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17분에 부처님께서 “일체법(一切法)이 무아(無我) 무인(無人) 무중생(無衆生) 무수자(無壽者)라”하신 말씀을 타력 신앙종교의 가르침처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내가 돈을 벌어서 집을 사거나 지었다면 사람들은 이는 당연히 내가 소유한 내 집이라 합니다. 하지만 금강경을 잘 실천하여 아상이 없어진 사람은 자신이 사는 집을 내 집이 아닌 부처님의 집이요, 부처님이 나에게 잠시 맡겨놓은 집으로 여깁니다.보통 사람들은 내가 힘써 번 돈을 으레 내 돈이라 생각하지만 금강경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내 돈이 아니요, 부처님께서 잠시 나에게
마음을 닦아 금강반야를 얻은 수도자는 밝아지는 과정에 어떤 정해져있는 길이 있지 아니함을 잘 압니다. 금강경 제7분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을 명(名) 아누다라삼막삼보리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또 대도무문(大度無門)이라는 말씀처럼 밝아지는 과정에 정해진 길이 있지 아니함을 잘 아는 것입니다.참선을 통해서만 밝아지는 것이 아니요, 염불을 통해서도 밝아질 수 있는 것이며 달마 스님 같은 선지식만을 통해서만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효 스님 같은 선지식을 통해서도 밝아질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아상만 없으면 곧
4차 산업혁명시대에 들어서 인공지능이 쓰나미처럼 몰려 들어올 때 현재의 인재들은 모두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에 금강경에서 그 대안을 찾으라고 합니다. 탐진치가 본래 착각임을 깨달아 잠재의식의 지혜를 뛰어넘게 되면 인공지능을 제압할 위대한 지혜가 마음속에 존재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마음속의 위대한 보배를 발견하면 물론 생사해탈하는 도인도 되겠지만, 이를 세상에 활용하면 가난한 사람이 부자로, 무능한 사람이 능력자로, 무지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보통 사람이 변하여 인재가 되고 영재
단단한 지혜의 뜻을 알기 위하여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세 가지 지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첫 번째 지혜는 문혜(聞慧), 즉 (귀로) 들어서 생기는 지혜입니다. 두 번째 사혜(思慧)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즉 심사숙고하여 얻어지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다음은 마음을 닦아서 얻은 지혜인 수혜(修慧)가 있습니다. 분별심이 사라지면 마음속의 지혜광명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수혜란 마음 닦아 드러난 지혜광명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문혜는 보고 들어서 생겨난 지혜, 말하자면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여 얻어진 지혜를 말합니다. 학교에서 얻은 지식
금강경 교육은 최상의 교육, 금강반야를 얻은 보살은 불교에 집착하지 않는다. 불교와 유교, 불교와 기독교는 다른 가르침이 아니다.불교를 마음 닦아 밝아지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마음 닦아 탐진치를 소멸하면 부처님처럼 본연의 지혜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지혜란 무엇인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지혜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동일하다고, 어떤 사람은 전혀 다르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러할까요?이러한 것을 알기 위해서 우선 금강경 13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을 공부하는 것이 필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또 처한 환경에 따라서 그 사람을 밝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시며 그들 상황에 알맞게 설법하시었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신지 2500여 년 사람이 달라지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당연히 부처님의 설법도 당연히 달라야 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 써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이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다 통하는 보편적 가르침 즉 정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왜냐하면 경전에 써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 시대 이 사람들에게 항상 알맞게 적용된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참정법이란 이시대의 선각자 즉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여래의 가르침이 오랜 세월 걸쳐 세계 여러 나라에 전파되면서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영향을 받아 다양한 형태의 불법으로 변형 전개됐다. 이렇게 변형된 다양한 형태의 불법 중에서 어떤 가르침이 사람들을 밝게 하는 정법인지, 어떤 불법이 삿된 가르침인지 보통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부처님의 밝은 정법의 가르침을 받아 행복해지며 밝아지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는 하나 정법이 아닌 즉 사법의 가르침을 받들고 행하므로 불행하고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부
