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한국불교의 발자취와 미래

영욕의 세월로 점철된 현대불교사
각종 탄압으로 발전 동력 잃어

철학적 사유와 이타행 중심 불교
유토피아 구현 위한 꿈 가져야

▲ 송월주 총무원장이 밝힌 자주ㆍ자율적인 종단운영 방침 보도(1980.7). 이로부터 조계종은 자주와 자율을 기치로 내세우며 당시 집권세력과 일정한 대응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지금까지 정권과 영합하고 있던 불교계를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 노선이 10.27 법난의 원인이 됐다는 설도 있다. 〈사진=한국불교 100년〉
현재 한국불교는 기로에 서 있다. 출가자 수는 점차 줄고 있고 신도는 고령화되었으며 도시, 청년, 지식인층에서 더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불교를 포함한 종교 수요가 감소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과연 수십 년 후에도 불교는 현재의 위상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통문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불교와 사찰에 대한 호의와 애정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불화, 불상 특별전이 성황리에 개최되고 템플스테이가 성공한 것은 전통문화로서 불교의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스타급 스님들의 대중강연과 책이 인기를 끄는 것도 불교에 쉽게 접근하는 길을 터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또한 현대인의 고달픈 심신을 치유하는 명상심리, 선과 위빠사나 수행, 사회복지, 유아교육 등 생활 속에 불교가 파고드는 모습도 고무적이다.

한국불교의 현대사는 영욕의 세월로 점철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나는 법령의 존재로 인해 불교는 국가권력에 휘둘렸고 종교의 자유와 자율성을 잃었다. 통합종단 성립 당시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은 말 그대로 국가에서 불교재산에 대한 관리 처분권을 행사하고, 불교단체와 대표자, 사찰 주지는 문화공보부에 등록케 하였다. 사찰에서 공사를 할 때도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고, 매년 재산목록을 작성해 관할 관청에 제출해야 했다. 이러한 독소조항이 포함된 법제는 불교의 정치적 종속을 낳은 일제강점기 사찰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불교정화를 거쳐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한 뒤에도 교계 주류세력은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였다. 1970년대에는 종정 중심파와 총무원장 중심파로 나뉘어 조계종단 내부의 암투와 분쟁이 이어졌다. 종단의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지지를 받아야 했고, 최고 권력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는지 1975년 호국불교 전통을 되살린다는 명목으로 조계종 호국승군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성립과정에서 19801027일 신군부가 주도한 불교 탄압 사건인 10.27 법난이 일어났다. 이는 국가권력이 불교계에 대놓고 철퇴를 가한 초유의 사건으로, 조선 초 억불정책을 시행할 때도 없었던 일이다.

10.27 법난은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된 날인 19801027일 불시에 일어났다. 신군부는 사회정화 차원에서 불교를 정화해야 한다며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00여 곳에 군대, 경찰 병력 3만여 명을 일거에 투입해 대대적인 검속과 체포를 단행했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불교계는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가 난동발호하는 비리 지대로서 자력으로 갱생할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사회정화 차원에서 철퇴를 가한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법난에 의해 조계종 승려 등 불교계 인사 150여 명이 군과 경찰에 강제로 연행되고 구금되었으며 구타 등 폭력과 고문이 자행되었다.

10.27 법난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알려진 바로는 조계종 총무원 측이 군사정권에 대해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를 표명하여 신군부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신군부가 정권 창출을 위한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하여 불교계를 부정부패 축재로 몰아 비자금을 거두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신군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앞서 19804월 총무원장에 취임한 월주 스님은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종단을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자체 정화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와 함께 정부가 불교계를 옥죄고 단속하는 수단이 되었던 불교재산관리법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 무렵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월주 총무원장은 광주를 방문해 성금을 전달하는 한편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성명을 거부했다.

당시 신군부의 서슬 퍼런 기세는 하늘을 찔렀는데, 그동안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불교계가 처음으로 정권에 반기를 드는 모습을 보이자 그 싹을 자르려 하였다. 10.27 법난은 12.12 군사쿠데타와 광주 시민에 대한 유혈진압으로 권력을 다잡은 신군부 측이 국민적 저항을 미리 막기 위해 불교를 탄압의 본보기로 찍은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로마 교황청, 미국과 같은 서양의 후광을 업고 있었고 사회 유력인사 중에 교인이 많았기 때문에 설령 정권에 반대했다고 해도 쉽게 건들 수 없었을 것이다. 19876.10 민주항쟁 당시 민주화 세력과 운동권 학생들이 자주 대피했던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침투하지 못한 것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불교는 주요 종교 가운데 가장 만만하였고 비리 혐의와 정화의 명분을 내세우기에 적당한 대상이었다. 이처럼 10.27 법난은 흉흉한 민심을 단속하고 군사정권을 안착시키는 데 공포정국 조성이 필요했던 신군부의 선택이었고 불교는 그 희생양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을 겪었지만 불교계는 별다른 공식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법난이 있은 다음 해인 1981년에 종정이 된 성철 스님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유명한 취임법어를 남겼을 뿐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를 강타한 민주화 운동과 높아진 개혁의 요구 속에서도 불교계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천주교가 정권 교체와 사회 변혁을 위한 시민사회의 움직임에 동참해 위상을 크게 높인 것과 비교되는 일이었다. 시대정신과 무관한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종교라는 낡은 이미지가 불교에 덧씌워진 것이다. 더욱이 노태우 정부 때인 198811월에는 국회 청문회를 앞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도피하여 2년간 은둔하였다. 법난의 최종 결정권자였던 그를 절에서 받아준 것을 불교의 자비행이라고 웃어넘기기에는 왠지 찜찜한 구석이 있다. 법난에 대한 어떤 사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에게 덥석 면죄부를 준 셈이다. 그가 산사에 칩거하면서 과연 무엇을 참회하였을지 궁금하다.

