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사찰령 체제의 현실

조선불교양종 30본산제 시행
본사주지 임면권 총독부 관할
정치적 종속에 비판 일었지만
식민지 체제 불교 속성 심화

▲ 1929년 1월 3~5일 각황사(현 조계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 참가한 불교계 대표들의 기념촬영. 사진=〈한국불교 100년〉(민족사)

1910829일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직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원종의 종정 이회광은 종단의 정식 인가에 협조를 얻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06일에 그는 일본 조동종과 원종 간의 연합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하였다. 연합조약의 성사는 일본 조동종의 한국포교사 다케다 한시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는데, 내용상 한국불교 전체를 일본불교의 한 종파에 종속시킨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이 12월 무렵 국내에 알려지자 개종역조의 매교 행위라는 성토가 이어졌다. 이에 19111월 이후 한용운, 박한영 등 선각적 승려들이 주도하여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등 영호남의 전통적 거찰을 중심으로 한 임제종 건립운동이 일어났다. 임제종의 종명은 태고 보우를 매개로 한 임제법통 계승의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한국불교의 주체적 종단인 임제종 설립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불교의 특정 종파와 연계된 원종도 인가하지 않았다. 대신 총독부가 한국불교를 직접 관리, 통제하는 방향으로 정책노선을 정하였다. 이에 19116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을 반포하였고 1912년에는 일본과 같은 본말사 제도에 기초한 조선불교선교양종 30본산제를 시행하였다. 이 사찰령 체제에서는 30본산 본사의 주지 임면권을 총독이 가지는 방식으로 불교계의 주요 인사권을 총독부가 거머쥐었고 사찰 재산의 관리처분권도 총독이 관할하였다.

앞서 일본에서 종교의 자유가 관철된 것은 서구열강의 압력으로 메이지 정부에 의해 기독교 금지조치가 해제된 1873년부터였다. 이에 표면적으로는 근대성의 상징인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불교와 신도가 독자적 조직을 가지고 포교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9년에 선포된 일본 제국헌법에서 일본의 국체는 통치권의 정점에 있는 신성불가침한 천황임을 명시하였고, 그에 따라 제정일치적 입헌군주제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었지만 그 전제조건으로 천황과 국가권력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여 국체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 자유를 허용함을 분명히 하였다. 일본보다 국가불교의 특성이 더욱 강하게 적용된 식민지 조선의 사찰령에서도 천황의 은혜에 감사하고 사찰에서 천황을 축원, 찬양하게 하는 내용이 강제되었다.

이처럼 사찰령 체제는 식민지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고 정치권력에 불교가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본산 내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지게 된 본사 주지들을 중심으로 이를 불교의 합법화’ ‘은혜와 외호’ ‘새로운 발전의 동력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하였다. 1910년대에는 권력의 지원을 받는 불교의 중흥과 그로 인해 근대화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이들이 많았다. 이후 19158월에는 포교규칙이 공포되어 신도, 불도, 기독교, 유사종교로 종교를 분류하고 포교방법을 일률적으로 정하였다. 이를 통해 종교 간의 자격 신고와 허가를 의무화하여 총독부의 종교 관리와 통제를 합법화하였다.

1919년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불교계에서도 민족의식과 불교의 자주성에 눈을 뜬 선구적 활동가들이 등장하였다. 1920년대는 3.1운동을 계기로 총독부의 식민통치 기조가 군대와 경찰에 의한 강압적 무단통치 방식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됨에 따라 일시적으로 유화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총독부 학무국 내에 종교과가 신설되고 학무국이 총독 직속으로 승격되었으며, 종교단체를 중앙집권화하고 그 대표자들을 회유하여 민족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종교정책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각종 정치, 사회, 종교 단체 및 조직의 결성과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활동이 가능하였고 불교계도 그에 따라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제정된 종헌. 12장 31조로 구성된 이 종헌은 일제하 불교계가 스스로 정한 최초의 종헌으로써 불교의 자주, 자립을 통한 민족불교를 지향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하지만 사찰령과 사법(寺法) 등 일제가 규정한 법과 대응관계를 갖고 있었기에 실행에 많은 난관이 뒤따랐다. 사진=〈한국불교 100년〉(민족사)

