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바간 왕조와 몬(Mon)족

지리적 이점으로 문화적 발전
자체언어·빠른 불교 수용으로
수준 높은 불교문화·교리 갖춰
바간 왕조에 침략당한 후에는
불교문화 싹틔운 씨앗으로 역할

마누하 사원은 따톤왕국의 마지막 왕인 마누하 왕이 바간에 포로로 끌려 온 뒤 조성한 사원이다. 사진은 사원내 와불상 모습.

역사서를 들여다보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쟁을 통해 승리한 자들의 문화는 남고 패배한자들의 문화는 사라지거나 희미한 빛으로 기억될 뿐이다. 승전국(勝戰國)은 패전국(敗戰國)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미얀마 역사를 보면 예외의 경우를 찾을 수 있다. 바로 ‘바간(Bagan)’에 영향을 준 몬(Mon)족이다. 바간은 티베트-버마족이 세웠지만, 바간 시대의 융성했던 불교문화는 바간 왕조가 침략했던 따톤(Thaton, 몬 족이 세운 왕국) 왕국의 문화를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문화를 피지배계층에게 강요하기보다 피지배계층의 문화를 통해 바간 왕조의 문화를 창조했다.

몬(mon)족은 미얀마에서 독립된 왕조를 2번이나 건립했다. 바간 왕조 시기 이전의 따툰 왕조와 바간 왕조가 망한 후 세운 한따와디(Hanthawaddy) 왕조가 있다. 몬족의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리적 조건에 있다. 몬족은 처음에 미얀마에 와서 따톤 왕국을 세우면서 미얀마 남부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들은 미얀마 남부의 안다만 해(Andaman Sea)에 있는 마르타반 만(Gulf of Martaban)을 통해 다른 나라와 무역을 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화가 발전했다. 몬족은 말레이-인도네시아(Malayo-Indonesian)종족의 후손으로, 몬-크메르어(Mon-Khmer)를 사용했던 초기 태국, 캄보디아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다. 몬족에 대한 오랜 기록은 미얀마 뿐만 아니라 태국과 캄보디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6세기와 7세기경에 작성된 캄보디아 비문에는 몬족이 ‘Raman’과 ‘Rmman’으로 기록되어 있고 9세기와 10세기에는 ‘Ramanya’로 기록되어 있다.

몬족, 미얀마서 2개의 독립왕조 건립

따톤 왕국은 마르타반 만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류를 많이 했는데 그 중에서도 인도와 중점적으로 무역을 통해 많은 교역을 했다. 마르타반 만을 통해 무역 뿐만 아니라 인도의 아소카왕 시기에 불교가 전파되었다. 아소카 왕은 스님들을 따톤 왕국에 보냈고 그 이후에 테라와다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몬족은 자체적으로 언어를 갖고 있었다. 훗날 몬족의 언어는 바간 시기의 지배층 계급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이른 시기에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삼장(三藏)을 보유하고 있었고 수준 높은 불교 조각가와 문학가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따톤 왕국은 주변 왕국들에 비해 수준 높은 불교 교리와 문화적 근간을 가졌다.

난파야 사원 전경.

바간에 남아있는 사원 중에 따톤과 관련해서 슬픈 사원이 2곳이 남아있다. 아노야타 왕은 삼장을 빌려주지 않은 따톤 왕국을 전쟁을 통해 정복했다. 따톤 왕국의 마지막 왕인 마누하(Manuha)왕은 포로로 바간에 끌려오게 되었다. 마누하 왕은 아노야타 왕에 허락을 받아 사원을 만들었다. 자신의 답답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사원은 3개의 좌불상과 1개의 와불상이 있는데 매우 비좁게 지어졌다. 이 사원은 마누하 사원(Manuha temple)이라고 불리며 그 옆에는 마누하 왕이 감옥 생활을 한 난파야 사원(Nanpaya Temple)이 있다.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불심을 담아 사원을 지은 마누하 왕을 통해 따톤 왕국의 불교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바간의 첫번째 왕인 아노야타(Anawrahta) 왕은 따톤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삼장뿐만 아니라 스님들과 불교 조각가와 문학가들을 대거 바간으로 데리고 왔다. 아노야타 왕은 바간 왕국에 있는 각 절마다 삼장 필사본을 보급하면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또한 바간의 탑을 짓기 위해서 따톤 왕국에서 데리고 온 불교 조각가를 통해 몬 양식을 받아들였다. 몬 문학가들을 통해 불교를 바탕으로 한 문학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아노야타 왕은 불교의 진흥을 위해 경전 뿐만 아니라 문화가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에 문화와 관련된 예술가들을 처단하지 않고 바간으로 데리고 온 후 바간 문화의 기틀을 세웠다.

