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선교양종의 재건과 도약의 전조

명종 5년 선·교 양종 다시 세워져
승과도 부활… 휴정·유정 등 배출
봉은사·봉선사, 선·교종 본사 담당
보우·수진, 각각 선·교종판사 맡아
문정왕후 서거 후 양종 모두 혁파돼

16세기는 법제적 폐불이 단행되고 선교양종이 일시 재건되었다가 혁파된 격변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변동과 지속의 양상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파악할 것인가에 따라 조선시대 불교를 이해하는 기본 틀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카하시 토오루는 〈이조불교〉에서 이 시기를 폐불기, 그리고 청허 휴정과 같은 고승이 일부 나와 명맥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결국 쇠퇴와 멸절의 길이 가속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일반적인 한국불교사 개설에서도 조선전기는 억불과 폐불을 특징으로 하며, 그 정점을 찍은 시기가 바로 16세기 전반의 연산군, 중종 때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에 비해 조선후기는 전기에 비해 불교가 활성화되었고 다양한 존립의 토대가 마련되었음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16세기 불교는 여전히 잿빛 장막 뒤에 감춰진 채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다. 최근 16세기에 불서 간행의 빈도와 양이 전에 비해 급증했고 유교사회가 정착됨에 따라 불교정책은 오히려 교화와 방임으로 전환되었다는 연구가 나와 이 시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논란이 일고 있다.

연산군과 중종대를 거치면서 거의 폐불 위기까지 가면서 활로를 찾지 못했던 불교계는 16세기 중반의 명종대(1545~1567)에 기사회생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의 명에 의해 1550년(명종 5) 선종과 교종의 양종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문정왕후는 영의정 상진에게 내린 ‘비망록’에서 “승도의 수가 날로 늘고 군액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승도를 다스리지 못하면 잡승을 금하기 어렵다. 조종의 〈경국대전〉에서 선종과 교종을 설립했던 것은 불도를 숭앙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승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근래 이것이 혁파되면서 그 폐단을 장차 구제하기 어려우니 양종을 다시 세우고 〈경국대전〉의 승과와 도승조를 다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시행의 취지를 밝혔다. 공식적으로 양종과 승과를 재개시켜 승도의 증가로 인한 폐단을 최소화하고 교단을 통제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결국 언관과 유생 등의 격렬한 반대와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이단의 가르침에 미혹된 것이 아니며 시세에 맞추어 국가의 폐단을 구제하려는 것’임을 들어 단행하였다.

양종의 재건은 역을 피해 승려가 된 무도첩 승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책방향에 의한 것으로, 이는 불교를 공인해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고 규제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현실적 판단에서 기인하였다.

앞서 중종 후반기인 1530년대에 불법적 승도의 급증이 정치쟁점화 되었는데, 당시 조정의 논의를 보면 “지금 불교의 쇠퇴함이 가장 심하지만 승도의 수가 많은 것도 이전보다 매우 심하므로 제방을 쌓는 역사 등에 승도를 동원할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지금 사찰이 여전히 많고 승속이 섞여서 문제를 일으키는 등 불교를 숭봉할 때보다 그 해로움이 더 하므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 대규모 공역에 승도를 활용하고 대가로 호패를 지급하는 ‘역승급패’의 방안이 일시 시행되었다. 양종이 복립되고 나서 1555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승군이 조직되었는데 이 또한 승도를 국가정책상 활용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선교양종의 재건과 함께 연산군과 중종 때 중단되었던 승과도 양종판사의 주관과 예조정랑의 참관 하에 다시 거행되었다. 즉 3년 식년에 해당하는 1552년 4월에 승과가 재개되어 선종 21명, 교종 12명이 최종 합격되었다. 승과를 통과한 승려들은 승직을 부여받고 내원당 등 왕실 관련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 승과 출신이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처음 열린 승과 출신인 청허 휴정(1520~1604)은 1555년 교종판사에 이어 선종판사를 겸임하였고 선종본사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사명 유정(1544~1610) 또한 1561년의 승과 급제 후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당시 승과는 교계를 주도하는 고위급 승려를 배출하는 원래의 목적 외에 도승을 위한 편법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전부터 급증한 무도첩 승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미봉책이었는데, 양종이 재건된 다음 해인 1551년에 식년이 아님에도 선종의 시경 시험을 보았고 이때 406명이 합격하였다. 또 1552년 정식 식년시 때도 도별로 인원이 배정되어 총 2,600명의 시경승 수가 정해졌다.

이에 승과를 통해 도첩만 내줄 뿐 양종재건의 명분이었던 양역으로 배정되는 승려가 없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승과의 최종 합격자에게 승직을 주는 것과는 별도로 응시 승려 대다수에게 승려 자격을 인정해 주는 도승의 방안으로 시경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 허응당 보우 스님의 진영.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던 허응당 보우 스님은 선교 양종이 일시적으로 재건되자 초대 선종판사를 맡고 선종 본사인 봉은사 주지로 활동했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에 제주도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장살됐다.
양종이 재건되면서 초대 선종판사로는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은 허응 보우가, 교종판사는 수진이 임명되었는데 각각 선종본사 봉은사와 교종본사 봉선사의 주지를 맡았다. 봉은사는 성종, 봉선사는 세조의 원찰이자 능침사찰이었는데, 이때 문정왕후에 의해 남편 중종의 능이 수복사로 지정된 봉은사 근처로 이장되었다.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을 합친 선정릉은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에 있는 지하철 2호선의 역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선종판사로서 당시 교단을 주도했던 허응 보우(?~1565)의 구체적 사승관계나 활동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선종인 조계종의 후예임을 표명하였다.

