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불교와 유교의 패러다임 전환

‘조선=배불’ 이란 통념은 ‘자학사관’
국가·민중·문화 등 불교 역할 ‘충실’
日 다카하시, 불교 부정론 정형화
식민사관 덧씨워져 이미지 고착돼
조선시대 불교 역사 신앙 재조명해야

불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된 이래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1,000년의 오랜 기간 동안 사유와 가치, 종교와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국적 전통의 근간을 형성해 왔다. 하지만 고려 말에 성리학이 도입되고 1392년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세워지면서 불교의 위상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는 유불교체, 즉 불교에서 유교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고 그것은 사회와 일상의 여러 측면에서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여말선초, 즉 14~15세기 전반에 일어난 유불교체의 시대적 배경과 당시 집중적으로 나타난 배불론에 대해 살펴본다. 먼저 대표적 유교 경서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에 대한 주자의 주석서인 〈사서집주〉가 중국 원대에 과거시험의 필독서가 되었고, 원을 통해 성리학을 수용한 고려에서도 1340년대에 과거의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하였다. 이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었던 사대부들이 모두 성리학자의 소양을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과거시험의 출제자와 해당 과시의 합격자들이 좌주와 문생, 즉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게 되면서 성리학에 대한 학파적 이해가 심화되었다. 또한 이들이 관료로 활동하고 정국을 운영하게 되면서 유불교체의 서막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고려 말의 불교계는 많은 사회경제적 폐단을 일으켰고 따라서 사찰과 승려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앞서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주요 사원들은 원 황실과 고려 왕실의 후원, 권문세가와의 결탁을 통해 막대한 장원과 노비를 소유하는 등 엄청난 재부를 축적하였다. 비록 과장일 수는 있지만 조선 초의 실록 기사를 보면, 국가에서 조세를 거두는 농지의 약 1/6 정도를 사찰에서 소유하였고 10만 명에 이르는 사원노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되었다.

1170년 무신집권기부터 대몽항쟁을 거치면서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전란과 사회적 혼란, 원간섭기에 더욱 심화된 부의 양극화, 이후 왜구의 준동과 홍건적 침입 등을 거치면서 국가의 역을 담당해야 하는 양인의 수는 급격히 줄었고 민생은 피폐해졌다. 양민들이 역을 피해 출가하여 승려가 되거나 생활고에 못 이겨 사원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이는 불교계의 인적 수준 하락과 도덕적 타락을 낳는 요인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불교계는 교학 연구나 수행풍토의 진작보다는 기복과 공덕 신앙에 중심을 두었고, 교단에 대한 자정능력이 상실된 채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한 상태였다.

여말선초에 해당하는 14세기는 동아시아의 세계의 패러다임 전환기이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원에서 명으로, 한국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가 일어났고,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에서 무로마치 막부로의 이행과 같은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특히 몽골족이 세웠던 원은 오랑캐와 중화가 다르지 않다는 논리로 양자의 통일과 다민족 공생을 추구하였음에 비해, 중국 한족이 세운 명은 우월한 중화문명에 의해 오랑캐의 비루한 문화와 습속을 배격하고 변화시킨다는 화이론적 관념에 투철하였다.

조선 또한 화이론적 세계관을 신봉하는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았고, 중화의 도와 인륜을 대표하는 화풍인 성리학을 통해 고려의 토풍, 특히 이념의 대척점에 서있던 불교를 오랑캐 종교라고 하여 거세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여말선초의 배불론은 초기에는 승려의 파행과 사원의 경제적 비대화 등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점차 성리학 이념에 기초한 정치와 윤리에 해가 되는 대표적 이단으로서 불교 자체를 타파해야 한다는 벽이론적 주장으로 옮겨갔다. 당시 유학자 관료들의 글을 보면, 불교는 엄청난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고 그로인해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는 기본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기에 고려 말부터 이미 승려의 자격을 강화하는 취지의 도첩제 시행이 논의되었고 광범위한 토지개혁이 추진되기도 했다. 나아가 불교는 세속을 벗어난 가르침이며 관념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어 국가 운영에 저해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즉 불교는 정교에 위배되고 강상윤리를 부정하는 이단이므로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적 시각이 개진된 것이다.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인 정도전은 불교가 인륜을 저버리고 국가에 해독이 되는 악법이라고 하여 벽이론적 배불론의 선봉에 섰다. 그의 〈불씨잡변〉에서는 윤회와 인과응보 등 불교의 내세관을 비판하고 화이론적 입장에서 불교는 혹세무민하는 오랑캐 종교라고 매도하였다. 또한 〈심기리편〉에서 성리학에는 인간의 본성 안에 천리가 내재하고 있어 “마음을 통해 본연의 성을 궁구하여 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불교는 마음의 작용을 절대시하여 일체의 현상을 마음이 만든 허상이라고 보는데 이는 본성의 이치를 도외시하고 천리의 절대성과 그에 의한 인륜 도덕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폄하하였다.

