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종교적 지형의 확대

내세 기원·정토왕생 염원 구축
승속 어우러진 신앙공동체 결성
기독교와 근대종교 생존 각축전


▲ 김시습이 기거했다는 자리에 세워진 부여 무량사 삼성각. 이처럼 조선후기 불교는 유교사회에서 민간신앙과의 습합과 공간적 결합을 통해 비주류 종교로서 극복 방안을 모색했다.
조선시대 불교는 여성과 서민 위주의 신앙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왕실과 중앙의 세도가, 하급관리와 아전, 각 지역의 토호 등 여러 계층에서 다양한 불교신앙이 이루어진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불교식 제의와 내세관이 유교의 제사와 선조관, 죽은 후 정신은 기와 혼백으로 흩어져버린다는 관념으로 바뀌게 된다. 즉 지식층 및 사회주도층의 경우 사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불교와 유교의 일대 각축전에서 유교가 완승을 거둔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신앙은 업과 윤회로 상징되는 세계관, 죽은 이의 명복과 안녕을 비는 내세에의 기원, 정토왕생의 염원이 주축을 이루었다.

성리학적 가치관이 사회 저변에 확산되고 유교의 제의가 일반 대중까지 파급력을 갖게 된 것은 조선후기인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사림이 중앙과 지방 사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종법과 부계 중심의 유교적 친족관념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때였다.

이때 유교식 사후 관념과 제의가 절대적 권위를 획득하였고 불교식 상장례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불교를 통한 종교적 염원의 기원과 해소는 계속되었는데, 사후 세계와 관련된 내세신앙, 염불을 통한 극락정토 왕생, 민간신앙과의 습합 등 불교의 장점을 살리는 한편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저변을 넓혔다.

내세 관련 신앙 가운데는 명부를 관장하는 염라대왕 등의 시왕, 그리고 지장보살이 각광을 받았다. 시왕은 현세에 행한 업에 대해 사후에 판결을 내리는 존재이며, 지장보살은 윤회의 길이 결정될 때 좋은 쪽으로 도움을 주는 이였기에, 시왕을 모신 명부전이나 지장전이 대부분의 사찰 안에 두어졌다. 조선후기에는 각종 불교 의례집이 다수 간행되었다. 진언밀교신앙과 관련 있는 독송용 주술의례를 담은 진언·다라니집은 대개 진언에 한글과 한자로 발음을 부기하였다. 밀교신앙은 본래 즉신성불을 염원하는 것으로 현세적 이익 추구의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조선후기 진언·다라니집은 대부분 돌아가신 부모의 추복을 위해 시주하여 간행한 책들로 내세신앙의 유형에 속한다.

조선후기 불교신앙의 대표주자는 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염불신앙이었다. 선과 교, 염불의 전통을 모두 계승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염불은 수행체계 삼문의 하나인 염불문이 되었다. 염불은 자성미타, 유심정토로 상징되는 염불선 수행, 극락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염불정토 신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는 선수행의 일환으로 염불을 포섭한 것으로써 정토와 마음을 등치시켜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후자는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해 서방극락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것으로써 대중적 신앙의 성격을 갖는다.

염불수행 및 신앙의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해 본다. 석실 명안(1646~1710)은 만년에 ‘염불왕생문’에 귀의하여 1709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70여 명이 참여한 서방도량 염불결사를 결성하였고 〈현행법회예참의식〉을 간행하였다. 명안은 언제 어느 때나 나무아미타불을 염하여 정토왕생을 기원한다는 ‘염불가’를 지었고 입적하기 직전에 서쪽을 향해 세 번 절하였다. 기성 쾌선(1693~1764)은 선과 화엄을 두루 배운 후 말년에 염불정토문의 입장에서 선과 교를 포섭하였다.

