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근대불교학의 수용

근대불교학 서양서 역수입 돼
이어 조선도 연구에 박차
오리엔탈리즘 인한 열등각인
다각적인 접근으로 해소해야

근대불교학은 19세기에 서양에서 탄생하여 아시아의 수입도매상인 일본을 통해 20세기 초 한국에 전해졌고, 근대학문의 연구방법론에 의해 불교 전통의 조형이 시작되었다. 근대에 들어 서양은 오리엔탈리즘 시각에 의해 타자인 아시아를 열등하게 바라보았다. 서양의 오랜 문헌해석학 전통과 실증주의적 학문 풍토에서 비롯된 동양학에도 동양에 대한 편견과 서양의 우월의식이 깊게 깔려 있었다. 근대학문으로서 불교학은 불교의 원산지이자 오랜 역사전통을 자랑하는 아시아에 역수입되었고, 기존의 절대적교조적 신념체계 대신 창시자 붓다와 불교의 사상 및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이 시도되었다.

앞서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불교학을 일찍이 받아들였다. 1877년 난죠 분유 등이 인도학의 대가였던 막스 뮐러에게 유학하였고, 도쿄제대에서 하라 탄잔의 대승기신론, 인도철학 강좌가 개설되고 타카쿠스 준지로가 범어학 강의를 하면서 학제 내에서 근대적 불교 연구가 시작되었다. 근대불교학은 한역 경론과 주석서에 의거해 교리와 종조를 맹신하던 교학이나 종학 등 일본의 전통적 불교와는 달리, 산스크리트, 팔리어 원전과 티베트어 대장경 등으로 자료의 범위를 확대하고 문헌비판과 역사 실증주의의 연구방법론을 채택한 것이다. 따라서 인도의 원전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명확히 밝히고 이후 불교의 역사와 새롭게 성립된 경전의 계보를 계기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대승불교의 형성과 전개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통해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불교 인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일본에서 근대학문의 연구방법론에 의거하여 불교사학의 토대를 닦은 이는 무라카미 센쇼였다. 그는 1894년 불교사학 학술잡지인 불교사림을 창간하였고 불교통일론일본불교사강을 저술하여 불교의 종합적역사적 이해를 추구하였다. 또한 1903대승불설론비판에서 대승불교는 붓다가 설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대승비불설을 설명하면서 교리가 아닌 역사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사카이노 코요는 1907년 중국불교사의 대강을 정리한 지나불교사강을 저술하였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불교의 역사적사상적종교적 의미를 근대학문의 연구방법론에 의해 추구하였고, 20세기 전반에 한역본 대정신수대장경, 팔리어본 남전대장경을 비롯해 각종 원전자료집과 사전류를 편찬함으로써 불교학 연구의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나아가 팔리어와 한역 경전의 비교를 통한 초기불교 연구, 인도의 주석서를 대상으로 한 아비달마 및 대승 경전과 사상 연구, 한역 불전에 의거한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 연구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한국에는 1910년대부터 일본의 근대불교학 및 불교사 분야의 성과와 방법론이 소개되었고, 식민지 당국의 학술, 종교, 문화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자료조사와 대규모 집성 작업이 이루어졌다. 19122월에 창간된 조선불교월보에는 교사라는 이름으로 인도와 중국, 한국과 일본의 불교사 개관이 연재되었다. 또한 이 잡지에는 무라카미 센쇼의 불교통일론일부를 권상로가 번역하여 실었는데, 무라카미가 제기한 연구방법론의 핵심은 주석학적, 비평적, 역사적, 비교적 연구였다. 문헌실증주의에 의한 역사학적 접근이 근대적 불교연구의 방법론으로서 일찍부터 국내에 소개된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강학이나 주석교리학을 위주로 한 전통적 학술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방대한 문헌 수집과 분류, 비판적 텍스트 이해, 객관적 서술의 지향 등 여러 문제에서 미묘한 온도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헌집성과 계보학적 정리, 연구방법론의 도입에 힘입어 1910년대 후반부터 한국불교 관련 개설서가 나올 수 있었다.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1917), 최남선이 교열을 본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1918)가 그것이다. 조선불교약사는 승려교육을 위해 집필된 최초의 한국불교 통사로서 역대의 사건과 인물 관련 자료들을 연대순으로 엮은 간략한 책이다. 한편 조선불교통사는 방대한 사료가 수록된 자료집의 성격이 강하지만, 저자의 해설과 평에 한국불교사에 대한 넓은 식견과 안목이 녹아들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지금까지도 한국불교사 연구의 자료의 보고이자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이능화는 문헌실증주의에 입각한 계통적 역사 서술을 지향하였는데, 한국의 여러 불교 종파들을 정리하면서 조선시대에 성립된 임제종 법통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 및 연구의 축적을 자양분으로 삼아 이후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불교 연구 성과가 나올 수 있었다. 경성제대 교수였던 다카하시 토오루의 이조불교(1929), 중국선종 전공자인 누카리야 카이텐의 조선선교사(1930)가 대표적인 예이다. 다카하시는 총독부의 종교정책 및 학술조사를 담당하면서 한국의 불교와 유교 전통에 일찍부터 주목하였다. 그의 불교연구의 결과물인 이조불교에서는 많은 자료를 종횡으로 활용하면서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전체적 정리와 함께 인식의 틀과 입론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관변 식민사학자의 입장에 서서 한국사를 타율성과 정체성이라는 부정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에 의하면 한국불교는 독자적 특성과 발전이 없는, 한마디로 중국불교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 불교는 여성과 서민의 신앙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 정치적 억압에 의해 사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침체와 쇠퇴를 거듭해 온 굴절의 역사로 단정하였다. 다카하시의 표현에 의하면, 조선시대 불교는 종교로서의 사회성을 잃고 소외된 계층의 신앙이었을 뿐이며 국가로부터 교권을 빼앗기고 모욕과 압박을 받은 기괴한 역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선선교사를 지은 누카리야는 근대기의 대표적 학승인 박한영 등에게 정보를 얻고 기존의 자료와 연구를 참조하여 한국불교의 선과 교학 사상 전체를 망라한 개설서를 낼 수 있었다. 조선선교사이조불교와 함께 식민지기 한국불교 연구의 기념비적 역작이지만, 여기에서도 원효, 지눌 등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한국의 선종과 교학 전통에서 중국과 다른 독창성을 찾기는 힘들다고 단언하였다. 일본 조동종 승려 출신으로 종립 고마자와 대학의 교수였던 누카리야는 조선시대를 선과 교의 암울한 쇠퇴기로 보았고, 19세기 선 논쟁을 예시하며 한국의 선종은 임제종 우위의 편견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는 부처가 진귀조사에게 선을 전수받았다는, 한국에서 나온 독특한 주장인 진귀조사설이나 염화미소 등의 삼처전심설에 대해 경전상의 근거가 없는 후대의 가설이자 망설이라고 혹독하게 비평하였다.