한편 보우의 제자 태균이 보우의 문집 〈허응당집〉과 〈나암잡저〉를 편찬하였는데, 〈나암잡저〉의 교정은 사명 유정이 맡아 보았다. 그런데 〈나암잡저〉를 통해 보우가 〈대승기신론〉, 〈화엄경〉 등 교학에 정통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선교 양종에 각각의 종론이 있고 교종판사 수진의 후임을 선종 승려가 맡아서 교종계의 반발을 샀다는 기록을 보면 선과 교의 갈등이 여전히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우는 “교는 진제를 설하고 선은 속제를 설한다”고 하여 교종 우위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조불교〉에서도 보우의 성향이 선종보다는 화엄 교종에 더 가깝다고 평하였는데, 선과 교를 융합해야 했던 상황에서 선승인 보우가 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양자의 조화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교양종이 재건될 수 있었던 것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이끄는 소윤 세력이 정국을 주도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왕실과 일부 척신세력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파격적인 불교정책의 전환과 시행에는 그 이면에 왕실재정과 사원재정의 결탁이라는 경제적 배경이 개재되어 있었다.

양종 복립 후 왕실의 내원당에는 금표를 쳐서 관에 의한 과도한 승려 동원을 억제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내원당과 능침사 등 왕실관련 사찰의 운영은 왕실재정을 관할하는 내수사에서 실제 주관하였는데, 전세와 잡역을 면제하는 조치를 통해 내원당 사위전으로 민전의 투속을 유도하고 증가한 전지에서 나오는 전세와 수익을 왕실재정의 기반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당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이들이 왕실 관련 사찰의 주지나 지음으로 임명되었는데, 내원당 등 왕실 관련 사찰은 양종 재건 전에 99개소였던 것이 395개소로 급격히 늘어났고 이는 양종 재건과 왕실 재정 사이의 함수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선교양종은 문정왕후가 계속 존속시킬 것을 유언하고 세상을 뜬 후 바로 다음해인 1566년에 혁파되었다. 명종은 모후의 유훈을 들어 폐지를 거부하였지만 관료뿐 아니라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1천 건의 상소를 올리는 등 격렬하게 혁파를 요구한 끝에, 재건 16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배불 상소의 내용을 보면 양종 뿐 아니라 왕실 내수사도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 결과 양종 혁파와 함께 사찰의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수세지가 국가에 속공되었는데, 명종은 능침사와 내원당은 예외로 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내원당의 전답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때 속공된 전지가 다른 국가기관이 아닌 왕실 내수사로 이속된 것을 보면 사원의 토지가 왕실경제와 밀접히 연동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처음 선종판사를 맡았던 허응 보우는 양종 복립의 주모자로 지목되었고 문정왕후 사후 바로 유자들의 성토의 주적이 되어 제주도로 유배된 후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장살 당했다. 이는 신라의 불교 공인을 위해 흰 피를 쏟으며 죽은 이차돈에 이어 유교국가 조선에서 불교 재흥을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은 일종의 순교였다.

선교양종의 판사직을 역임한 휴정도 양종 당시의 활동을 회고하며 ‘산승의 추악한 일’로 자평하였는데, 이 또한 이러한 참담한 귀결을 목도하면서 나온 인식이었다. 휴정은 자신이 승과와 승직에 나간 것에 대해, “사람들의 청에 억지로 따랐다”고 고백하였고 스스로 판사직을 그만 둔 것은 “문득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해서였다”고 술회하였다.

양종의 일시적 재건은 조선시대 불교사의 전체 흐름 속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 이유는 도승 및 승과의 재개를 통해 불교의 인적기반 확대 및 재생산, 교단의 조직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앞서 중종대에 단행된 법제적 폐불 및 정책상의 방임의 결과 제도권 밖에서 명맥을 잇던 불교계는 이 시기에 승려의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성종대인 1470년대에 도첩 시행이 일시 중단되면서부터 ‘역승급패’와 같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두 세대 이상에 걸쳐 도첩이 새로 발급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는 더 이상 공인된 승려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폐불의 위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공식적 승려 자격을 대규모로 허용한 것은 불교의 존립과 안정적 계승을 위한 기반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승과를 통해 주지나 승직을 제수 받은 청허 휴정과 사명 유정과 같은 고승들이 부상하면서 이들이 양종 혁파 후에도 불교계를 주도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즉 16세기 후반의 불교계는 학습과 저술, 교육에 매진하였고 불서 간행 등 각종 불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대(1567~1608)는 율곡 이이 등 다수의 명현들이 대거 등장하고 사림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는 등 조선이 본격적인 유교사회로 접어든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선조는 “다스리는 도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면 우리 도가 쇠하고 이단이 성할 것은 걱정할 것도 없다. 어찌 구구하게 강론하여 마치 위의 태무제가 사문을 죽이고 사찰을 헐어버린 것처럼 해야 되겠는가”라고 하여 불교에 대한 억제가 아닌 방임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선조는 정업원 혁파 논의에 대해서도 “전후본말을 모르면서 하찮은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답하였다. 당시의 명유이자 휴정과도 교류했던 남명 조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眞正)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천리에 통달하는 것에서는 유교나 불교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도 선조가 불도를 좋아한지 오래이므로 그 마음을 유학으로 옮길 것을 주청하였다.

〈선조실록〉을 쓴 사관 또한 “임금의 말이 선학(禪學)과 같아서 마음을 곧게 하고 몸을 닦는 도리가 부족하다”고 평하였다. 이처럼 유교의 정착에 따른 자신감의 반영으로, 그리고 선조의 불교에 대한 호의가 덧붙여져 선조대에는 불교를 더 이상 억압하지 않고 방임해 두는 정책 기조가 확고히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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