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임제법통 성립과 문파 형성

17세기 전반 ‘임제태고법통’ 정립
한국불교 정체성, ‘선종’ 자리매김
청허, 부휴계 문파가 먼저 형성돼

법통, 유교 ‘도통론’과 유사 구조
당시 시대상·역사인식 그대로 담겨

대흥사 부도밭.
조선불교의 전통과 법맥에 대한 인식이 최초로 표명된 것은 17세기 전반으로 이때 확정된 것이 바로 ‘임제태고법통’이었다. 이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선종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당시 공인된 법맥 계보는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임제법통에 내재된 불교사 인식은 당대의 시대상과 역사의식을 투영한 것이었고, 앞서 정립된 사림의 도통론과 정통주의라는 면에서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한편 17세기 전반에는 청허 휴정(1520~1604)과 동문 부휴 선수(1543~1615)의 계보를 이은 청허계와 부휴계의 계파 및 문파가 형성되었다. 비슷한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조직화된 문파의 형성에 촉매제가 된 것이, 바로 동일한 법맥 계보임을 선포한 법통의 성립이었다.

조선후기 불교의 사상 및 수행체계를 제시하고 방향을 연 청허 휴정은, 조사인 벽송 지엄, 자신의 전법사 부용 영관과 수계사 경성 일선의 행적을 다룬 〈삼로행적〉에서 법맥 계보에 대한 인식을 표명하였다. 즉 벽송 지엄이 간화선을 주창한 송의 대혜 종고와 원의 임제종 선승 고봉 원묘를 멀리 이었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대사가 해외의 사람으로서 5백 년 전의 종파를 은밀하게 이었으니 이는 유교의 정자와 주자가 천년 뒤에 나와 멀리 공자와 맹자를 이은 것과 같다. 유자나 승려나 도를 전하는 데 있어서는 같다”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지엄은 실제로 〈대혜어록〉을 보고 의심을 깨뜨렸고 〈고봉선요〉을 통해 지해를 떨쳐냈다고 하며, 이는 이들에 대한 법맥 계승인식이 나오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휴정은 지엄이 “연희 교사로부터 원돈의 교의를, 정심 선사로부터 서래의 밀지를 배우고 깨쳤다”고 기록하였지만, 임제종 간화선풍의 계승을 강조하였을 뿐 정심 이전의 법맥 전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1604년 휴정이 입적하고 1610년 사명 유정(1544~1610)의 입적을 계기로 1612년에 허균이 쓴 최초의 법통설이 나왔다. 이는 유정의 유촉에 의해 그의 문도들이 주도한 것으로, 유학자 관료이자 〈홍길동전〉의 저자이기도 했던 허균은 유정과 매우 가까운 독실한 불자였다. 허균의 법통설은 법안종, 임제종, 조동종 등 고려시대의 다양한 선종 전통과 보조 지눌을 강조하였고 이어 고려 말 나옹 혜근(1320~1376)이 중국의 평산 처림에게 전수해 온 임제종 법맥이 휴정에게 이어졌다는 ‘고려나옹법통’이었다.

하지만 1618년 허균이 역모죄로 죽은 후, 1625년부터 1640년까지 휴정의 말년제자 편양 언기(1581~1644)가 주도하여 새로운 법통설이 제기되었다. 이는 고려의 선종 전통을 배제하고 고려 말 태고 보우(1301~1382)가 원의 석옥 청공에게 전수받은 임제종 법맥을 정통으로 내세운 ‘임제태고법통’이었다. 그 법맥 계보는 석옥 청공-태고 보우-환암 혼수-귀곡 각운-벽계 정심-벽송 지엄-부용 영관-청허 휴정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 임제태고법통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에도 반영되어, 선종의 초조 도의, 조계종 중천조 보조 지눌, 법통상의 중흥조 태고 보우라는 종조 인식으로 나타나 있다. 임제태고법통은 한문 4대가를 비롯한 당대의 명문장가, 또는 고위관료에게 언기가 글을 부탁하여 새로 만든 휴정의 비와 문집 서문에 명시되었다. 또한 유정의 문손들을 비롯한 여러 산문의 공의를 모으는 노력 끝에 당시 불교계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법통설이 제기된 17세기 전반은 명청 교체기로 불리는 동아시아 중화질서의 체제 전환기였다. 조선에서는 1623년 광해군의 패륜과 명에 대한 ‘재조지은’ 위배를 명분으로 내세운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화이론에 입각한 의리명분론이 시대사조로써 일세를 풍미하였다. 당시 불교계에서도 “조선에 은택이 미쳐 상서로움과 복을 일으키고 명 황실을 영원토록 돕기를 기원”하였고, 병자호란 직후 청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환국을 비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이처럼 명분과 정통론이 강조된 시대 분위기에서 중화의 정통 계승을 표명한 법통인식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서산대사 비문
법통에는 중국불교의 정수인 임제법통을 조선불교가 계승한다는 정통론적 인식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점은 당시 정립되어 있던 유교의 도통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집권세력이었던 사림의 공식 역사인식인 도통론은 송의 주자 성리학이 원대에 고려로 전해졌고 이후 그 도통이 재야의 학맥을 통해 당시까지 이어져왔다는 중화 정통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역성혁명을 반대한 정몽주-길재의 계보를 내세운 사림의 도통론은 16세기 중반 이황 등에 의해 정립되었다. 또한 선조대에 들어 유교 명현에 대한 문묘종사 논의가 제기되었고 광해군 초인 1610년에 유교 5현이 문묘에 종사되기에 이르렀다. 지방의 서원에서도 조선의 명현을 추숭하고 제향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는데, 같은 시기에 불교에서도 법맥상의 조사를 향사하고 현창하는 사례들이 빈번히 나타났다.

