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얀마 쀼(Pyu)왕조

2세기부터 9세기까지 존재해
해상으로 불교·힌두교 유입
5세기경 붓다고사 영향 받아
왕족 비롯한 국민 불교 귀의
후대 바간 왕조에 영향 미쳐
고대 도시들, 세계유산 등재

쀼왕조 시기 세워진 보보지파고다.

미얀마는 우리나라 근대기와 부분적으로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식민지 시기·민주화운동이라는 비슷한 아픔을 극복했다.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시절, 미얀마 역사의 한 왕조가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다.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줄 불교 유적의 증거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도시가 전설로만 존재할 뻔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유물로 인해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미얀마는 마지막 왕조인 꽁바웅(Konbaung) 왕조가 1886년에 영국에 점령당한 후 194814일에 독립하기 전까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 기간 중 영국의 한 역사학자가 미얀마 역사는 바간(Bagan)왕조부터 시작했으며, 그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인 (Pyu, B.C200~A.D900)’ 왕조 시기는 미얀마 사람들 간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라고 단정지은 후 미얀마 역사를 재편하려고 했다.

하지만 영국인 학자가 전설이라고 치부해버린 쀼 왕조 시기의 유적이 미얀마의 젖줄인 이라와디강(lrrawaddy River) 유역에서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할린(Halin·한링, 현재 Shewbo 인근 도시), 스리크세트라(SriKsetra·따예킷따야, 현재 Prome 인근 도시), 베익타노(Beikthano·베잇데노, 현재 Taungdwingyi)에서 대량의 쀼 왕조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쀼 왕조시기에 세운 고대도시의 흔적은 미얀마에 이른 시기부터 천 년 넘게 발전된 왕국이 존재했고, 수준 높은 불교문화유산과 서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무역의 기록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증거이다.

쀼 왕국의 경제는 농업과 무역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쀼 왕국 농업의 일등공신은 관개시설이었다. 이 관개시설은 쀼 왕국이 자리를 잡았던 이라와디강 유역의 건조지대에 흔적이 남아 있다. 쀼 시기의 관개시설은 바간(Bagan) 왕조의 풍부한 농업 생산량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간 왕조의 아노야타(Anawratha)왕이 미얀마 상부(上部)지역에 쀼 시기의 관개시설을 응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쀼 시기의 댐, 운하, 둑과 같은 건설적인 부분도 바간 왕조를 비롯하여 다른 미얀마 왕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쀼왕조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벽돌건축.

쀼 왕국은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인도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중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지점이었다. 중국 최초의 국제 교통선이라 불리는 남방 실크로드에서 미얀마 쀼 왕국을 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현재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 속에서 미얀마를 중요시 여기는 것도 과거의 역사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쀼 왕국은 중국 역사 기록에 표국(驃國)’이라고 불린다. 쀼 왕국은 무역뿐만 아니라 당나라와 외교적인 관계도 맺었다. 쀼 왕국은 801년 당나라로 사절단과 함께 35명의 음악가들을 보내기도 했다. 사절단이 파견될 시기에 쀼 왕국은 금전(金錢)과 은전(銀錢)을 사용했다. 하지만 현재 유물로 발견된 것은 은전뿐이다.

쀼 왕국은 인도에서 해상을 통해서 불교와 힌두교를 받아들였다. 인접한 인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쀼 왕국만의 문화로 승화시켜 재창조하는 단계로 빠르게 발전했다. 처음에는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도시 이름에 힌두교와 관련된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현재 대표적인 쀼 시기의 도시로 꼽히는 베익타노라는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다. ‘베익타노라는 뜻은 비슈누(힌두교 3대 신 중 하나)의 도시.

쀼왕조 시기에 조성된 불상.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붓다고사(Buddhaghosa)의 영향으로 5세기경 대부분 쀼 왕국 사람들은 불자(佛者)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쀼 왕국 사람들은 굉장히 평화로우며, 7세에서 20세가 되는 남성은 절에 가서 승려 생활을 한 것이 당나라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쀼 왕국에는 테라와다(Theravda) 불교의 영향뿐만 아니라 마하야나(Mahyna) 불교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 쀼 시기의 불교 유적을 통해 밝혀졌다.

쀼 시기의 불상의 이미지는 청동···은으로 만들어졌다. 여러 가지 수인(手印)과 자세를 통해 다양한 불상을 표현했다. 주로 출토되는 불상의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왼손은 무릎 위에,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펴서 땅을 가리키는 손의 형태)이다. 대승불교의 특징이 드러난 보살상은 할린과 스리크세트라에서 발견되었지만 주로 스리크세트라 도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이 보살상은 미얀마에서 주로 출토되는 불상과는 다르게 보관(寶冠)을 쓰거나 두건을 둘렀으며, 목과 가슴 그리고 팔에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하는 보살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불보살상과 황금 관세음보살상도 출토되었다.

쀼 왕조는 인도에서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과 천문학적 지식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쀼 왕조는 천문학이 발달했다. 쀼 시기의 달력은 불교 달력을 기반으로 했다. 두 개의 달력이 사용되었는데 이 중 하나는 여전히 현재 미얀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 달력의 첫 날은 638322일에 시작한다. 쀼 왕국은 과학과 천문학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언어의 영향도 받았다.

단순히 언어를 차용하기보다는 창조의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갖췄다. 또한 중국 역사서에 따르면 쀼 시기의 음악가들은 산스크리트어로 된 노래를 불렀다. 쀼 시기의 중요한 비문에는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그리고 쀼어가 기록되어 있다. 많은 공예품에도 쀼 문자를 새겼다. 쀼 왕국의 언어는 바간 왕조시대까지 사어(死語)가 되지 않고 꾸준히 전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바간 왕조의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간의 먀쎄디(Mya Zedi) 파고다에 있는 라자꾸마라(Raja kumar) 비문 내용은 미얀마(Myanmar)·빨리(Pali)·(Mon)·(Pyu)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쀼왕조 고대도시였던 할린지역. 이곳과 스리크세트라, 베익타노지역이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또한 많은 탑과 사원을 건립했는데 이 양식이 훗날 바간 왕조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바간 왕조의 쉐지곤 파고다와 같은 걸작이 탄생되었다. 쀼 시기의 불교 건축물은 목재 건축 공법에서 발전하여 벽돌을 사용한 건축법이 사용되었다. 또한 왕실의 많은 도움으로 불교가 발전할 수 있었다.

왕족뿐만 아니라 쀼 왕국의 모든 계층의 백성들이 불교신자였다. 그리고 학승(學僧)들이 중심이 되는 승가가 구성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쀼 왕국은 불교 도시를 기반으로 삼아 약 천 년 동안 성장할 수 있었다. 남방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쀼 왕국의 지리적 여건은 법()을 전달하기 위한 승가의 담마(Dhamma)로드가 되었다. 그 결과 다른 나라에 부처님의 법을 전달할 수 있었다.

쀼 왕조시기의 고대도시는 불교로 인해 독자적인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변화를 맞이했다. 영국의 한 역사학자의 잘못된 학설로 인해 역사 속에서 사라질 뻔한 쀼 왕조의 고대도시 전설은 현존하는 불교 유적을 통해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을 받았다. 2019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간보다 5년 빠르게 첫 번째 미얀마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미얀마는 마지막 남은 블루오션 시장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경쟁자가 없는 시장이지만 정보가 많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알기 어려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전 중국에서 인도를 가기 위한 중요한 관문이었던 쀼 왕국에서 현재 미얀마의 비전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남방 실크로드의 과거가 현존하는 쀼 왕국의 여행을 올해의 버킷리스트에 올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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