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문명개화와 불교 근대화

불교 억압 상징 도성출입 해제 후
일본불교 추종하며 근대화 꿈 꿔
전통 벗어나 대중화 노력했지만
식민지 체제에 대한 저항 안 보여

▲ 1915년 6월 20일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개최된 불교진흥회 제1회 정기총회에 모인 불교계 인사들. 사진=〈한국불교 100년〉(민족사)

19세기는 정치사회적 위기의 시대였고 현실적 변혁 요구와 함께 종교적 갈망이 강하게 분출한 시기였다. 조선적 전통의 일부였던 불교도 서학과 동학, 기독교와 신흥종교의 발흥에 맞서야 했고 여러 계층에 걸친 신앙활동과 결사운동이 행해졌다. 그렇지만 불교는 시대적 과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고, 스스로의 가치를 성찰할 겨를도 없이 근대화의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개국과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은 1867년 메이지유신 단행 후 서양을 답습한 제국주의의 길을 걸어 나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의 개항을 유도한 일본은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였고 1895년 타이완, 1910년에는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일본은 메이지 초기에 천황제와 그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해 신도(神道)의 국교화와 폐불훼석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일본불교계는 국가불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고, 정치군사적 침투와 동반하여 일본불교의 조선 진출이 가시화되었다. 1878년 개항장인 부산에 정토진종 오타니파 혼간지의 별원이 세워졌고 일련종, 정토종, 진언종, 조동종, 임제종 등 일본불교 각 종파들이 앞 다투어 승려를 파견하고 별원과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는 문명개화를 적극 추진하였고 근대종교로 살아남기 위한 활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불교의 혁신은 구태의연한 전통을 폐기하고 근대의 신시대를 꿈꾸는 것이었고, 문명개화는 서구화나 근대화를 통한 종교적 부흥을 의미하였다. 19세기 말 이후 제기된 문명개화론에서 기독교는 서양문명의 정수를 담은 근대종교의 총아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교육, 의료 등 근대문명의 상징기제와 함께 이식, 수용되었다. 이에 조선불교계는 기독교의 선진적 문화이식과 전도방식을 모델로 한 일본불교의 적대적 변용의 길을 그대로 모방하고 답습하였다. 근대의 불교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눈을 뜬 이는 승려 이동인이었다. 그는 187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교류하면서 김옥균 등 조선의 젊은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근대문명을 소개해주었다. 그는 또 일본의 근대화 정책을 시찰하러 간 조선정부 사절단과 일본 정치계 인사와의 교섭, 미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95년에는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 젠레이의 주청을 계기로 이전 시대 불교 억압의 상징이었던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조치가 해제되었다. 승려의 도성출입 허용에 대한 논의는 종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이전부터 제기되었지만,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상황에서 일본불교의 포교와 조선불교의 포섭을 위한 해제 건의가 때마침 수용된 것이었다. 이에 조선불교계는 오랜 숙원이 해소되고 불교중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하여 감사와 환영의 뜻을 표시하였다. 당시 일본불교의 적극적 포교활동과 시혜적 접근은 불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조선 진출 후 애국호법과 기독교 방어 문제에서 조선승려들의 공감을 샀다고 하는데, 서양 선교사와 기독교회가 교육, 의료 등을 매개로 조선사회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시기에 일본불교의 추종과 모방은 문명개화와 종교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첩경으로 인식되었다.

▲ 〈조선불교월보〉 1호(1912년 2월 25일자)에 게재된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 1911년 6월 3일에 공포되고 동년 9월부터 시행된 사찰령은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일제가 제정한 법이었다.
19세기 말부터 불교계와 정부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 가시화되었다. 1899년에는 서울 동대문 밖에 원흥사가 창건되어 전국 수사찰로 칭해졌고, 19024월에는 국가에서 불교를 직접 관리, 통제하는 방향의 정책전환이 이루어졌다. 즉 궁내부 칙령에 의해 원흥사를 대법산으로 삼아 정부기구인 사사관리서가 설치되고 도섭리가 파견되었으며 지방에 16개의 중법산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편제하였다. 또 관리법규인 대한제국 사찰령 36조가 반포되었는데, 이는 사찰재산의 국가 관리와 정식 승려자격을 부여하는 도첩제의 시행을 골자로 하였다. 사찰령에서는 유교적인 효와 충, 왕법의 준수와 같은 8개의 종칙이 규정되었고 정치 참여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이는 일본과 같은 국가불교적 색채를 띠는 한편 형식적으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수용한 근대적 종교정책을 시행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적 개입이 노골화되면서 1904년에 들어 사사관리서와 사찰령 체제는 혁파되었다. 대신 1905년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1906년에는 일본불교의 한국사찰 관리 허용을 골자로 하는 사찰관리세칙이 시행되었다. 이에 일부 사찰은 일본불교의 지원과 관리를 통해 사격을 높이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통감부의 허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1906년에는 일본 정토종의 후원으로 이보담과 홍월초가 주도한 불교연구회가 만들어졌고 최초의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가 세워졌다. 현재 동국대의 전신인 명진학교에서는 전국사찰에서 승려 학생을 선발하여 불교와 신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에는 전국의 사찰 대표 52명이 모여 불교계를 대표하는 통합종단 원종이 창설되었으며 서울 도심 내에 각황사가 창건되었다. 원종의 초대 종정으로는 해인사 출신으로 명망이 높았던 이회광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불교개혁과 종단의 발전방향을 조언해 준 이는 일본 조동종의 한국포교사인 다케다 한시였다. 다케다는 철저한 국가주의자로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도 가담하였고 일진회 같은 친일 정치단체의 고문을 맡는 등 식민지배의 포석을 까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처럼 일본불교계의 외호와 후원, 지도는 당시의 불교계를 각성시키고 문명개화와 근대화의 열망을 충족시켜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불교에 대한 경계심을 없애고 우호심리를 확산시켜 제국주의 침탈의 첨병 역할을 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대의 불교계는 총독부 체제에 순응하고 타협하는 한편 불교 개혁과 근대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대중적 불교잡지의 간행, 불서의 한글번역과 출판, 다양한 개혁론의 제기는 문명개화를 위한 불교계의 열망을 잘 보여준다. 이와 함께 불교 대중화를 위해 각지에 포교당 개설이 추진되었고 보통학교-지방학림-중앙학림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불교 교육체계가 성립되었다. 이처럼 불교계는 문명의 신시대에 적응하고 근대종교로 살아남기 위한 제도 개선과 혁신을 추진하였고 그 방향은 불교의 대중화, 사회화, 현대화였다.