그는 선문과 교문에서는 근기에 차등을 두지만 염불문은 선과 교, 범인과 성인, 선과 악을 모두 포괄하며 수행의 단계를 제한하지 않는다고 하여 삼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보았다. 쾌선이 쓴 〈염불환향곡〉은 고향을 찾아가던 중에 선과 화엄을 접하였지만 결국 아미타불을 부르며 고향에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호남의 교학종장이었던 대둔사의 연담 유일(1720~1799)은 “극락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불교를 믿고 염불하지 않더라도 세간의 착한 이들은 왕생할 수 있다. 천당이 있다면 그곳은 군자가 오르는 곳이므로 잘못을 깨닫고 진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였다. 참회와 수행을 왕생의 기준으로 삼으면서도 유교사회의 시대상에 걸맞게 신앙보다 선행을 앞세운 점이 흥미롭다.

조선후기에는 〈예념미타도량참법〉, 〈예념왕생문〉 등 염불 의식을 모은 의례작법 서적이 빈번히 간행되었다. 목판으로 한 번에 1,000부를 찍기도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수요가 컸다. 또한 염불의 의례화가 진전되면서 극락정토로의 왕생 기원이나 죽은 이의 영혼 천도를 위한 법식에서 베푸는 시식의례도 발달하였다. 명연의 〈염불보권문〉(1704)은 ‘미타참약초’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정토에 왕생한 이들의 전기와 ‘회심곡’ 등을 한글로 번역해서 실었고 염불작법의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핵심적 내용은 염불을 통해 극락정토로 왕생하는 것을 기원하는 것으로 여러 부처들 가운데 아미타불에게 염불하는 것이 가장 낫고 극락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부처의 세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정토 가사도 다수 창작되었는데, 서방극락정토로의 왕생을 염원하는 왕생 가사, 참선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닦고 자성을 깨치는 것을 권면하는 참선 가사로 나눌 수 있다. 19세기에 나온 대표적 정토 가사인 〈권왕가〉는 염불수행을 행할 때 경계해야 할 10가지 악업을 소개하고, 정토왕생의 요체를 제시하여 만일염불회 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염불과 정토를 주제로 한 소설도 유통되었는데 환생 후 염불을 통한 극락왕생을 내용으로 하는 〈왕랑반혼전〉이 유명했다.

승속이 함께 참여하는 신앙 공동체 형태의 염불계, 염불회 등도 각지에서 결성되었는데, 대중의 참여도가 높아 지역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염불계를 주관하는 염불당 화주는 사찰의 재정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를 들어 경상도 오어사에서는 승속 150명이 염불계를 조직하여 토지를 구입하였고 그 수입으로 절에 염불당을 조성하였다. 19세기에는 강원도 건봉사, 신계사의 만일염불회를 비롯해 전라도 미황사, 부산의 범어사 등 전국적으로 염불회가 유행하였다. 만일염불회는 약 27년 동안 매일같이 염불을 행하는 것으로 웬만한 신심과 열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불교와 민간신앙과의 습합 및 공간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17세기 이후 도교에서 비롯된 칠성신앙을 행하는 칠성각, 전통적 명산신앙에서 나온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 홀로 깨달았다고 하는 나반존자를 봉안한 독성각 등이 사찰 경내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삼성각의 조성은 임진왜란 후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다. 이는 유교사회에서 비주류로 몰린 불교와 민간신앙이 서로 공존을 모색한 것으로 사찰 공간은 복합적 종교 클러스터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17세기 초에 간행된 청허 휴정의 〈운수단〉에도 ‘칠성청문’이 수록되어 이른 시기부터 불교에서 칠성신앙을 수용했음이 확인되며, 18세기의 승려 상월 새봉이 ‘북두에 절하고 심증 실천의 법으로 삼았다’고 할 정도로 칠성신앙은 불교와 융합하여 성행하였다. 현존하는 조선후기 불화 가운데 칠성탱이 미타탱, 지장탱과 함께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도 그러한 양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 밖에 무속과 결합하여 기복과 병의 쾌유를 비는 마을 미륵신앙의 형태도 나타났다. 이처럼 기복에 초점을 둔 여러 신앙의 수용과 융합은 다양한 목적과 기능의 종교적 수요를 창출하고 불교의 저변을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했다.

