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유불 교류와 심성의 교차

학승-유학자, 사상적 교감
심성 논쟁 두고 설왕설래
불교 옹호론 유학계 등장해
西學 대비한 새 가치 모색

성리학이 정치와 사상, 사회와 문화를 주도한 조선시대에도 유학자와 고승 사이의 인적지적 교류는 지속되었다. 유교사회에서 유불의 접점을 찾기 위한 불교 측의 노력도 계속되어 일심을 매개로 한 유불도 삼교의 합일이 주장되었고, 유교의 성즉리(性卽理)’에 대비되는 심즉리(心卽理)’의 심성 이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일반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승려들의 문집이 대거 간행되었고, 각 문파에서 고위 관료와 유명 문사들에게 비문을 의뢰하여 고승의 비가 다수 세워졌다.

조선시대 학승들은 대개 유학에 대한 기본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명사들과 시문을 주고받거나 사상적 교류를 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청허 휴정도 출가 전에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유불도의 요체를 정리한 삼가귀감을 남겼다. 휴정은 당대의 명유였던 남명 조식, 고봉 기대승 등과 시문을 교류하였고, 이후 그의 비문과 문집 서문을 한문 4대가로 유명한 이정구, 이식, 장유 등이 지었다. 휴정의 제자 사명 유정도 삼정승을 역임한 노수신에게 노자와 장자, 시를 배웠다. 유정이 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전후 처리 및 국교 재개를 위해 사신으로 갈 때는 당시의 고위관료들이 송별시를 쓰기도 했다. 조선후기에는 더욱 많은 승려들이 유학자와 인적 교류를 하였고 승려의 비문과 문집 서문 및 발문을 사대부와 고관들이 지어 주었다.

▲ 조선시대 고승들은 유학자들과 끊임없이 사상적 교류를 했다.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명대사(사진 왼쪽)와 절친했던 친불적 성향의 유학자 허균(사진 오른쪽)은 유불병행론을 주장했다.

유학자 중에서도 불교사상에 정통하거나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았고, 승려와 친분을 맺으면서 시문 등을 교류한 명망가도 적지 않았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율곡 이이는 10대 후반에 모친 신사임당의 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입산하여 1년간 불교를 공부하였다. 그는 불교의 묘처가 유교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유교를 버리고 불교에서 구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산을 내려왔지만, 저술인 성학집요에서 윤회 등의 허무맹랑한 설은 문제라고 하면서도 불교의 심성론 자체는 정치하다고 평가하였다.

사명 유정과 절친한 관계였고 법통설을 제기하는 등 친불적인 유학자 관료였던 허균도 위로는 유학을 높여 사대부의 습속을 맑게 하고, 아래로는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치게 되면 고르게 다스려질 것이다는 유불 병행론을 주장하였다. 실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이수광은 불교의 즉심견성(卽心見性)’과 유교의 존심명리(存心明理)’는 마음의 작용이 같지 않고 근원 또한 같지 않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주저인 지봉유설에서는 이단은 유학의 도에 해가 되지만 한편 이익도 있다. 불교의 견심은 마음을 놓는 자의 경계가 되고 살생을 금하는 것은 죽이기 좋아하는 자의 경계가 된다고 하여 윤리적 측면에서 불교의 효용가치를 인정하였다.

한편 17세기 중반 팔도도총섭을 지낸 백곡 처능이 올린 장문의 상소문인 간폐석교소처럼 불교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반박한 호불론도 제기되었다. 처능은 불교에 대한 당시의 비판 내용에 대해 중국과 인도의 공간적 차이, 중국 삼대의 전성시대 이후 불교가 생겨나 들어왔다는 시간적 차이, 인과응보와 윤회설의 허망함, 경제적 해악, 정교의 손상 등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불교의 역할과 효용성을 강조하였다. 18세기 후반의 연담 유일은 조선유학의 대의명분론과 중화주의 사조를 수용하는 한편 당시 유학자의 불교 인식에 대해 재비판하였다. 그는 중국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불교를 깊이 탐구하여 유불이 근본에서 같음을 알았고 승려들과 이치와 자성에 대해 논의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성리학을 만든 주자도 선승의 영향으로 심법의 요체를 깨닫고 불교에서 얻은 바가 적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의 유학자들은 불교를 단지 허무하다는 이유로 비판하지만 당시 과거시험에만 전념하는 유자들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고 나무랐다. 유일은 불교 심성론과 수행의 우수성을 강조하였고 윤회나 인과설에 대해서도 마음의 본성과 작용의 관계를 들어 해명하였다.

▲ 17세기 중반 간행된 불교의례집 〈석문가례초〉, 〈석문상의초〉, 〈승가예의문〉.

한편 17세기 중반에는 석문상의초, 석문가례초, 승가예의문과 같은 불교 의례집이 집중적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들의 서문에는 조선에는 불가의 상례에 대한 근본이 없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것은 규범에 맞지 않는다. 선원청규등 불교 상례의에 의거하고 있지만 중국의 법이 조선의 예와 맞지 않으므로 그 요점만 간추린다고 되어있고, 세속의 예인 주자가례를 취해 선원청규등에 빠진 내용을 보충하고 그 절요를 간추린다며 간행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이들 불교 의례집에서는 주자가례에 의거해 상복을 입는 기간인 오복제를 도입하여 세속의 친족과 같이 승려 사제 간의 멀고 가까운 관계를 촌수로 규정해 놓고 있다. 17세기에는 불교계의 문파가 형성되고 법맥을 이은 사제 간의 결속과 제사 등 상제례의 비중이 커졌다. 또한 승려의 사유 전답을 제자와 친족에게 상속하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해짐에 따라 사제 간의 인적 관계망이 상례 위주의 의례집에 반영된 것이다.