1910년대에 나온 개혁 논의와 혁신의 방안을 살펴보자. 우선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1913)에서 당시 크게 유행하던 문명개화론과 사회진화론에 의거해 불교야말로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수준 높은 사유체계이므로 근대의 종교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향후 도덕문명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불교의 평등주의, 중생제도의 대중주의를 각별히 강조하였다. 다만 조선불교의 오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단순한 개량만 가지고는 안 되며 자각을 통해 구습을 타파하고 유신을 단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불교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대적 교육이 절실하며 해외유학을 통해 사상의 자유를 배워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앞서 한용운이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여 불교 부흥과 사회화를 촉구할 것을 당국에 청원한 것도 이러한 근대화론, 발전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불교, 역사,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권상로도 조선불교개혁론’(1912)에서 진화론에 입각한 종교경쟁 시대에 조선불교의 구태와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는 전통적인 불교를 의타적, 순종적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하였고 과거의 구습이자 타파의 대상으로 보았다. 근대기의 저명한 선승인 백용성도 귀원정종(1910)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타종교의 성행을 의식하면서 불교의 낙후된 현실을 개탄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전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했던 것과는 달리 백용성은 선종의 특색을 드러내고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제시하는 것이 올바른 유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1910년대의 불교 개혁 논의는 사회진화론 등을 수용하여 종교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신과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민족의식보다는 호교론적 입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이전 시대에 불교가 핍박을 받았던 것에 비해 근대에 들어와 새로운 활력을 찾고 신시대의 종교적 활로 모색이 가능해졌다는 현실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개혁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1910년대 초는 합방 직후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사찰령 등 총독부 정책에 대한 정치적 반발과 부정을 전면에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신 불교계는 정치권력에 순응하고 타협으로 일관하면서 탈전통과 근대성 추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불교계는 조선의 불교전통 계승보다는 문명개화의 근대적 지향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불교가 가지는 근대성의 원형에 주목하였다. 즉 근대종교로서 불교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 대중화, 사회화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반면 민족주의나 정치적 각성은 부재하였고 식민지 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 또한 거의 보이지 않았다. 특히 30본사 주지 등 교단 주도층은 정치권력에 순종하면서 교단과 사찰 내에서의 기득권 유지에 몰두하였다. 불교계에서 사찰령 체제에 대한 강한 불만이 제기되고 정교분리와 교단의 자율권이 추구된 것은 3.1운동을 겪은 후인 1920년대부터였다.

불교는 유교로 대표되는 주류적 질서에 비해 전통에서 큰 지분을 갖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문명개화의 신시대가 도래하였을 때 탈전통의 호교론적 변신을 보다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적 전통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나 부채의식도 없는 비주류적, 단절적 인식은 자기정체성의 심각한 혼란과 부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구태를 벗어던지고 근대 선진종교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호교론적 열망 자체는 긍정적인 것이었지만, 내적 성찰과 근대성의 체화 없는 외형적 변모나 모방만으로는 주체적 근대화를 달성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물론 이는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한국근대사의 몰주체적 지형과 식민지 체제의 태생적,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구문명의 후광을 등에 업은 기독교나 민족정서에 부응한 천도교, 주류 전통인 유교에 비해 불교는 전통과 근대 어느 쪽에서도 정당한 지분을 갖기 어려웠다. 근대종교로서 자립하기 위한 문명개화의 여정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식민지 사찰령과 같은 현실의 거대한 장벽이 불교의 앞길에 가로놓여 있었다. 불교는 종교적 활로를 찾아 민중과 사회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했지만 호국보다는 호교에 치중한 전략이 식민지 체제 하의 정치적 종속을 겪으면서 주체적 근대화, 대중화를 위시한 호교의 길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