조선후기 불교신앙의 전개양상을, 국왕과 왕실, 세도가 등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어 시기별로 정리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은 엄청난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고 국왕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이에 각 사찰에서는 국왕과 왕비, 왕세자의 장수를 비는 원패를 세우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또 전란의 여파로 불교신앙의 수요가 급증하였는데, 선조 말년인 1606년에는 거사들이 도로를 수리하고 서울 창의문 밖에서 승속이 모두 참여하는 수륙대회를 열었다.
 
이때 시장의 철시가 이루어졌고 사족의 부녀까지 큰 길에 가득차서 문제가 되었다. 당시 남자는 거사가 되고 여자는 사당이라 칭하며 승복을 걸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고 하며 일반민이나 사대부가 승려를 접대하고 부처를 공양하며 재회를 베푼다는 기록에서 시대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선조를 이은 광해군은 부휴 선수(1543~1615)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묻고 시호를 하사하였다. 또 훗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선수의 제자이자 인조대에 초대 팔도도총섭을 지낸 벽암 각성에게 화엄의 요체를 물었다 한다. 현종은 일시적으로 억불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두 공주를 잃은 후에는 원찰을 짓고 불교식 추천 의례를 행하였다. 숙종도 태조와 관련이 깊은 함경도 석왕사에 친필을 써주었고 화엄사 각황전이 중창되자 선교양종대가람으로 지정하였다.

18세기는 일종의 문화적 르네상스 시기로서 많은 사찰이 중수되고 다수의 불상과 불화가 만들어졌다. 왕권 강화와 효의 실천을 위해 불교를 활용했던 정조는 용주사 창건 때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복전을 짓고 공양한다”는 내용의 ‘봉불기복게’를 썼다. 또 〈부모은중경〉을 대대적으로 간행하여 전국 관청과 사찰에 배부하였는데 여기에는 왕생 후 극락의 안락함을 그린 그림이 추가되었다. 정조는 100일 기도 끝에 왕자를 낳자 석왕사, 선암사 등에 감사의 글과 토지를 하사하였고, “불교는 유불도 3교 가운데 가장 늦게 나온 것이지만 그 영험함은 매우 두드러진다. 유학자들은 이를 믿지 않으나 또한 간혹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기뻐하였다. 부모와 자녀의 복을 기원하는, 가장 일차적인 종교적 심성의 발현이 불교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19세기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고 민란이 연이어 발생하는 등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사찰에 대한 지방관 및 토호세력의 사적 침탈 또한 극심해졌다. 물론 왕실이 후원한 불사와 법회, 불서 간행은 지속되었고, 왕실 원당 사찰에는 잡역이 면제되는 등 특혜가 주어졌다. 이에 왕실과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각종 법회가 열렸고 묘향산 축성전, 송광사 성수전 등의 원당이 국왕의 후원에 의해 건립되었다. 정부 고관이나 명문가의 불교 후원 사례도 다수 확인되는데, 대표적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는 여주 신륵사 등의 불사를 지원하였고 그 밖의 세도가문에서도 금강산 지역 사찰 등을 후원하였다.

19세기는 내우외환의 시기이자 각종 종교가 새로 발흥한 종교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종교적 행위와 염원이 분출되었고, 불교와 천주교, 동학을 비롯한 신흥종교 및 민족종교가 새로이 부상하였다. 앞서 천주교는 국가 정체성을 뒤흔드는 대표적 사교(邪敎)로 지목되고 조선정부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차츰 교세를 확장하였고 조선의 오랜 종교전통인 불교와 함께 내세로 가는 길목을 두고 경쟁하였다.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 등과 함께 천주를 염호해서 천당에 갈 수 있는 길이 새로 열리게 된 것이다. 불교는 곧 다가올 기독교와의 각축전과 근대종교로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분투를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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