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임진왜란과 의승군의 활약

1592년부터 7년 간 왜군 침략
휴정, 도총섭 임명… 승군 모아
영규의 승군, 금산 혈투서 전사
사명 스님 戰後 외교서도 활약
승군, 전투·산성 조성 성과 보여

▲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금산에서 이뤄진 전투였다. 기허 영규가 이끄는 의승군 800명과 의병장 조헌의 700명 의병은 금산에서 왜군과 맞서 마지막 한명까지 싸웠고, 장렬히 산화했다. 사진은 700의총기념관에 있는 ‘금산혈투출진도’. 오른쪽에 말을 탄 스님이 기허 영규 스님이다.
1392년에 조선이 개국한 후 정확히 200주년이 되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을 거쳐 1598년 일본군의 퇴각까지 무려 7년간이나 조선 땅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전국토가 유린되는 가운데 명과 일본 간의 강화 협상이 반복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만주에서는 후금세력이 발호하여 1636년에 청을 세웠고 명은 1644년에 몰락하였다. 조

선은 국가재조를 위한 각고의 노력과 함께 후금 및 청에 대처해야 했으며 결국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었다. 또한 일본은 임진왜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에도막부가 세워지는 등 임진왜란은 중화질서의 균열을 낳은 동아시아의 세계 전쟁이었다.

일본은 명의 요동을 치러가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린다는 ‘가도입명’을 내세우면서 전시 기간 중 총 20만의 대군을 동원해 조선 침략을 감행하였다.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는 쓰시마 쪽에서 온 일본 군선으로 시커멓게 뒤덮였다. 일본군은 첨사 정발이 지키던 부산진과 부사 송상현이 사수하려 한 동래부를 일거에 함락시키고 북진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경상도로부터 서울을 향해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의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전란 초기에는 제대로 된 관민의 방어나 치열한 저항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조선이 200년의 평화기간을 겪은 데다 특히 남부 지역은 항상 대규모 외침에 대비해야 했던 북방에 비해 방비태세나 정규군 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양에서 들어온 경천동지할 무기인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기세 앞에 완전히 눌렸던 것도 한 요인이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여 일 만에 파죽지세로 서울에 당도하였다. 앞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족으로 전멸하였다. 이에 다급함을 느낀 선조는 일본군이 서울에 오기 전에 도성을 급히 떠났고 평양을 거쳐 중국과의 접경지대인 의주로 피난을 갔다.

조선 정부는 전쟁 개시 후 명에 군대 파병 및 군사원조를 긴급히 요청하였고 각지에서 민간인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의 보급로를 막았다. 한편 전란의 초기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었다. 수군이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일본군을 경상도 연안에 묶고 서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기에 바다를 통한 군량 보급선을 끊고 수륙 양면의 협공을 차단할 수 있었다.

1592년 7월 의주에 있던 선조는 평안도 묘향산에 주석하던 청허 휴정을 불러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하였다. 휴정은 앞서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 역모 사건 때 무고에 의해 옥고를 치르다가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당시 그의 글을 선조가 읽고 인품에 감동하여 어필묵죽과 시를 내린 인연이 있었다. 국왕의 명을 받은 휴정은 평안도 순안 법흥사에서 전국 사찰에 격문을 띄워 5천 명의 의승군을 일으켰다. 황해도에서는 의엄이 총섭이 되었고 관동의 사명 유정과 호남의 뇌묵 처영을 비롯해 각지에 있던 휴정의 제자들이 의승군을 이끌고 거병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충청도의 기허 영규와 8백여 의승군이 의병장 조헌을 따르는 7백 의병과 함께 금산에서 적과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이 사건은 의승군의 충성심과 전투력에 대한 조야의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 12월에는 앞서 6월에 보낸 3천 명의 선봉대가 일본군에 패퇴함에 따라 5만 명의 명나라 정규군이 조선에 도착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여세를 몰아 명군이 남진하다가 경기도 고양에 있는 중국 사신의 객사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였다. 2월에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과 의승군이 합세하여 한강 인근 행주산성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4월에는 서울을 수복하였다. 의승군은 행주산성 뿐 아니라 명군 및 조선군과 함께 앞서 평양성 전투에도 참여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또한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는 의승군이 호위를 맡기도 했다. 그밖에도 군량 수송, 경기도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의 산성 축조 등 전쟁에 필요한 각종 부담과 역을 승군이 담당하였다. 유일하게 병화를 면한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이나 국가 공식기록물, 태조의 어진 등도 강화도나 해주, 의주 등을 거쳐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졌고 승직을 수여받은 승려가 수호를 담당하였다.

전쟁 중에 고위 승직을 맡아 승군을 통솔한 대표적 인물로는 의엄과 사명 유정을 꼽을 수 있다. 의엄은 휴정이 연로함을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나자 도총섭을 이어받아 파사산성을 수축하였고 전쟁 기간은 물론 종전 후에도 종묘 건립과 서적 인출 등 주요 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는 ‘승왕’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당시 큰 위세를 가졌는데 뒤에 환속을 하여 그동안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유정은 휴정의 수제자로서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의승장의 상징으로 명성을 떨쳤다. 유정은 강원도에서 8백의 승병을 모아 거병한 후 스승을 대신해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고 산성 조영과 군량 조달 등 전쟁 지원 사업을 주도하였다. 또 전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교 재개 문제와 포로 쇄환 등 외교적 처리를 전적으로 담당하였다. 도총섭을 역임한 유정의 공은 선조에게 높이 평가되어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제수 받기도 했다.

