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불교역사서 찬술과 전통의 집성

역사서·족보 등 간행 급증
수요 따라 불교계에도 영향
삼보종찰 관념 형성 이뤄져

▲ 사진 : 19세기 들어 한국불교에는 삼보종찰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바로 조계산 송광사, 가야산 해인사, 영취산 통도사에 대해 각각 승보·법보·불보종찰 개념이 확립된 것이다. 사진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송광사 금강산림대법회, 팔만대장경 조사하는 해인사, 눈 내린 통도사 전경이다. 〈사진=송광사·통도사 홈페이지〉

조선후기에는 불교 전통에 대한 자료 집성과 불교사 인식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각종 전등 계보와 승전, 사찰의 역사를 담은 사지 등이 만들어졌고, 이들 불교역사서의 찬술은 대부분 18세기 후반 이후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는 북학과 서학을 필두로 하여 외래 신사조가 조선에 신속히 유입되었고 사상과 문예 등 여러 분야에서 전환기적 모색이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적으로 역사전통의 집성 작업이 활발히 일어났다. 즉 역사서, 백과전서식의 유서, 족보, 문집 등의 편찬 및 간행이 급증한 것이다. 이는 그에 대한 수요와 관심을 보여주는데 불교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후기에 나온 불교역사서 중 대표적인 책은 1764년 편양파 사암 채영이 편찬, 간행한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이다. 이는 현재까지 조선시대 불교의 법통, 법맥, 계파, 문파에 대한 일차적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과거 7불과 석가모니 이후 선의 심법을 전수한 인도, 중국의 선종 조사 법맥, 고려 말 태고 보우의 임제종 법맥 전래를 기점으로 하여 18세기 중반까지의 승려 계보를 수록해 놓았다. 그런데 해동불조원류라는 명칭에 맞지 않게 신라와 고려의 조사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뒷부분에 산성(散聖) 항목을 두어 몇몇 주요 인물만 간단히 소개하였다. 본문에는 태고 보우에서 시작하여 청허 휴정으로 이어지는 임제태고법통의 사승전법을 전면에 내세웠고 휴정과 부휴 선수 이후 조선후기 계문파의 법맥 계보를 정리하고 있다. 태고 보우를 해동불조의 원류로 보고 동시기에 마찬가지로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전수한 나옹 혜근과 그 계통을 소략하게나마 언급한 점에서 이 책의 불교사인식이 고려의 선종 전통보다 중화의 정통성에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불조원류는 조선후기의 법맥을 청허계와 부휴계의 양대 계파로 나누고 그로부터 분기된 문파별 전법 계보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부휴계는 적전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단일한 계보가 기재된 반면, 청허계는 편양파사명파소요파정관파의 4대 문파로 나누어 각각의 사승관계를 수록하였다. 그 중에서도 저자 채영이 속한 편양파의 서술 비중이 가장 큰데, 실제로 편양파는 조선후기 최대의 문파였다. 조선후기 승려들의 비문, 행장, 문집 서발문 등에 나타난 전법 사승의 계보를 확인해 보면 청허계 중에서도 편양파의 위상이 가장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11년의 사찰령본말사법에 의해 작성된 30본사의 등규 조항에서도 본사 주지가 될 수 있는 법맥 계통으로 청허계, 그중에서도 편양파에 한정한 경우가 주종을 이룬다. 채영이 각지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여러 문파의 공론을 모아 편찬, 간행한 불조원류1천여 질이 인쇄되어 제종에 유포되었다. 이 책은 당시 불교계의 공식 역사서로써의 위상을 가졌고 이후의 역사전통 인식도 이를 모태로 하여 생성되었다.

