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금강경 제7분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또 처한 환경에 따라서 그 사람을 밝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시며 그들 상황에 알맞게 설법하시었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신지 2500여 년 사람이 달라지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당연히 부처님의 설법도 당연히 달라야 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 써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이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다 통하는 보편적 가르침 즉 정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전에 써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 시대 이 사람들에게 항상 알맞게 적용된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참정법이란 이시대의 선각자 즉 선지식이 지도하는 불법이라야 정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참선수행법이 모두 정법이 아니요, 선지식이 지도하는 참선법이 참정법이 된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선지식은 어떤 특성을 지니며 선지식이 지도하는 정법은 어떤 특성을 지니는가? 정법이란 그 가르침을 되풀이 실행하므로 사람을 불행에서 행복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는 특성이 있어야 된다.

또 사람을 무지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지혜롭게 만드는 특성도 지녀야 한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가르침, 무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르침은 참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으며 물론 정법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장 밝으실 때 설하셨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잘 살펴본다면 부처님이 어떤 분이신가 부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다소 나마 알게 된다.

금강경 제 7분에 부처님께서는 일체현성(一切賢聖)은 개이무위법(皆以無爲法)에 이유차별(而有差別)이라 말씀하시었다. 즉 선지식은 형상이 없는 가르침을 사람에 따라 달리 설법한다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잘 음미하면 선지식이라면 사람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동일한 설법을 하지 않고 수기설법을 한다는 뜻이다. 수기설법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듣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그 사람이 밝도록 설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말씀을 토대로 선지식을 생각하면 선지식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일 것이며, 겸허한 사람일 것이며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일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일 것이며, 자신을 말을 듣지 아니한다고 성내지 아니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사람일 것이며 난제에 대해 매우 슬기로운 대답을 하여주는 사람일 것이다.

선지식은 수기설법을 통하여 사람을 밝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불자들에게 자신의 지식자랑을 하지 않는다. 또 경전을 해석하는 교육지식을 많도록 주입시키는 교육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승덕박(才勝德薄)이라는 말씀처럼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을 지혜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지식은 사람의 마음 속에 부처님과 똑같이 무한한 지혜가 내재 되어 있는 것을 알고 힌트를 주어서 그 지혜를 끄집어 내게 할뿐인 것이다. 또 선지식은 사람들에게 돈이나 정성을 자신에게 요구하지 한다. 선지식은 무엇을 가져와야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데,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난제를 다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알기 때문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 보살은 어법(於法) 응무소주(應無所住) 행어보시(行於布施) 소위(所謂)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 부주성향미촉법(不住聲香味觸法) 보시라 하시었는데, 이 말씀은 조건없는 보시, 즉 무주상(無住相)의 보시를 연습함으로써 부처님의 광명을 차단하는 무시겁의 업보업장을 소멸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 결과 무량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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