이와 함께 조선후기에는 불교 심성에 관한 논의도 심화되었다. 17세기에 운봉 대지가 쓴 심성론은 불교의 전통적 심성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여기서는 일심=여래장=불성을 전제로 =의 관점에서 진심과 자성이 곧 부처이며 법이라는 진심즉성(眞心卽性)’을 강조하였다. 대지는 사람들 각각의 법신은 결국 하나라는 당시의 주장을 비판하며 사람들 각각은 원만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 18세기에는 대둔사 편양파 종장 연담 유일과 송광사 부휴계의 적전 묵암 최눌 사이에 심성 논쟁이 펼쳐졌다.

양자의 논쟁을 담은 심성론3권은 저자인 최눌의 문도들이 불태웠지만, 유일이 쓴 서문이 남아있어 그 요체를 파악할 수 있다. 유일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따로 원만하게 있지만 본래는 하나이다는 입장을 개진하였고, 최눌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따로 원만하며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다는 주장을 펼쳤다. 전자는 일심이 현상의 각 개체에 현현하여 각기 원만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부처와 중생의 마음이 각각 그 자체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각 개체의 본성 자체를 중시한 것이었다. 이는 이치와 현상의 체용불이(體用不二)’적 관점의 성기(性起)와 현상 및 개체의 상대적 관계를 중시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 화엄의 법계관(法界觀)을 통해 이해하면, 전자는 리()의 본래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고 후자는 사()의 독립성을 중시한 것으로 이사무애와 사사무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심성에 관한 논의는 18세기 사상계를 풍미하였던 호락논쟁과 같은 이기심성 논변과 공통점을 가진다. 부처와 중생의 마음, 성인과 범인의 일원성과 다원성에 대한 관계 규정은 호락논쟁에서 인성과 물성, 성심과 범심이 같은지 다른지의 논의와 대비된다. 즉 천리의 궁극성과 이와 기의 관계성에 따른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관한 입장 차이와 관련이 있다. 마음의 본체, 원리와 현상에 대한 해석은 불교와 성리학 모두의 공통 관심사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심학과 이학의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본성에 내재된 리의 절대성을 근거로 불교의 심 이해에 대해 상대주의 또는 허무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비해 일심의 본원성을 내세운 심즉리의 구도 하에서 일원적 절대성과 다원적 상대성을 논한 것은, ‘성즉리를 전제로 한 본연지성의 절대성과 기질지성의 차별성 논의에 대응되는 불교적 논리의 개진이었다. 나아가 이는 불교의 일심과 유교의 천리의 접목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19세기에는 청으로부터 들어온 고증학 및 서양 학문의 영향으로 사상계의 분위기가 다변화되는 한편, 조선의 사상전통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었다. 고증학의 영향으로 주석과 해석을 담은 백과전서 형태의 책들이 다수 편찬되었고, 실학의 거두인 다산 정약용의 훈도에 의해 불교계에서도 사찰의 역사서인 사지가 사료 고증을 거쳐 편술되었다.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심화되어 청의 최신 학풍을 전해온 추사 김정희의 경우 불교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다. 그는 선 논쟁에 직접 참여하여 선의 폐해를 지적하고 교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정희는 초의 의순, 백파 긍선 등과 많은 서신을 왕래하고 교류하면서 선사상과 불교 교리에 대해 논변하였다. 대둔사의 초의 의순은 김정희의 학예일치적 학풍에서 영향을 받아 다도와 서화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하였다. 또 백파 긍선이 선 수행을 실천하기 위해 결사를 조직할 때 쓴 글에는 명문가 출신의 고관과 노사 기정진과 같은 저명 성리학자가 직접 서문을 지었다. 이처럼 19세기에는 유교와 불교를 엄격히 구분하기보다는 새로 유입된 서양 학문에 대비되는 조선적 전통의 정수로서 특정한 사상적 의미를 찾고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모색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가족윤리와 예제, 친족관계와 상속의 룰 등 다양한 측면에서 본격적인 유교사회로 접어든 것으로 평가되는 조선후기에 불교가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은 물론 일반민의 신앙으로써 불교의 종교적 위상과 비중이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은 16세기 후반 이후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정치적으로는 성리학에 정통한 사림세력이 지방사회와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고, 사회적으로는 유교적 종법과 부계 중심의 혈연인식이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 유교식 상례와 제례가 일반민에까지 보급되면서 유교적 질서가 기층까지 확산되었다. 이는 불교적 내세관과 의례가 가져왔던 전통적 지분을 상당부분 잠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세의 기원과 추복이라는 불교의 종교적 효용성은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유교만으로 완전히 대체할 수 없었다.

또한 사상적 측면에서도 성리학이 주류질서를 장악한 조선후기에 유교의 이기심성론에 대응되는 불교사상으로서 심성론이 제기되고 화엄교학이 주목되었다. 성리학은 선종이 마음의 작용을 절대시하고 심을 성으로 잘못 이해한다는 비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맞서 심성에 대한 불교의 철학적 입장을 개진하기 위해 화엄의 이와 사의 법계, 성기와 연기, 불성과 중생심의 일즉다 다즉일과 같은 이론적, 개념적 무기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불교 측에서 심성론과 같은 책이 나오고 심성과 관련된 논쟁이 일어난 것, 화엄교학이 성행한 것은 유불교류의 진화된 모습과 양자의 접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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