18세기 이후에는 계문파 별로 자파의 전통을 집성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일어났다. 사명 유정의 법맥을 계승한 사명파에서는 사명당지파근원록사명당승손세계도를 펴냈는데 전자는 쇠락한 사명파의 영고성쇠를 기록한다고 하였고 후자는 경상도 지역 사명파의 계보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소요파 또한 해동선파정전도를 만들었는데, 휴정의 법맥 계통을 편양 언기, 소요 태능, 무염 성정의 3파로 나누었고 그 중 소요파를 중심으로 계보를 정리하였다. 소요파 주류는 19세기에 전라도 대둔사, 미황사, 만덕사 일대를 주요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고 대흥보감이라는 책을 냈다. 대흥보감은 임제태고법통과 청허 휴정의 권위를 내세워 소요파의 정통성을 주장한 것으로, 편양파와 공조하여 만든 대흥사(대둔사)의 교학 전통을 강조하고 그에 대한 자파의 자부심을 표출하였다. 이 책에는 주로 소요파 조사들의 비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태고 보우 이후 휴정을 동방 7, 소요 태능을 동방 8조로 기재하였고 15조 아암 혜장을 거쳐 17조 철선 혜즙으로 이어지는 자파의 정통 계보를 수록하였다.

편양파에서도 전통의 집성 노력은 19세기 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1864년에 나온 설두 유형의 산사약초는 부처부터 인도, 중국의 조사, 조선의 불교사를 간략히 개괄한 책으로, 임제태고법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편양파의 계보 위주로 정리하였다. 이어 1894년에는 범해 각안이 동사열전을 펴냈는데,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19세기 후반까지 198인의 승려 전기를 모은 승전 사서이다. 수록된 인물의 상당수는 조선후기의 승려들이고 불조원류산사약초와 마찬가지로 편양파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대둔사 12대 종사와 강사, 그리고 법맥상 이들과 연결된 당대의 고승들이 대거 포함되었는데, 편찬자 각안이 대둔사 편양파 호의 시오, 초의 의순의 제자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시오와 의순은 정약용의 지도를 받아 대둔사지편찬에 참여하였고, 각안 또한 자파의 전통을 이어 불교사 집성에 관심을 가졌다.

부휴계 묵암 최눌도 18세기 후반에 과거 7, 인도와 중국의 역대 조사, 조선의 선맥을 도표로 그린 불조종파도를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중국 임제종 평산 처림의 법을 전해 받은 나옹 혜근도 언급되어 있지만 전법 계통의 주축은 임제종 석옥 청공에서 태고 보우-환암 혼수-귀곡 각운-등계 정심-벽송 지엄-부용 영관-부휴 선수로 이어지는 임제태고법통이었다. 여기서 눈에 띠는 것은 휴정 대신 부휴계의 조사 선수를 내세운 점이다. 그리고 부휴 선수에서 벽암 각성으로 전해진 법이 영해 약탄과 풍암 세찰을 거쳐 묵암 최눌과 응암 낭윤으로 계승되었다고 하여 부휴계 적전의 계보를 주류로 설정하였다. 이처럼 부휴계도 스스로의 계파의식을 명확히 드러내면서 불교사인식의 차별화를 꾀하였다.

근대에 들어 부휴계는 계파적 정체성을 담은 역사전통 인식을 더욱 강하게 표출하였다. 송광사 주지를 역임한 금명 보정이 펴낸 불조록찬송에서는 인도, 중국의 조사에 이어 해동신라열조’ ‘구산조사’ ‘해동열조’ ‘조계종사의 항목을 설정하고 한국불교사 전체에 걸친 역대 조사의 전기와 찬송을 수록하였다. 이 중 조계종사는 지눌 이후 수선사 16국사와 조계산 송광사를 본사로 한 부휴계 조사들의 계보를 망라해 놓은 것이다. 보정은 자파를 부휴종으로 칭하면서 지눌과 선수를 종조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조계종 정통론을 표방하였다. 그가 찬록한 조계고승전도 수선사 계통과 조선후기 부휴계 승려들의 전기를 대거 모아놓고 있다.