한편 1920년대 후반부터는 외국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생들에 의해 서양과 일본의 최신 연구 성과가 전해졌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학한 김법린과 백성욱, 일본에서 배워온 강유문, 김경주, 김태흡, 허영호 등이 새로운 학문방법론과 연구동향을 소개하고 불교 연구에 뛰어들었다. 예를 들어 김법린은 세계의 학술사조에 적극 대처해야 함을 주장하며, 프랑스 불교학의 성과를 인도학, 중국학, 티베트학으로 나누어서 정리하였다. 그는 역사학, 언어학 등의 비판분석적 방법, 원전 교정과 주석을 위주로 한 문헌학 연구를 통해 종의적 전통과 신화적 전설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30년대 이후 한국불교에 대한 연구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욱 확대되고 제고되었다. 대표적 성과를 소개하면, 조선불교사고(1939)를 쓴 김영수는 오교구산, 오교양종 등 한국불교 종파사의 체계를 세웠다. 또 에다 토시오는 조선 초 간경도감의 불전 간행과 불서 언해 문제 등에 주목하였고, 권상로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에서 불교 관계 기사를 발췌한 이조실록불교초존(1934)을 펴냈다. 그 외에도 의천의 교장과 고려대장경, 조선시대 간행 불서 등에 관한 문헌학적 연구 성과도 나왔다.

한편 박한영은 1930년대 전반 무렵 중앙불전의 강의교재로 불교사 개설서인 불교사남요를 썼다. 현재는 앞부분의 석가본행기만 전하지만 서론인 통론에서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불교사를 간략히 개괄하고 있어 책의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통론에서는 부처의 행적부터 아쇼카 왕의 불교 확산, 대승불교의 성립과 중관유식사상, 불교의 중국 전래와 한역 경전, 교종과 선종의 발전과 송대 이후 불교사를 간략히 언급하였고, 한국의 불교 수용과 구산선문 및 구법승의 활동, 고려시대 불교전적의 동아시아 유통과 선과 교의 병행 등을 압축적으로 서술하였다. 또한 일본불교에 대해서는 나라시대의 남도 6종과 가마쿠라시대 이후의 종파불교를 개관하였다. 나아가 그는 세계의 불교를 남부불교의 소승, 티베트몽고 등 북부불교의 라마와 밀교, 대소현밀을 갖춘 일본의 동부불교로 나누었으며 현재 중국불교는 영화를 잃었고 조선불교는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라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박한영의 불교사남요는 당시 일본학계의 연구 성과와 불교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상당부분 차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근대시기 한국학의 태두였던 최남선은 불교학자는 아니었지만 불서 간행에도 힘을 쏟았고,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국내외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사에 있어서 불교가 유교보다 서민생활과 정신문화 등에 미친 영향이 더 크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한국불교의 특징은 인도의 서론적 불교, 중국의 각론적 불교에 대비되는 결론적 불교이며 많은 사상적 성과가 나왔다고 보았다. 특히 원효로부터 이어진 통불교 전통을 강조하면서 한국불교의 종합성과 독자성을 내세웠다. 이는 인도-중국-일본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전통적 불교사 인식, 그리고 종파불교적 특성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문헌텍스트의 조사 분류와 근대학문의 실증적, 객관적 연구방법론이 적용되면서 20세기 전반에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상, 문화 등을 집대성하고 이미지화하는 전통의 조형 작업이 이루어졌다.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불교 연구 또한 근대학문의 방법론에 의한 체계적 이해와 서술, 주제의 발굴과 입론 형성이라는 점에서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타자에 대한 폄하와 부정의 시각이 개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해방 후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가 축적되면서 식민지기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불교사의 전체적 모습이 생생히 밝혀지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 불교의 경우는 부정적 전통의 상을 극복하고 인식을 전환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불교 연구에서 지나친 민족주의나 종파적 관점을 지양하면서 고유성에 내재된 보편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나아가 동아시아 세계, 그리고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한국불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다각적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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