정도전의 이러한 불교비판론은 주자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다. 주자는 원래 화엄과 같은 불교사상의 본성론과 우주론에서 영향을 받아 성리학의 사유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홍주종 계통의 선종에 대해서는 마음의 작용을 절대화시킨다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주자는 불교의 출세간주의가 현실세계에서는 매우 무력하며, 지나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양극단에 빠져서 형평성을 잃고 윤리마저 부정한다고 보았다. 또한 불교의 윤회와 업보 관념은 현재의 문제를 무책임하게 내세로 미루는 공허한 관념일 뿐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마음이란 감각과 앎의 주체일 뿐이고 천리가 내재된 본연의 성처럼 도덕의 준거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교는 마음의 지각작용 그 자체를 본성이라고 믿어 허무와 부도덕을 낳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배불론의 집중 공세에 대해 불교계가 내세운 대응논리는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과 윤리적 정당성, 국가 및 사회에의 기여, 유불의 사상적 일치를 주장하는 정도였다. 즉 불교는 정치와 사회, 윤리의 측면에서 많은 역할을 해왔고 유교와 불교는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라는 수동적 차원의 변호에 머물렀다.

함허 기화(1376~1433)의 〈현정론〉이나 〈유석질의론〉과 같은 책에서는 불교의 인과론, 계율과 수행 등은 유교의 인과 덕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여 정치적, 윤리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또 태극과 무극, 음양오행 등을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과 같은 불교식 개념과 교리에 대비시켜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불교의 오계(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와 유교의 오상(인, 의, 예, 지, 신)은 같은 내용이라고 하면서 일심에 의한 유불일치를 강조하고 공존을 추구하였다.

2007년 10월 19일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 열린 참회법회.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쇠약해진 불교를 다잡았던 봉암사 결사를 기념했다.
여말선초의 유불교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역성혁명과 마찬가지로 위로부터의 급격하고 근본적인 개혁에 의해 추진되었다. 비록 하부구조와 사회 전체의 변화는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조선 초의 강력한 억불정책은 ‘숭유억불’이라는 개념으로 표상되었고 조선시대 불교의 주된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그렇기에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여성, 서민 등 비주류의 신앙으로서만 불교가 명맥을 겨우 유지했을 뿐이고 사상의 발전이나 시대를 선도하는 주류사상의 역할은 전혀 없었다고 단정되었다. 심지어 조선시대 불교는 500년 내내 유학자들의 비판과 공격에 시달렸고 승려는 수탈과 억압의 대상이었으며 천민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통용된 지 오래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념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일종의 ‘자학사관’인 셈이다. 상부구조에서 유불교체가 일어났고 조선 초기 사원의 경제적 기반 상당수를 국가가 공적 재산으로 환수한 억불정책이 실시된 것은 사실이다. 또 불교는 조선시대 여성과 서민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으로서 현세의 복을 기원하고 내세의 염원을 해소하는 매개가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조선시대 불교가 시기별 변동과 부침을 겪으면서도 한 번도 스스로의 역할을 방기한 적이 없고 나아가 다양한 전통을 유지,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와 사회와의 관계와 불교의 역할, 인적 네트워크의 결성, 지역공간에서 사찰의 기능 등 필수조건들이 전제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승려 층 내에도 다양한 신분과 층위가 존재하였으며 승려라는 선택적인 출세간의 존재를 신분제 하의 천민으로 볼 수 있는 법적, 제도적 근거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불교의 부정적 이미지는 언제, 왜 만들어진 것일까? 우선 조선시대에 불교가 정치와 사회의 주류질서에서 배제되고 고려에 비해 그 위상이 추락한 것은 사실이며 그러한 역사상이 인식에 반영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전통의 상이 그려지던 20세기 초의 상황에서 바로 직전의 시기인 19세기의 기억이 보다 직접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는 세도정치와 잦은 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와 사회의 공적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따라서 사찰과 승려에 대한 사적 침탈 등 비정상적 상황이 이전에 비해 훨씬 심화된 시기였다. 그러한 전 시대의 부정적 기억이 식민지시기에 전통의 상을 조형할 때 투영되었고, 더욱이 식민사관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이 덧씌워져 부정 일변도의 잿빛 이미지로 그려진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사 개설서인 〈이조불교(1929)〉의 저자 다카하시 토오루는 이러한 부정론을 학술담론으로 정형화시켰다. 그는 조선시대는 억불과 불교의 쇠퇴로 점철되었고 특히 후기에는 불교가 거의 멸절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를 바라보는 하나의 틀이 되었다. 해방 이후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내재적 발전론이나 주체적 민족주의에 의해 일제 강점기의 학설이 상당부분 교정되었지만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최근 들어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조선시대 불교는 유교로 대표되는 전통, 서구문명과 기독교로 상징되는 근대의 어느 쪽에도 지분을 갖지 못한 채 학술적 논의에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실제의 역사상을 보면, 조선시대 불교는 국가의 억압이나 방임 하에서도 자구책을 마련하고 존립을 모색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전기에 비해 교학과 수행, 신앙 면에서 더욱 활성화된 모습을 보인다. 더욱이 현존하는 전통사찰의 대부분은 조선후기에 중창되었고 민간신앙까지 포섭해 종교의 지분을 더욱 확대하고 공고히 한 점은 자립적 종교모델로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불교사상의 발전이 없었다거나 시대사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점은 중국이나 일본의 근세불교에서도 나타난 보편적인 양상이지 조선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조선후기에 나타난 임제법통과 간화선의 선양, 선교겸수와 화엄교학의 활성화, 염불의 성행 등은 한국불교의 다양한 흐름을 계승하고 정립한 것이었다. 이는 현재 한국불교 전통의 원형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고려불교와 근현대 불교를 잇는 연결고리이자 가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전통적 심성과 세계관의 근저에는 일반의 통념처럼 유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불교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 불교의 역사와 사상, 수행과 신앙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부정적 선입견을 지워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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