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조선후기 승역과 사원경제

17c 승려 노동력 국역 활용
균역법 시행에 승역 과중화
전문기술 갖춘 승려 배출도

17세기 이후 문파가 형성되고 법통, 교육 및 수행체계를 세우면서 불교가 존립할 수 있었던 데는 승려의 자격과 활동이 인정되고 사원경제의 토대가 어느 정도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는 승려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대가로 승려의 특수신분을 용인하는 정책을 펼쳤다. 전쟁에 참여한 의승군에게는 도첩에 상응하는 선과를 지급하였고 팔도도총섭 휘하에 도별로 2명의 총섭을 두어 의승군을 조직, 통솔하게 하였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재조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광해군대에는 궁궐 등의 조영에 승군을 동원하였고 인조대에는 보다 제도화된 방안이 시행되었다. 즉 벽암 각성을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하고 삼남지방의 승도를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축성하였고, 산성의 조영과 방비에 기여한 승군에게 도첩을 발급한 후 군역을 담당했음을 증명하는 호패를 지급하였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는 궁궐, 산성, 능묘, 제방 등을 조성할 때 국역 체계 안에서 승려 노동력을 적극 활용하였다. 당시 양인 역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국가 요역체계의 원활한 운영이 쉽지 않은 상태였고, 이에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대신 점진적으로 금납화의 방향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원하기 쉽고 노동 효율성이 비교적 높은 승역에 주목하여 이를 국역체계 속에 편입시킨 것이다. 산성의 방비 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등을 보관하는 4대 사고의 수호나 변방지역의 군역 일부도 승군이 담당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후반부터는 승역을 직역의 하나로 보아 호적에 승려 호를 기재하게 되었다. 이는 승려가 더 이상 출세간의 존재가 아닌 일반 민과 다름없는 국가 체제 내의 구성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지역별, 주요 사찰별로 부과된 승역은 불교계에 큰 부담을 주었지만, 역으로 승려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안정적인 인적 재생산이 가능해졌고 정치사회적 입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숙종대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 조성에 다시 승군이 동원되었고, 남한산성에 개원사를 비롯한 9개의 사찰이 있던 것처럼 북한산성에도 중흥사를 필두로 한 11개의 진호사찰이 두어졌다. 각 사찰에는 수승과 승장 각 1인씩을 두었고 남북한산성의 승영을 관할하는 승대장은 전국의 승려를 총괄하는 팔도도총섭을 겸임하게 되었다. 두 산성에는 총 700명의 승군이 상주하였는데, 1년에 6차례 교대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승려들이 상번, 입역하는 의승방번제가 실시되었다. 이후 산성의 상번 입역이 각지의 사찰에 인적, 재정적인 부담이 되자 영조대인 1756년에 북한산성 도총섭을 역임한 호암 약휴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북한산성에 윤번제 대신 방번전제를 시행하였다. 이는 승려들이 멀리서 교대로 입역하는 대신 매년 승려 1인당 40량씩 해당 사찰에서 분담하여 상주하는 승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승려 또한 백성이라는 전제 하에 산성을 제외한 국가부역에서 승려를 과도하게 동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산릉역의 경우 1757년을 끝으로 종식되었고 지방의 기타 공역도 필요한 양식을 관에서 지급하게 하였다. 또한 각종 잡역과 종이 등 특정 공물의 납부가 사찰 재정에 큰 부담이 되어 산성 방번전 액수의 충당에 어려움이 있다는 불만이 일자 정조는 1785년 남북한산성의 방번전을 반감시켰다. 이처럼 승려 노동력을 직접 활용하는 방식에서 금납화로의 전환이 있었고 또 그 액수도 점차 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조선후기 불교는 사원경제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계를 운영했다. 또 승역이 부과되면서 전문기술을 갖춘 승려들이 배출됐다. 승시(僧市)도 사원경제 활성화 방안 중 하나로, 불교문화창달에 앞장선 스님들이 수준 높은 작품을 내놓곤 했다. 사진은 팔공산 승시축제 봉행위원회가 주최하는 승시에서 한 스님이 불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팔공산 승시축제 봉행위원회