몇 년 전 겨울 금강경을 공부하는 도반 10여 명과 일본 규슈섬 남쪽 미야지키시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우리 일행이 머무는 곳은 태평양이 보이는 세라톤 호텔. 태평양 바다가 일망무제로 보이는 5층이었다. 1층에서 아침식사 중, 우리 일행을 안내한 사람은 한국말도 제법하는 일본 여성이었다. 말하는 태도는 단정하였고 용모 역시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말하는 태도나 용모를 보는 순간 어느듯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그에 대한 강한 인상은 비교적 과묵한 나로 하여금 서투른 일본말로 “당신 인상이 참 좋습니다”라고 이야기 하게
선지식으로부터 “누구나 시시각각 소원성취한다”는 말씀을 들은 후, 나의 세 가지 소원, 즉 학교 공부, 대인관계, 마음안정 등 세 가지의 난제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은 참이 아님을 알았다. 어렵다고 생각하고 난제라고 판단한 것이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난제가 정말 난제가 아닌 내 분별이요 착각이라고 깨친다면, 그것은 이미 난제가 아니고 재미있는 일,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제가 실은 난제가 아니요 내 분별일 뿐이며, 그 분별이 실은 착각이라 여기는 수행을 어떻게 하여야
“그렇다. 너는 부처님과 같이 매우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너는 지금까지 경험한 행(幸), 불행(不幸)이 모두 네가 불러온 것이라 생각지 않겠지만, 실은 모든 고난과 행복은 다 네가 불러온 결과인 것이요 네 뜻대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왜냐하면 너는 부처님처럼 위대하고 존귀한 존재이기에 시시각각으로 네 소원을 다 이루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열등하다는 마음, 아니 된다는 분별심을 부처님께 다 바쳐라. 그리하면 열등하다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바로 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아니 된다는 마음이 사실인줄 알고 있으면 네 일은 아니되는 쪽으
어째서 바람이니 소원이니 하는 단어가 생기게 됐을까? 무엇을 하려 할 때 뜻하는 대로 노력하는 대로 잘 이루어 진다면 바랄 일도 바랄 마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 학창시절 내내 나에게는 세 가지 바람 즉 소원이 있었다. 첫 번째의 소원은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는 소원이었고 다음은 대인관계가 원만하기를 바라는 것과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은 소원이었다. 공부 잘함, 대인관계원함, 마음의 안정 등 세 가지 소원은, 나의 행복과도 직결될 뿐 아니라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소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경쟁
성공하고 싶은 어떤 사업가가 있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이었던 그는 자신의 기도와 노력만으로 도저히 사업이 성공할 수 없음을 알고, 부처님의 비밀한 기도의 힘이 있다면 이 힘을 빌려 성공하고자 했다. 그는 미래를 잘 안다는 소문난 선지식을 찾아가 “제 실력만 가지고서는 이 사업을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위대하신 부처님의 힘을 빌려 성공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부처님께 기도하여야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선지식은 말했다.“암,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면, 사업이 어렵지 않게 훌륭하게 성공할 수 있지요. 그런데
중국의 고사성어(古事成語)에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 새옹이라는 말은 변방(邊方국경지대)에 사는 노인(翁)이라는 뜻인데, 새옹지마란 인생의 길흉화복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중국 변방에 사는 한 노인이 가장 애지중지하여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던 말이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이 노인은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이 위로 하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쁜 일 뒤에는 좋은 일도 있지”하며 낙관하였다. 과연 이 노인의 낙관대로 집을 나간 말은 또 한 마리의 말을 끌고 들어온 것이었다. 노인은 별 반응 없이 “인생의 길흉화복은 알 수