유정은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도한 강화 교섭의 와중에 울산에 있던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가 적진을 탐색하였다. 이때의 유명한 일화로는 가토가 유정에게 조선의 보배가 무엇인지 묻자 “당신의 머리를 얻으면 조선은 큰 보배를 얻는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척이자 최측근으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선봉장이던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정치적 경쟁과 갈등 관계에 있었고 강화 교섭에서도 내부적으로 불협화음을 냈다. 일본에는 16세기부터 국제 교역을 통해 서양의 문물이 바로 전해졌고 천주교도 들어와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에 도요토미는 천주교 탄압의 일환으로 천주교도 1만 8천 명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편성하여 고니시에게 맡겨서 조선으로 보냈다. 이때 일본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고니시 휘하 군대의 종군신부로 조선에 와서 약 1년간 체류하였고 전후에 잡혀간 조선인 2천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하다.

유정 외에도 뇌묵 처영, 기암 법견 등 다수의 휴정 문도들이 의승장으로 활동하였다. 처영은 호남에서 1천명의 의승군을 일으킨 후 평양성 전투와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고 남원의 교룡산성을 쌓는 등 후방 지원사업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법견은 전라도 입암산성의 축조와 수호를 맡았고 전후 금강산 일대의 수많은 중창불사를 일으켰다. 또 소요 태능, 청매 인오, 중관 해안 등 다수의 의승장이 휴정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국가의 위기 상황을 맞이해 일어난 의승군은 큰 공적을 세웠지만, 불교의 입장에서 전쟁과 승군 활동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7년간의 전쟁은 조선에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불교계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우선 병화와 약탈, 전지의 황폐화는 사찰 건물의 소진과 함께 사찰의 재정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또한 의승군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하거나 이후 환속하는 등의 인적 손실도 컸다. 승군 활동은 사찰의 경제적 피해를 가중시켰는데, 지역별로 동원 인원이 과중하게 책정되거나 승군의 활동 유지비를 사찰의 사위전에서 나오는 소출로 감당하게 하는 등 재정적 부담이 적지 않았다.

한편 살생과 같은 계율의 위반이 공공연히 행해졌고 수행풍토가 약화되는 등 불교적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따라서 그에 대한 우려와 탄식의 목소리도 제기되었는데, 휴정의 주요 제자로서 정관문파를 이룬 정관 일선은, “말법이 쇠하고 세상이 매우 혼란하여 백성이 안도하지 못하고 승려도 편안히 머물지 못한다.

적의 잔해와 사람의 노고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더욱 처량하게 느껴지는 것은 승려가 속복을 입고 종군하여 죽고 도망치면서 출가의 뜻을 잊고 계율 실천을 폐하며 허명을 바라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니 장차 선의 기풍이 멈추게 될 것이다”라고 개탄하였다. 이는 전쟁 참여가 승려의 본분에 어긋남을 지적하고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었다.

휴정의 또 다른 제자 청매 인오도 “참상과 전쟁이 날로 심하고 부역이 해마다 더욱 압박하여 남북으로 갈리고 산중에 희비가 끊어져 병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여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토로하였다.

실제로 전란 후 공을 세워 직책을 받은 승려들 중 환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와 함께 의승군의 활약으로 승려의 위상이 높아지고 불교의 입지가 강화될 조짐이 있자 조정에서 고위 승려의 권한 남용 사례가 비판되거나 선교양종이 다시 세워질지 모른다는 우려감이 표명되기도 했다. 즉 불교의 세력화에 대한 견제와 경계의 시각이 표출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승려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고 사대부 유생이 주도한 의병 활약에 비추어 결코 손색이 없는 충의의 공적을 세운 것은 당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초부터 유학자들은 승려에 대해 부모를 버리고 군주를 위한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하여 효와 충의 윤리를 져버린 부류라고 비판해왔다. 그런데 승려들이 스스로 의승군을 조직해 전쟁에 참여하였고 더욱이 웬만한 유학자나 관료보다 더 큰 활약을 하며 나라를 구하는 데 일조했기에, 윤리적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불교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높이고 부정에서 긍정으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반영하여 18세기에는 휴정과 유정 등을 국가에서 공식 향사하는 사액사우가 지정되기도 했다. 즉 1738년 밀양의 표충사, 1789년 해남 대둔사 표충사, 1794년 묘향산 수충사가 사액되고 공식적 향사가 이루어졌다. 그에 대해 정조는 “불교는 자비가 중요한데 휴정은 그에 부끄럽지 않아 인천의 안목이 되었다. 종풍을 발현하고 국난을 널리 구제하였으니 근왕의 원훈이며 상승의 교주이다. 속세를 구제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의 자비”라고 하여 국가를 위한 충의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죽은 망자의 혼령을 위로하고 추복하는 천도재, 수륙재 등의 불교의례가 성행하였다. 특히 전란에서 죽은 연고가 없는 이들을 매장하고 추도하는 일들을 승려들이 주로 담당했던 것이다. 이처럼 전란이 가져온 정신적 공황 상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종교적 효험성이 다시금 주목되었고 불교 신앙 및 재회가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각지에서 폐허가 된 사찰이 중건되고 승려 문파가 형성되었으며 수행체계, 교육과정, 법통의 정비와 불서 간행이 이루어지면서 불교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 활동은 조선후기에 불교가 존립하고 활성화되는 역사적 전환점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