1920년대 불교계 혁신운동의 동향은 다음과 같다.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지도자 33인에 들어간 한용운과 백용성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총책이자 재정모금 담당자인 월정사 출신 이종욱 등 대표주자들이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고 해외에서 승려 독립선언서도 발표되었다. 또한 진보적 청년승려들을 중심으로 1920년 조선불교청년회, 1921년 조선불교유신회가 설립되어 정교분립과 사찰령 철폐 논의가 공공연히 제기되었다. 하지만 교단의 중앙기구로 새로 만든 조선불교유신회 측의 총무원과 30본산 주지회의 측의 교무원이 서로 대립을 거듭하다가 1922년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교무원으로 통합되고 공식적 인가를 받았다. 또한 대표적 친일파와 일본인 유력자들이 모여 결성한 재단법인 조선불교단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1920년대에는 불교계에서 종교의 정치적 종속에 대한 강한 비판이 일었고 다양한 개혁론과 함께 혁신운동이 펼쳐졌다. 일본 유학승인 이영재는 <조선불교혁신론>(1922)에서 민주공화정 이념과 권력분립을 기조로 하는 혁신교단의 건설과 불교 근대화를 역설하였다. 이영재는 일본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에 입학하여 범어 등을 배웠고 유학생 기관지인 <금강저>를 편찬하기도 했다. 1910년대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백용성은 불교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펼쳤다. 그는 신불교운동 일환으로 대각교를 설립하였고 선과 계율의 전통을 계승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불교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식산운동을 벌였는데, 노농자립공동체 조직과 공장 설립 및 소비조합 운영은 교단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한용운도 산간에서 가두로, 승려에서 대중으로라는 표어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의 사회화, 대중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 불교운동가로 활동하며 사찰령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19224<동아일보>에 실린 기고문에서도 신교자유의 보편적 적용과 사찰령 폐지를 거듭 촉구하였다. 한용운은 사찰의 병합과 폐지, 승규 법식, 주지 취임, 부동산 처분 등의 제반사항에 대해 모두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함을 지적하며 총독을 불교의 로마 법왕(교황)에 비유하였다. 그러면서 불교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종교이므로 대우와 처리 법령이 동일해야 하는데, 기독교는 구미인이 관계되었기에 관대하게 대하고 불교는 약자의 모임이라서 자유를 구속하는 등 형평성에 맞지 않음을 비판하였다.

1921년에는 백용성, 송만공 등에 의해 선학원이 창립되어 전통 선수행의 계승과 중흥을 내세우며 독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연장선에서 선학원 측은 1935년에 전국 수좌대회를 열어 종규를 제정하고 종명으로 조선불교선종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한국불교의 자주적 종단 건립을 위한 노력은 1920년대 이후 계속되어 1929년에 열린 조선불교선교양종 전국승려대회에서 종헌을 제정하고 자율적 교정을 추구하였다. 이는 비록 총독부 승인을 받지는 못했지만 1931년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측에서 종헌의 실행을 촉구하며 사법 개정운동을 벌이는 등 정교분리와 불교의 자주화, 혁신을 위한 열망은 이어졌다. 한용운이 가담한 청년총동맹의 비밀결사조직인 만당의 활동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중국 본토 침탈이 본격화되었고,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선은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이에 1945년까지 전시체제기가 이어지면서 일제의 강압적 통치와 전시 총동원이 일상이 되었다. 당시 일본과 한국이 뿌리가 같으며 모두가 천황의 신민이라는 내선일체론이 횡행하였고 황국신민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일본에서는 1939년에 국민정신 진흥과 종교의 건전한 발달을 명목으로 하는 종교단체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국가질서와 신민의 의무에 위배되는 종교단체의 인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종교의 자유를 제약하고 국가의 종교탄압과 통제를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앞서 1938년에 시행된 국가총동원법과 함께 전시 통제와 총력동원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법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전반까지 불교계의 자주권 추구나 혁신운동 또한 급속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전시체제기에 모든 종교 및 사회단체를 동원하여 추진된 심전개발운동에 불교계 주류세력이 적극 동참하였다. 국민총동원에 의한 전쟁 수행과 황민화를 위한 심전개발운동은 천황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국체를 각인시키고 감사와 보은을 행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계몽 운동이었다. 이와 함께 전승기념 법회와 국방헌금 납부 등에도 불교계 지도층 인사와 여러 본사들이 나서서 적극 협력하였다.

교단 내부의 변화로 눈을 돌리자면, 1930년대 후반부터 총본산 건립운동이 가시화되면서 총독부의 암묵적 지원 하에 1941년 종명을 조계종, 총본사를 태고사로 하는 총본산 체제가 출범하였다. 이는 불교계의 오랜 숙원인 교단을 총괄하는 중앙 대표기관이 설립된 것이었지만 그 실상은 전시체제의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 불교계를 통합, 관리할 중앙기관이 필요함에 따라 허용된 것이었다. 총본산 체제는 종정이 행정권, 입법권을 가지고 총본사가 전국 본말사를 통괄, 감독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총독부가 불교계를 직접 통제하고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기제가 마련된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총본산 체제의 성립은 전시체제의 강화와 불교계의 총동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에서 총독부의 주관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중앙기관 설치를 통해 교단의 자율권을 추구한 불교계의 오랜 염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불교계 주류는 기독교, 천주교, 유교 등 다른 종교 및 사회단체와 마찬가지로 시국 강연, 학병 동원, 군수물자 기부 등에 발 벗고 나섰다. 황도불교를 지향하면서 사상과 종교 단속, 대중선동과 애국운동 등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황민화 정책과 국민총동원에 적극 협력했던 것이다. 이는 정치적 종속과 현상유지라고 하는 식민지 체제 불교의 속성이 더욱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말부터 문명개화의 근대화와 근대종교로서의 불교부흥을 내세우며 호교의 길로 매진했던 불교계는 식민지가 되면서 순응과 타협으로 일관하였다. 3.1운동 이후 불교계 혁신세력이 민족의식과 불교의 자주권을 각성하고 사찰령 폐지와 정교분리를 추진하였지만 식민지 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태생적 한계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1930년대 후반 이후 강화된 전시체제기에 정치권력으로의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고 황도불교로 표상되는 국가주의, 체제 지향의 색채 또한 더욱 짙어졌다. 이처럼 식민지 사찰령체제의 강고한 현실의 벽 앞에서 불교 자주화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신 정치적 굴종과 친일이라는 식민지 유산을 그대로 떠안은 채 19458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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