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불교에 대한 집착

마음을 닦아 금강반야를 얻은 수도자는 밝아지는 과정에 어떤 정해져있는 길이 있지 아니함을 잘 압니다. 금강경 제7분에 무유정법(無有定法)을 명(名) 아누다라삼막삼보리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또 대도무문(大度無門)이라는 말씀처럼 밝아지는 과정에 정해진 길이 있지 아니함을 잘 아는 것입니다.

참선을 통해서만 밝아지는 것이 아니요, 염불을 통해서도 밝아질 수 있는 것이며 달마 스님 같은 선지식만을 통해서만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효 스님 같은 선지식을 통해서도 밝아질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아상만 없으면 곧 보살이요(유아상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비보살 금강경 3분), 모든 상을 여의면 곧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이일체제상 즉명제불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우리는 달마·원효 스님 같은 분 이외에도 역사상 밝은 분 즉 아상이 없는 분이 적지 아니함을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지는 아니하였어도 공자님, 예수님 같은 분은 분명 밝은 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모든 말씀과 행위는 한결같이 아상이 없으며, 또 아상을 없애는 길이 곧 영생을 사는 길임을 강조하시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금강반야를 얻은 보살 즉 아상을 소멸한 보살은 팔만대장경의 말씀으로만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지 아니합니다.

공자님, 예수님, 또는 마호메트 등 성인들은 모두 아상을 소멸하는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들을 악도에서 벗어나게 하며 구원의 길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금강경〉 제7분에 일체현성(一切賢聖)이 개이무위법(皆以無爲法)에 이유차별(而有差別)(모든 성인은 사람들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 다르지만 사람들의 아상을 소멸케 하여 밝게 한다)이라 하신 것입니다.

금강반야를 실감한 밝은이는 〈금강경〉 공부가 최고라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이 공부가 최고라는 자만심이 착각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금강경 공부는 틀이 정해져 있지 않은 공부이며, 어떤 형태이든지 아상을 소멸하게 하는 공부이면 모두 금강경 공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금강경 공부만을 최고라 하지 않음은 물론, 자신이 하는 공부만이 최고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잘 압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한 각종 이념, 철학, 수련, 종교의 틀에서 모두 벗어납니다. 그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각종 철학이 제각각 다른 듯해도 결국 하나의 원리로 귀결됨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철학이나 종교가 다 다른 것은 각각 자신의 업보 업장이나 선입견이 다르기 때문이며, 이것이 사라진 밝은 사람에게는 이념, 철학 등 모든 것이 다르지 않고 평등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공부를 통하여 자력과 타력이 다르지 않고 유와 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문자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서 불교나 유교, 또는 기독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은 가르침임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금강경을 실천하면서, 기독교인이나 유교인(儒敎人)과도 격의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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