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19세기 선·교의 이중주

선 분류·우열 두고 100년 논쟁
선 수승 주장백파에 초의 반박
없는 진귀조사관념 계승돼
병렬구도 한동안 이어져

 

▲ 불타선사(佛陀禪師)가 중국에서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한 소림사. 이 곳에서 중국 선종의 교리가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출처=소림사 홈페이지
19세기에는 선의 분류와 우열 관계를 둘러싸고 거의 100년간에 걸친 선 논쟁이 펼쳐졌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은 3종선 분류를 주창한 백파 긍선이었고, 이에 대해 초의 의순이 반박하면서 논란이 이어졌다. 거시적 관점에서 선 논쟁은 교학의 성행, 특히 18세기 화엄교학 이해의 심화가 선종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고, 따라서 그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선 논쟁에서는 선의 종류를 나누고 상호 관계를 설정하면서 선에 대비되는 교, 그 중에서도 화엄의 위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화 되었다.

선 논쟁의 불씨를 지핀 백파 긍선(1767~1852)은 교학에 힘쓰다가 40대 중반 이후에 교를 버리고 선의 우월성을 천명하였다. 그는 선운사에서 출가한 후 지리산에서 당대 최고의 화엄종주였던 설파 상언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어 구암사에서 설파의 문손 설봉 거일의 법을 전해 받았으며 백양사 운문암에서 개당한 후 강학에 전념하였다. 45세 때에 문득 법의 진제가 문자 밖에 있음을 깨닫고는 강안을 거두고 선 수행에 몰두하였다. 이후 백양사에서 선지를 현양하고 구암사에서 선강 법회를 여는 등 호남 선문의 중흥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백파는 격외의 선전뿐 아니라 화엄 법문에도 정통하였고 또 계율을 잘 수지하였기에 추사 김정희가 쓴 그의 비문 제명은 화엄종주 대율사 대기대용(大機大用)’이었다. 그렇지만 백파의 관심은 오로지 선에 집중되었고 특히 임제 간화선의 종지를 강조하였다. 그의 저술 면면도 선문수경〉 〈법보단경요해〉 〈오종강요사기〉 〈고봉선요사기〉 〈선문염송사기등 선종 서책에 대한 주석서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그는 선종 우위론의 색채를 강하게 가졌고 그가 남긴 수선결사문에서도 그의 실천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백파의 법맥은 문손 설두 봉기를 거쳐 근대의 학승 박한영으로 이어졌다.

▲ 전북유형문화재 제122호 선운사백파율사비(禪雲寺白坡律師碑). 한때 교학에 힘쓰던 백파는 교를 버리고 선의 우월성을 천명하면서 초의와 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파는 주저 선문수경에서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선을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 등 3종으로 분류하였다. 이 중 앞의 조사선과 여래선은 비록 차등은 있지만 모두 격외의 선이며, 이에 비해 뒤의 의리선은 가장 낮은 차원의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그 이유로 의리선이 교학적 이해와 문자의 습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들었다. 나아가 3종선의 순차적 배열을 위해 부처의 삼처전심이나 임제종 조사 임제 의현의 3구 등에 입각하여 해석을 붙였다. 또한 선종 5가 가운데 임제종을 가장 수승한 단계로 평가하였는데, 앞에서부터 임제종, 운문종, 조동종, 위앙종, 법안종 순서로 배열하였다.

백파의 새로운 주장에 반기를 든 것은 초의 의순(1786~1866)이었는데, 그는 선문사변만어에서 백파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비판의 요지는 근기의 우열에 따라 선을 차등적, 배타적으로 나눈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초의 또한 방편에 있어서는 사람을 기준으로 조사선과 여래선, 법을 기준으로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구분할 수 있음은 인정하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간의 우열이나 차등이 없으며 조사선과 여래선, 격외선과 의리선은 근본적으로 동등하다고 보았다. 또한 조사(격외)선과 여래(의리)선을 같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 통설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는 부처의 마음()과 언설()이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초의는 선에 대한 혹자의 질문에 근기가 뛰어나지 않으면 선에 전념하는 것과 교에 전념하는 것에 차이가 없다. 내 어찌 힘들여 그것을 하겠는가라고 답하였다. 또한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인데 입으로 언설만 하면 교뿐 아니라 선의 언구도 모두 교의 자취에 들어가며, 마음에 직접 투철하여 얻으면 선뿐 아니라 교학이나 일상 언어도 모두 향상일규이다고 설파하였다. 즉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관건이며 선과 교에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백파와 초의는 모두 편양파의 주류 계보를 이었다. 이들의 공통 조사인 환성 지안은 선문오종강요에서 선종 5가의 요체를 적시하고 6조 혜능 이후 선종 종파 중에서 기용(機用)’을 밝힌 임제종이 가장 수승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임제종 우위의 선종관을 백파가 계승하여 새로이 3종선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초의는 선교겸수 전통과 화엄을 비롯한 교학 중시라는 시대사조에 부합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즉 이들의 논쟁은 임제법통과 간화선, 선교겸수와 화엄교학이라는 조선후기 불교사상의 양대 흐름 속에서 파생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선 우위론과 선교병행론이 경합을 벌인 선교 판석과 해석의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선 논쟁은 단순한 선의 분류 및 우열 문제가 아닌 조선후기 불교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둘러싼 사상사적 논쟁이었던 것이다.

