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금강경 16분의 응용 2
어째서 바람이니 소원이니 하는 단어가 생기게 됐을까? 무엇을 하려 할 때 뜻하는 대로 노력하는 대로 잘 이루어 진다면 바랄 일도 바랄 마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 학창시절 내내 나에게는 세 가지 바람 즉 소원이 있었다. 첫 번째의 소원은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는 소원이었고 다음은 대인관계가 원만하기를 바라는 것과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은 소원이었다. 공부 잘함, 대인관계원함, 마음의 안정 등 세 가지 소원은, 나의 행복과도 직결될 뿐 아니라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소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실력이 뒤떨어지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한데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마음이 안정될 때 각종 능력이 나오니,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은 세상 살아나가는데 매우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내 뜻이 잘 이루어 지기를 바랐던 대학생이던 때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내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이 있기를 기대하였다.
내가 아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는 생사해탈의 거창한 가르침도 있지만, 사회에서 유능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소박한 가르침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를 하되 마음만 닦는 불교를 추구한 것이 아닌 세상에서 성공하는 불교를 원했다. 내가 추구하는 불교는 엄밀히 말해 기복불교라 할 것이다.
당시 불교계 큰 스승으로 알려진 선생님께,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을 적용하면 나의 세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여쭈어 본 적이 있었다.
“불교는 소원을 이룩하는데 도구로 쓰는 가르침이 아니고, 깨달음을 얻고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일세.” 선생님께서는 내가 예상한대로 이렇게 엄숙하고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불교란 무엇을 바라거나 구하는 가르침이 아닐세. 깨달음을 얻고 생사를 해탈하는 가르침이야!”
내가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방황하고 있을 때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다. 선지식께도 똑같이 질문하였다.
“불교는 소원을 이룩하는데 도구로 쓰는 가르침이 아니고, 깨달음을 얻고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입니까? 제가 수년 전 불교계 큰 스승으로 알려진 선생님께,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을 적용하면 나의 이 세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여쭈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제 소원을 이루는 것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까?”
“너의 소원이 무엇인가?”
“몇 년 전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자 마자 부처님 가르침에 깊이 빠져 들어가, 각종 불경을 독송하고 할 수 있는 수행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관심의 초점은 늘 세 가지 소원을 어떻게 달성하느냐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지장경, 관음경을 공부하며 지장보살, 관음보살을 수없이 불렀습니다. 그러나 나의 세 가지 소원을 이루는 데는 별효과를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선지식께서는 정색을 하시며 “불가능하지 않음은 물론 너는 시시각각으로 세가지 소원을 지금 당장 다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가지 소원이 안이뤄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네 마음속에는 세가지 소원을 바라는 마음도 존재할 뿐 아니라 소원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긍정적 마음은 물론 부정적 마음도 다 소원을 이루는 능력이 있는 것인데, 이 부정적 마음이 소원을 이루는 것을 보고 너의 긍정적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부정적 마음이 소원을 이룸을 분명히 알고, 이 ‘안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마음만 제거하면 당장이라도 네 소원은 모두 이루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