보정 또한 임제태고법통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송광사 부휴계의 독자성을 앞세운 조계종 인식을 표명하였다. 이는 불교의 역사전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1941년에 조계종이 조선불교 교단의 공식 명칭으로 정해졌고, 이후 현재까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명으로 확고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정의 조계종명 발굴과 제창은 중요한 불교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정통주의에 입각한 불교 법통이 확립되고 그에 토대를 둔 불교사 인식이 확산되었다. 각 문파에서 자파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의 집성을 모색한 사실은 유학의 도통론이나 학파와 정파를 매개로 하는 역사인식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한편 유학자의 불교인식이 역사서를 통해 드러난 사례도 있다. 저자 미상의 동국승니록은 신라, 고려의 승려들과 조선 중기 휴정, 유정 등의 간략한 행장을 수록하고 사상 내용을 소개한 일종의 고승전이다. 이 책에는 1794년에 건립된 묘향산 수충사가 기재되어 있어 그 이후에 만들어진 책으로 추정된다. 항목 구성은 명승’ ‘니고(尼枯)’ ‘시승(詩僧)’ ‘역승’ ‘간승의 순서로 되어있다. ‘역승은 고려 공민왕대의 신돈, ‘간승은 명종대의 양종복립을 주도한 허응 보우로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유학자가 불교사서 편찬에 직접 관여한 예는 호남에서 고증학적 훈도를 펼친 정약용의 경우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같은 시기에 한치윤이 지은 해동역사석지항목에 불교사가 일부 다루어지기도 했지만, 정약용은 유배지 인근 대둔사와 만덕사의 사지인 대둔사지만덕사지의 편찬을 지도하였다. 대둔사지는 편양파 완호 윤우, 초의 의순, 소요파의 아암 혜장 등이 공동으로 편찬한 책으로 1820년대 전반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이들 연담 유일의 문손들 및 아암 혜장과 밀접한 교류를 하였고 학문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실 가운데 하나인 대둔사지는 고증학의 특징인 실증과 사료비판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했던 소요파 승려들은 근거지였던 만덕사(백련사)만덕사지를 편찬하기도 했다. 한편 유일의 숙부격인 함월 해원도 석왕사지를 펴냈고 이 책은 19세기 초에 간행되었다. 이처럼 각지의 사찰에서 자사의 역사를 모은 사지의 편찬을 시도하였는데, 사지 또한 불교 역사전통 집성의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불교 개념과 이론을 정리한 유서 형식의 책은 연담 유일의 석전유해가 대표적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김창협의 동생이자 불교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가졌던 김창흡의 시문집에서 불교 용어를 발췌해 해설한 삼연선생시집중용불어해가 실려 있고, 또 선조대의 문장가인 신흠의 불가경의설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와 같은 일반 유서에도 불교 기문과 용어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 있다. 18세기 후반 이후 나타난 독특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승려가 자신의 전기를 직접 쓰는 자전 형태가 늘어난 것인데, 역사 서술에 관심이 높았던 연담 유일, 초의 의순, 범해 각안 등이 상세한 개인사를 남겼다.

이 시기 불교사 인식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삼보종찰 관념의 형성이었다. 종찰은 교단의 상징적 구심체로서 큰 의미를 갖는데, 삼보종찰 관념은 늦어도 19세기에 들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의 경우 17세기 이후 16국사에 대한 자부심을 표명하였고 19세기에는 승보사찰로 인지되었다. 그리고 그 권위를 내세워 삼한국의 조실’, ‘삼보종의 복전으로 칭하기도 했다. 동사열전의 편자 범해 각안도 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 사찰을 유력하는 과정에서 조계, 가야, 취령의 종찰을 순례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조계산 송광사, 가야산 해인사, 영취산 통도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각각 승보, 법보, 불보 종찰이었다. 1899년에 고종은 칙명으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3부 인쇄하여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에 각각 안치하게 하였는데, 이 또한 삼보종찰 관념의 성립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일이었다. 1911년에 세워진 임제종의 경우에도 종무원은 범어사에 있었지만 본사는 이들 삼보사찰에 두어졌고, 총독부의 본말사법에서도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는 각각 불찰대본산, 법찰대본산, 승찰대본산으로 규정되었다. 이처럼 삼보사찰의 확립은 불교 전통의 위상과 역사적 권위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고, 역사전통의 집성 노력이 활발히 일어난 18세기 이후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