전통을 포괄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초의 의순은 학예일치적 삶을 살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연담 유일의 문손으로 대둔사의 13대 종사가 되었고 선과 교에 모두 정통하였다. 그는 영암 월출산 정상에서 보름달이 바다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대둔사에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간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저술로는 선문사변만어〉 〈초의시고〉 〈일지암문집등이 있고 조선의 다도를 일으킨 다신전동다송도 현존한다. 그 밖에 조선중기 호남에서 석가의 화신으로 추앙된 진묵대사(1562~1633)의 행적을 밝힌 진묵조사유적고도 지었다.

초의는 당대의 명유들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동년배인 추사 김정희와는 시, , 차를 함께 나눈 평생의 지음이자 지기로 지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38통의 편지에는 차에 대한 언급과 함께 불교교리에 대한 고증적인 내용도 담겨있다. 초의 또한 추사의 제문에서 42년간의 금란지교를 떠올리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도를 논한 사실을 회고하였다. 이밖에도 1801년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시와 주역 등을 배우기도 했다. 초의는 시와 서예뿐 아니라 불화와 범패, 다도와 원예 등 다방면에서 일가를 이루었는데, 남종화의 거두이자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유도 그에게 시서화와 다도를 3년간 수학하였다.

백파와 초의가 일대 논쟁을 펼친 후 이들의 설을 계승하거나 자신의 견지에서 비판하는 논의들이 이어졌다. 먼저 우담 홍기(1822~1881)선문증정록에서 초의의 설을 지지하면서 조사선=격외선, 여래선=의리선의 구도를 재차 확인하였다. 이어 백파의 문손인 설두 봉기(1824~1889)선원소류에서 선론에는 교외별전의 선지 외에 선의 종류별로 요약 가능한 선전이 있다고 하여 백파의 선종 분류를 지지하며 보완 설명하였다. 그는 화엄의 법계를 3종선에 배당하여 사사무애와 이사무애를 각각 조사선과 여래선에 비정하기도 했다. 이 또한 백파가 제시한 조사선-여래선-의리선의 차등적 구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선 논쟁의 대미를 장식한 서진하(1861~1926)선문재정록에서 기존 논쟁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다른 각도의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백파가 의리선을 교로 본 것은 이사즉융의 원돈교를 선에 배정했다는 점에서 잘못이며 3종선 모두 교외의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의리선은 에 매인 것이고 조사선과 여래선은 격외라는 점에서 차이를 둘 수 있다고 보았다.

선 논쟁의 내용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진귀조사 관념이 계승되었다는 점이다. 진귀조사는 부처에게 조사선을 전수한 이로서 중국에는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인식이었다. 현존 문헌 중 진귀조사설을 처음 제기한 것은 고려 후기 천책이 지은 선문보장록이다. 여기서는 신라의 선승 범일국사가 선과 교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진귀조사의 교외별전을 언급하였다는 사실을 해동칠대록이라는 책을 인용해 소개하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임제종 간화선풍이 직접 수용되면서 교와 대비되는 교외별전의 선의 입장이 크게 부각되었다. 따라서 진귀조사의 교외별전설은 당시의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제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허 휴정 또한 선교결에서 부처가 진귀조사에게 별도로 선을 전수받았음을 강조하였고, 18세기 후반 충허 지책도 교는 연등불이 석가에게 전하였고 선은 진귀조사가 세존에게 전수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진귀조사설은 조선후기에 통용되었고, 선 논쟁에서도 진귀조사설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후기는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를 수행상의 기조로 삼았고 18세기에는 교학이 매우 성행하여 화엄교학과 조사선을 같은 위상으로 파악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조사선=, 여래선=교의 이해에서도 확인되는데 19세기의 선 논쟁은 바로 선과 교가 중첩된 전통의 기반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백파는 교학을 중시하는 교계의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선, 특히 임제종의 우위를 재차 천명한 것이었다. 그는 여래선을 조사선과 같은 격외선으로 파악하고 의리선을 그 아래 단계로 설정하여 교로부터 여래선의 자격을 박탈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초의는 선과 교의 근원적 일치라는 전통적 통념을 전제로 격외선=조사선, 의리선=여래선의 병렬적 구조로 파악한 것이었다. 결국 선 논쟁은 선에 대한 분류와 차등의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상으로는 선종과 교학을 아우르는 선교 판석의 의미를 가졌고, 선종 우위의 관점과 선교 전통의 동시 계승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나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후기에는 조사선=격외선, 여래선=의리선의 조합이 대체로 통용되었다. 그리고 전자는 선, 후자는 교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조사선의 우위를 주장하거나 조사선과 여래선의 근원적 일치를 주장하는 등 관점의 차이는 있었지만 선과 교를 병렬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졌다. 이는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 지향과 강학 및 화엄교학의 성행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파생된 특성이었다. 조사선과 여래선을 모두 격외선에 포함시키고 의리의 교학을 낮은 단계의 의리선으로 규정한 백파의 구상은 청허 휴정의 사교입선과 같은 선 우위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조사선(), 의리 여래선()의 병렬 구도는 선교겸수의 추세와 지향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간화선 우위의 임제 법통을 대외적으로 표명한 조선후기에 선과 교의 위상을 둘러싼 일대 논쟁이 펼쳐진 것은 교학 전통의 정립과 계승이 실제로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상사적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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