이러한 불교 시책의 변화는 국역 및 국가 수취 체제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751년 군역을 대신하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인의 역이 경감되었고, 이는 상대적으로 승역이 양역에 비해 과중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기존에는 양역을 피해 승려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 승역을 버리고 환속하는 역피역의 사례가 늘었다. 또한 승역이나 공물, 잡역 등이 과도하게 책정된 이름난 큰 사찰을 비우고 작은 사암으로 승려들이 옮겨가는 일도 생겨났다. 18세기 후반에 들어 방번전제의 시행이나 반감 조치, 잡역 혁파 등의 조치가 연이어 내려진 것은 이러한 정책적 변화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장기적으로 보면 앞서 각종 공물을 미곡으로 대납하게 하는 대동법의 시행이나 균역법처럼 양인의 국역 부담을 경감시키고 금납화의 방향으로 전환된 정책방향과 궤를 같이 하여 불교시책도 변화한 것이다.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영조는 유교의 도가 크게 성하니 이단이 어찌 해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불교에 대해 종전과 같은 방임정책을 취하였다. 영조대는 물론 이후에도 왕실 원당의 혁파령이 간혹 내려지기는 했지만, 이는 공론의 장에서 나온 언설일 뿐이었고 왕실의 경제기반과 밀착된 원당의 완전한 혁파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 결과 왕실 원당은 조선말까지 계속 존속하였다. 탕평 정치를 폈던 정조대에도 불교는 국왕의 보호와 관리를 받았고 왕권 강화에도 일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조는 일부 혁파되었던 왕실 원당을 부활시키고 선왕의 원찰을 중수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재정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간 특수한 성격을 지니는 승역을 근거로 하여 조선후기 승려의 사회적 신분이 천인과 다름없었고, 승려가 8천의 하나였다는 잘못된 인식이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승역은 천인이 아닌 양인의 역에 준하는 의무였고, 기본적으로 승려는 대를 이어 세습하는 사회적 신분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출가한 선택적 존재였다. 또한 조선후기 승려의 출신 배경은 양인이 가장 많았고 양반부터 천인까지 다양한 신분을 포괄하였다. 특히 학승이나 고승들은 대개 한문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지식인층으로서 양반 사류 출신도 적지 않았다. 승려가 8천에 들어간다는 인식은 일본인 학자 다카하시 토오루가 이조불교(1929)에서 불교가 침체되고 승려가 사회적으로 경멸을 받았다는 주장과 함께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식상의 통념이나 개별적 사례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법제에 나오는 7종의 천인에 승려를 임의로 추가한 것일 뿐이며 조선후기 법전이나 다른 사료에서 전혀 그와 관련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조선후기에는 승역 및 잡역, 공물의 많은 부담 속에서도 사원경제의 자립적 기반이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전통사찰 대부분이 17~19세기에 중창되었고 그 안에서 수행과 교육, 다양한 신앙 행위가 이루어졌다. 이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토대가 확보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17세기 이후 사원경제의 기반과 관련하여 가장 큰 변화는 승려의 사유 전답 확대와 그 소유 및 상속이 제도적으로 용인된 점을 들 수 있다. 이전에도 승려 개인의 토지소유가 일부 확인되기는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승려의 토지 소유와 상속이 공식화되었고 관행으로 이어졌다.

승려 사유지 발생의 직접적 계기는 전국토를 유린한 임진왜란이었다. 7년간의 전란을 거치면서 토지 황폐화와 소유권의 혼란이 일어났고 이는 사찰 소유 전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사원경제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당시 폐허가 된 사찰을 재건하고 승군 활동과 문파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추가적 재정확보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또한 현물 대신 곡식으로 공물을 납부하는 대동법이 시행되자 토지의 소유자가 납세자로서 중요한 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승려 사유지가 늘어나고 그 상속이 문제가 되자 조선 정부는 처음에 승려 개인의 사유지를 사찰 내에서 제자에게 상속하는 것을 금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속가의 친족뿐 아니라 승려 사제 간에 개인 토지를 상속하는 것을 결국 인정하였다. 이는 승려 개인이 부모나 스승에게 물려받은 전답을 제자에게 상속하고 결국 그 토지가 사찰이나 문파 소유로 대대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사찰의 재산증식과 재정운영을 위한 조직 결성 및 보사(報謝)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찰계이다. 사찰계는 승려를 중심으로 신도까지 참여하는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띤 일종의 계회였다. 조직적 신앙 활동을 목적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이를 매개로 이식을 늘려서 사찰에 기부하거나 전각을 조성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사찰계의 종류는 동년배들이 결성하는 갑계, 같은 문파 승려들이 조직하는 문중계, 사찰의 전각 단위로 조성 및 중수를 추진하는 불량계 등이 있었다. 또 신앙 위주의 사찰계로 가장 대표적인 염불계를 비롯하여 칠성계, 미타계, 지장계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사찰 주변 산림을 육성하기 위한 송계, 승려교육을 위한 학계, 범패의 전수를 위한 어산계 등 특수한 목적을 지닌 다양한 계가 존재하였다. 한편 보사청은 고위직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사찰의 재정 자립을 추구한 일종의 사설 금융기관이었다.

이밖에도 유력가의 후원이나 재회, 기도 등을 통해 들어오는 시주금 등 전통적 방식의 수입원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특히 사찰이 왕실, 궁방의 원당으로 지정되면 공적인 재정 부담이 줄고 공권력 침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후원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거짓으로 원당임을 사칭하는 사찰이 나올 정도였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잡역 및 각종 잡물의 공납 등을 수행하면서 사찰의 승려들이 수공업 등의 전문기술자로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사찰에서 주로 담당한 종이 생산과 목판 인쇄 기술의 축적은 물론 뛰어난 목공과 석공, 화승 등이 배출되었다.

전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국가재정이 전쟁 이전 수준을 만회한 17세기 후반부터는 각지에서 큰 불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일반 사회는 물론 사찰의 재정기반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기에 가능한 일로써 여러 사찰에서 대규모 전각이 중창되었다. 또한 많은 불상과 불화의 제작, 이를 담당한 다양한 화승 집단의 존재, 야외 법회를 위한 대규모 괘불 그림의 조성 등 물적 증거를 통해 사원경제의 기반이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불교신앙을 매개로 한 왕실 및 유력가, 일반 민인들의 기원과 후원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19세기에는 왕후와 외척 세력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특혜와 비리,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공적 기강이 무너지고 중앙과 지방의 국가 운영시스템이 와해되었다. 이는 경제적 모순과 양극화 현상의 심화를 낳았고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불교계의 경우에도 지방관이나 토호들이 사찰을 침탈하거나 과도한 부담을 요구하는 등 극심한 어려움에 처하였다. 물론 왕실과 정부 차원에서 주요 사찰의 잡역을 혁파하고 원찰에 특혜를 내리기도 했지만, 불교도 일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곤경을 겪었다. 그리고 그러한 어두운 기억이 20세기에 들어 조선후기 불교 쇠퇴론과 승려 천인설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로 고착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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