한편 사회 민주화의 여파로 1990년대에는 불교계에도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 결과 1994년 전국승려대회가 열리고 개혁불사가 단행되었다. 정치권력과 유착해 권위적 방식으로 종단을 장악하고 좌지우지했던 서의현 총무원장을 몰아내고 승적을 박탈하는 멸빈을 행하였다. 새로 출발한 개혁종단은 종회를 강화하여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분리 독립시켰다. 또한 재정을 공개해 중앙 집중화를 이루고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을 핵심 추진방향으로 삼았다. 이는 전과 같은 총무원장의 권력 독점을 막고 재정 투명화와 교육, 포교사업 정비를 통해 불교의 민주화와 제도화, 인적 수준 향상과 대중화를 이루기 위한 포석이었다.

개혁불사는 1980년대에 불교 자주화와 사회화, 분규 종식 등을 내걸고 일어난 승려대회, 그리고 전국청년불교도연합회, 불교정토구현 전국승가회, 대승승가회 등의 활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또 실천승가회 등 교단 개혁세력의 조직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혁불사를 추진한 교계 신진 세력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변화를 이끌며 한국불교의 지형을 바꾸려 하였다.

하지만 제도와 시스템 개혁은 그에 상응하는 의식과 목표, 추진 능력이 있어야 한다. 특히 승속을 아우르는 사부대중의 지지와 동참이 있어야 원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런데 제도와 법령 자체의 구조적 한계가 개혁의 발목을 잡았고 그러면서 개혁 의지와 동력 또한 크게 줄었다. 교단의 재정운영과 인사 문제에서 총무원과 종회에 권한이 주어지고 본사의 자율권도 충분히 보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종권의 향방과 이권을 둘러싼 잡음은 계속되어왔다. 구조 문제의 뿌리는 본사 주지 임면권과 사찰재산 처분권을 총독이 가졌던 사찰령 체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인사권은 교단에 일임되었지만 불교 재산에 대한 관리권은 줄곧 정부가 행사해왔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전통사찰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도 여전히 그 잔향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사찰의 주지가 운영관리 중인 사찰을 전통사찰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사찰이 속한 단체 대표자의 추천서를 첨부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시도지사를 거쳐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신청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현재 많은 사찰들이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국민의 세금인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정부와 국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국고와 도비로 성보박물관을 짓고 이벤트성 행사를 치르며 국립공원 입장료와 템플스테이 지원비 등으로 사찰을 운영하는 상황에서 자치단체장이나 지역 국회의원 선거 때 수수방관하고 있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정교유착에 깊이 빠져 들다보면 불교의 자생력을 키워 도시화, 사회화, 대중화를 이루려는 의식이나 추진 동력을 잃게 되기 쉽다. 불교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타행과 중생구제의 종교적 본분에 충실할 것인지, 국립공원 관리인 노릇이나 전통문화 지킴이 역할에 안주하며 현상유지에 급급할 것인지 선택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불교가 나아갈 길은 불교의 장점을 살려서 현대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부터 시작해야 한다. 불교는 무아와 공, 연기와 같은 철학적 사유와 더불어 비폭력과 평등, 자율과 화합, 이타주의 등을 내세운 가르침이다. 불교가 한국사회에 어떤 화두를 던질 수 있는지, 우리 삶에 어떤 희망의 불씨를 지필 수 있을지 근본적 성찰과 방향 모색이 필요하다. 불교는 오랜 세월 한국인과 함께 해온 전통이면서 현재도 한국사회와 더불어 숨 쉬는 현실종교이기도 하다. 그리고 공공복지와 사회적 환원, 삶과 죽음의 근본 문제에 대한 대승적 동감, 종교적 해법 제시 여부가 불교의 미래를 좌우한다. 나아가 통일 한국과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며 불교의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꿈을 가져야 한다.

불교는 지난 2,500여 년간 고도의 사유체계이자 보편적 세계종교로서 아시아 각지에 영향을 미쳤고 인류문명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붓다의 계승자들은 경건한 신앙심과 치열한 수행정신을 가지고 이타행을 몸소 실천해왔다. 그리고 현실세계에 불국토를 구현하고 정토를 찾으려고도 했다. 불교는 한국인의 심성과 내세관을 형성해왔고 고유의 사상과 문화가 창출되었다. 불교의 가치와 비전은 과거의 전통, 현재의 종교에 머물지 않고 21세기 미래 문명의 대안으로 떠오를 충분한 저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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