이 없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을 본다. 미얀마에서 유학하면서 ‘글’로만 배운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느꼈다. 미얀마에서 살아 숨 쉬는 테라와다 불교 또한 대승불교의 면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필요한 존재인 스승의 역할을 하며 미얀마 사람들의 삶 속에서 따뜻한 가슴을 이웃과 나누는 일을 하는 미얀마 승단을 누가 이기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양곤대 박사과정>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