한국 불자들은 수행하면 의례히 간화선 수행을 연상한다. 이 간화선의 뿌리는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조사선에서 비롯되었는데. 조사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말씀처럼 마음 닦아 밝아지는 핵심을 곧바로 집어내, 한달음에 성불의 길로 들어가는 돈적(頓的) 수행을 특징으로 한다.간화선 수행자는 초발심의 수행자처럼 참회도 하고,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성심껏 지니지만, 선지식으로 부터 화두를 받아 본격적으로 선수행을 시작하여 홀연히 마음이 열리면 점수(漸修, 점차 닦아 밝아지는 과정
마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가 보다. 색성향미촉법을 보는 마음을 안식, 이식, 비식……. 법식 등으로 이야기 하는데, 이러한 마음들을 현재의식이라 하기도 하고 제6식이라고도 한다. 전에 말씀드렸던 반지에 대한 애착심, 사람에 대한 애착심은 현재의식이요 제6식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는 현재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도 있다. 잠재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 더 깊숙한 곳에 불성(佛性)이라는 마음도 있다. 이 불성을 부처님께서는 반야심경에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무엇이 잠재의
내가 선지식을 처음 만날 당시는 육군 공병단에서 육군 소위로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야공단에서 군복무를 하던 동기생은 10여 명 정도 되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동기생을 만나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은 유일한 낙이었다. 서로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유익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인접 부대에 근무하던 동기생 한 명이 자신이 아끼던 반지를 나에게 보여주며 마치 선물이라도 주는 듯 “이 반지 네가 끼고 있어라”고 하였다.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본 같은 부대 한 장교가 “김 소위, 잠시 내가 그 반지를 끼워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을 我皆令入無餘涅槃槃 而滅度之(금강경 제 3분의 내용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보살마하살이 응당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되나니 이른바 세상에 있는 온갖 중생인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두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도록 하리라 하라.)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이 得滅度者(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이없이 많은 중생을 다 제도하였다 하더라도 실로 제도 받
그 순간 ‘뭐, 그냥 우연의 일치이겠지!’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 의심은 아침 법문을 들어갔을 때 사라지게 됐다. “그래 두 녀석은 지껄이고 너는 잠이 오든 안 오든?” “네가 그런 생각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면 그 생각은 네 몸을 지탱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고 너는 결국 이 도량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기의 순간에도 그 마음에 흔들리지 말고 그 생각을 부처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마치 거울을 내 마음에 대고 비추듯 완벽하게 아는 선지식의 말씀에 흔들리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무슨 생각이든지 다 부처님께 바칠 수 있다면 선지식에 대한 의심까지 부처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어려운 것, 힘든 것은 다 바칠 수 있어도 무슨 생각이든지 부처님께 바치라고 말한 선지식에 대한 의심을 바치기 힘들었다. 선지식이 의심된다면 어찌 선지식이 시키는 ‘바치는 일’이 제대로 될까?사실 군에서 제대하고 백 박사님 문중으로 출가할 당시, 어머님께서는 출가를 강력히 만류하셨다. 먹고 살기가 힘든 가정 형편에 집안을 책임질 사람이 출가수도를 한다면 출가를 방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백 박사가 도인이라고? 너
언제인가 배웠던 주역(周易)의 한 구절, ‘정기위물(精氣爲物) 유혼위변(遊魂爲變)’. 즉, ‘에너지(精氣)는 물질이 되고, 떠돌아다니는 혼의 변화의 근본이 된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주역의 계사(설명문)는 공자님의 말씀이라는데 ‘정기위물(精氣爲物)’. 에너지가 물질이 된다는 말씀을 2500여 년 전 공자님께서 예측하셨다는 것이 아닌가?선지식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밝은 학문을 한 동양사람들은 못 살고 어두운 학문을 하는 서양사람들은 더욱 잘 삽니까?” “오만하면 어두워져 내리막길을 가며, 자신을 낮추고 부지런히 배우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