법통은 도통론에서 조선 개창세력 대신 재야의 도학 전수를 정통으로 본 것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즉 조선 초에 왕실이나 훈척과 연계되어 중앙무대에서 활동했던 무학 자초, 함허 기화, 신미와 수미, 학열과 학조 등 나옹계 주류가 배제되었다. 대신 귀곡 각운과 같은 비주류 계보를 내세워 100년 이상의 시간차가 나는 벽계 정심과 사승관계를 연결시키는 일종의 무리수를 두었다. 이는 도통론에서 드러난, 훈척세력을 배제한 사림의 재야 중심의 계보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이처럼 법통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법통의 정립은 교단의 조직화와 정체성 공유를 전제로 하는 계파 및 문파의 형성과 연동되는 문제였다. 또한 문파의 형성은 법통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시대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임진왜란 이후 피폐화된 향촌사회의 지배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과정에서, 사족을 중심으로 부계 위주의 유교적, 종법적 친족체제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에 유력한 가문들에서 문중 조직과 종족촌(집성촌), 족분(선산) 등이 만들어졌고 가문의식이 강조되었다. 또한 가부장적 친족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자가례〉에 의거한 예학이 중시되었고 족보 편찬이 성행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앞서 전쟁을 치르며 조직화된 불교 교단에서도 임제법통의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동일한 법맥의 계승을 골자로 하는 계보와 문파가 형성된 것이다.

조선후기 불교교단은 청허 휴정의 청허계와 부휴 선수의 부휴계, 양대 계파로 이루어졌다. 이 중 명종대에 승과를 거쳐 선교양종 판사를 겸임하고 임진왜란 때 팔도도총섭으로 의승군을 이끌었던 휴정의 높은 위상으로 인해 청허계의 규모와 비중이 훨씬 컸다. 18세기 후반에 나온 ‘해동불조원류’에는 전법을 기준으로 한 청허계와 부휴계의 계보가 망라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청허계는 편양문파, 사명문파, 소요문파, 정관문파의 4대 문파로 구성되었다. 편양 언기(1581~1644)를 조사로 하는 편양파는 최대 문파로서 휴정의 입적지인 묘향산과 금강산 등 북방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주류계보의 고승들이 호남과 영남 등 남방까지 진출하면서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휴정의 적전이자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했던 사명 유정(1544~1610)의 사명파는 17세기 전반까지는 청허계 대표문파의 위상을 가졌다.

하지만 금강산 일대와 영남지역을 세력권으로 한 사명파는 18세기 이후 점차 약화되었다. 소요 태능(1562~1649)의 소요파와 정관 일선(1533~1608)의 정관파는 처음부터 지리산과 호남을 주된 근거지로 하였고, 특히 소요파는 19세기까지도 문파의 정체성을 이어나갔다.

부휴계는 선수 당대에는 청허계와 다른 계파적 독자성을 내세우지 않았고 부용 영관 문하의 동문 의식이 보다 강하였다. 하지만 선수의 적전 벽암 각성(1575~1660)이 초대 남한산성 팔도도총섭을 역임하고 화엄사, 쌍계사, 법주사 등을 중창하면서 계파의 물적 토대와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부휴계는 1609년 순천 송광사 중창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하여 이후 송광사를 본산으로 삼았고, 호남을 거점으로 해서 호서와 영남 일부까지도 세력을 미쳤다. 백암 성총(1631~1700) 대에 와서는 송광사 창건주인 보조 지눌(1158~1210)의 보조유풍을 선양하며 계파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고, 선수부터 부휴계 적전의 탑이 이후 송광사 부도전에 세워지게 되었다.

문파의 형성이나 법통의 성립은 법맥 전수가 사승관계에서 가장 일차적인 요인으로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국가에서 공인한 종단이나 종파가 존재했던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에는 소속 종파와 사찰의 수계사, 득도사가 사제 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는 법통의 정립과 궤를 같이 하여 법을 전해 준 전법사의 위상이 매우 높아진 전법의 시대였다. 이는 도첩 수여와 승적 관리에 대한 법제적 규정이 없어진 상태에서 법맥을 통한 문파 내의 사승관계가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방증한다.
 
17세기 중엽에 나온 불교 상례집에서 스승의 상례기간에 대해 전법스승에 해당하는 수업사와 양육사를 가장 긴 3년으로 규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물론 과도기적 현상도 보이는데, 휴정이 전법사 영관과 수계사 일선을 모두 똑같은 스승으로 모셨고 또 일선을 이어 묘향산 보현사에 주석하다가 입적한 것도 수계사에서 전법사로 완전히 이행되기 직전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사명 유정의 경우에도 전법 스승인 휴정을 빼고 득도사였던 직지사의 신묵만 스승으로 기재한 후대의 사명파 계보도가 전한다.

계파와 문파의 정립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법맥에 대한 공통인식을 전제로 한다. 17세기 전반에 확립된 임제법통은 선종으로서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대내외에 표명한 것이었다. 이로써 16세기 전반의 법제적 폐불 상황에서 실제로 단절되다시피 했던 전법계보를 되살리면서 중국 임제종의 정통을 잇는다는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법통의 내용은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를 지향한 휴정의 사상 및 수행체계와도 부합하였다. 법통의 성립은 법맥을 공유하는 계파와 문파의 형성과 맞물려 돌아갔고, 문파별로 근거 사찰, 활동 지역이 정해지고 사제 간의 법맥 전수와 경제적 상속이 동시에 가능해졌다. 즉 출가와 득도, 전법뿐 아니라 사찰 및 재정 기반의 계승도 법맥으로 연계된 사제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법맥과 법통을 매개로 한 문파와 근거 사찰의 성립, 사유 재산의 상속은 조선 후기 불교의 존립과 교단 안정화에 중요한 물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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