아노야타 왕의 뒤를 이은 짠싯타 왕도 몬족 문화를 바간에 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짠싯타 왕은 버마족과 몬족이 지배종족과 피지배종족으로 나누기보다 동등한 민족으로 통합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버마족과 몬족의 화합을 위해 결혼정책으로 화합을 꾀했다. 짠싯타 왕은 몬족 출신의 여자를 자신의 왕비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몬족의 언어로 된 비문을 많이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실제 통용되는 언어로 사용했다. 바간 왕조에서도 몬족의 언어가 꾸준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먀제디 비문.

역사와 문학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먀제디 비문(Myazedi Inscription, 혹은 라자꾸마라 비문 ‘Yazakumar Inscription’, 구바욱지 비문 ‘Gubyaukgyi Inscription)은 빨리어(p-Pali), 몬어(Mon), 쀼어(Pyu), 미얀마어(Myanmar)인 4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짠싯타 왕의 아들인 라자꾸마라(Yazakumar)가 짠싯타가 사망하고 1년 뒤에 만들었다.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 받지 못 했지만,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고 존경한다’라는 효심 가득한 비문 중 한 면이 몬족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바간은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멸망 이후에 미얀마는 잉와 왕조(북부 미얀마)와 한따와디 왕조(남부 미얀마)로 나눠지게 된다. 한따와디 왕조는 샨족 출신의 와리루(Wareru)왕이 몬족을 포용하면서 세운 강력한 왕조다. 이 왕조는 야자드릿(Razadarit,1393-1423) 왕 , 신소부(Shinsawbu, 1453-1472) 여왕 ,담마제디(Dhammazedi , 1472-1492) 왕의 시기 때 한따와디 왕조의 불교 황금기 시대가 열렸다.

신소부 여왕은 현재 쉐다곤 파고다의 모양이 만들어지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신소부 여왕은 자신의 몸무게와 비슷한 약 40kg의 황금을 준비하여 쉐다곤 파고다에 보시했다. 이것이 훗날 왕들과 일반 백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현재 쉐다곤 파고다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신소부 여왕의 뒤를 이은 담마제디 왕은 원래 신소부 여왕의 왕사(王師)였다. 신소부 여왕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자 왕사였던 ‘담마제디’를 환속시킨 후 딸과 결혼시켰다.

왕조 사라져도 몬족 불심은 견고

담마제디 왕도 신소부 여왕과 같이 쉐다곤 파고다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여왕이 자신의 몸무게 만큼의 황금을 보시한 것처럼 담마제디 왕도 똑같이 황금을 4번 보시했다. 또한 쉐다곤 파고다에 금, 은, 철로 만든 거대한 ‘담마제디 종(Great Bell of Dhammazedi)’을 보시했다. 하지만 훗날 포루투칼 상인이 이 종을 본 후 배의 대포를 만들기 위해 훔쳐서 양곤강을 지나다가 빠뜨려 종을 잃어버린 아픈 사연을 갖고 있다.

바간 왕조 이전부터 몬 족의 따톤 왕국은 인도의 아소카 왕에게 불교를 전해 받았다. 시간이 흘러 바간 왕조에 침략을 받았지만 그들의 유고한 불교 정신과 문화는 바간에 불교문화가 꽃 피울 수 있는 씨앗이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바간이 망하고 나서도 자신들의 왕조를 새로 만든 몬족의 불심은 시간이 흐른 만큼 더욱 더 견고 해졌다. 미얀마 불교의 지대한 영향을 준 몬 족의 불심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곁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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