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조선전기, 억불정책을 단행하다

조선 건국 태조는 유화책에 가까워
태종부터 본격적인 억불정책 시작돼
세조는 호불군주… 개인적 신앙 깊어
연산군, 사화 일으키며 폐불정책 시행
16세기 임란 거치며 부활 전기 만들어

조선시대는 흔히 ‘숭유억불’의 시대로 표현되는데 억불의 강도와 정책의 방향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불교정책의 기조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먼저 태종부터 성종대까지는 강도 높은 억불정책이 시행되었고 이어 연산군, 중종대에는 불교 관련 법제가 사문화되면서 공식적 폐불이 단행되었다.

16세기 중반 명종대에 일시적으로 선과 교의 양종이 재건되었는데, 이는 승려의 인적 계승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불교 존립을 위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도 법제상의 변화는 없었고 불교를 공인하지도 않았지만, 현실적 필요에 의해 국가에서 승려의 노동력과 사찰의 자원을 활용하였다. 이는 정책상의 방임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공리적 성격의 불교시책을 편 것이었다.

성리학적 유교이념을 국가통치의 전면에 내세우고 건국한 조선은 1392년 개국 이후 이전 시대와는 다른 불교정책을 취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신료들의 의견에 따라 신생 왕조국가의 기반 조성을 위해 불교계의 폐단을 혁파하고 특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승려의 수를 제한하기 위해 승려 자격증을 국가에서 발급하는 도첩제를 시행하였다. 신분에 따라 액수에 차등을 두어 양반은 포 100필, 양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을 내야 승려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조대에는 국왕 자신이 불교에 호의적이었고, 또 민심에 영향을 미치는 불교의 큰 사회적 지분 때문에 억압적 정책을 펴기보다는 이전의 불교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태종 즉위… 억불의 시작
하지만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억불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태종은 조선 개창에 큰 역할을 하였고 정몽주와 정도전의 제거, 왕자의 난 등 많은 정쟁을 치르며 신하들의 견제를 받지 않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 또한 그는 고려 말 국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고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등 유교적 소양을 갖춘 군주였다.

1406년(태종 6) 11개 종파에 속한 242개의 사원만을 국가에서 공인하고, 그 외의 사찰들에서 보유하던 공적 성격의 수조지와 사원노비를 속공하였다. 당시 실록 기사에 따르면 사원전 3~4만 결, 사원노비 8만 명이 환수되었다고 한다. 종파별로 공인된 사찰의 수를 보면, 조계종과 총지종을 합쳐서 70사,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은 43사, 화엄종과 도문종은 43사, 자은종 36사, 중도종과 신인종 30사, 남산종 10사, 시흥종 10사였다.

이어 다음 해에는 11개 종파를 조계종, 화엄종, 천태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의 7개 종파로 축소, 통합하였다. 이와 함께 공인된 242개의 사원 중 고려시대의 비보사(자복사)로서 주로 지방 읍치에 있던 88개의 사사를 명산대천에 있는 사찰로 대체하였다. 이는 유교적 지역 공간 재편 과정에서 각 지방의 중심지에 있는 고려적 전통과 관련 있는 사원을 폐사시키거나 축소시키는 정책방향에서 추진된 일이었다.

태종대의 억불 조치로 인해 불교계가 보유하던 막대한 양의 토지와 노비가 국가로 환수되었고 이는 사원경제를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242개의 공인 사찰에는 공적 성격의 전지와 노비 소유가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토지가 추가로 지급되기도 하였다. 242개 이외의 사찰들도 경제기반의 상당수를 잃기는 했지만 민전 형태의 토지는 남아있었고, 무엇보다 승려를 전부 환속시키거나 사원 자체를 없애는 폐불의 단행은 아니었다.

다음 세종대에는 국가의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독창적 고유문자인 한글이 반포되는 등 왕조국가의 전성기를 맞이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태종대의 억불정책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424년(세종 6)에는 기존의 7개 종파가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합되었고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았다. 선교양종 36개의 사찰은 앞서 242개의 사사처럼 군현을 단위로 한 것이 아닌 도별로 배정되었고, 그 중 경기도와 개성 지역 17개 사사를 포함해 20개 이상이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다. 이들 사찰에는 승려와 보유 토지의 한도가 정해졌는데, 양종 36사에 공식적으로 허용된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 총 3750명이었다. 또한 공인된 사사전은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을 합친 총 7900여 결로 태종대 242개 사의 1만1000여 결에 비해 3000결 이상 축소되었다.

또한 승적 관리 등 승정과 관련된 제반 업무를 담당하던 국가관서인 승록사가 폐지되었다. 대신 선종은 서울의 흥천사, 교종은 흥덕사에 교단 자체 관리기구인 도회소가 두어졌고, 고위 승려의 선발시험인 승과도 선종과 교종에서 각기 시행하게 되었다. 나아가 왕실불교를 상징하는 궁궐 내 내불당이 혁파되고 승려의 도성출입이 제한되는 등 억불의 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 연산군의 폭정을 그린 영화 〈간신〉의 한 장면. 연산군은 자신의 직속 기생 집단인 ‘흥청’과 ‘운평’을 운영했다. 도성의 원각사는 이 같은 기생들의 숙소로 쓰였고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은 왕의 연회장으로 쓰였다. 당시 불교 기록에는 “승려가 사태를 당한 암울한 시기”라고 쓰일 정도였다.
유교로의 전환… 세조만 친불
세종대에는 왕세자를 책봉할 때 뒤에 문종이 된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해 유교의 개조인 공자의 위패에 절하는 의식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이는 앞서 고려의 국왕이 승려인 왕사와 국사에게 제자로서의 예를 표하고 스승으로 모신 것과 비교할 때,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세종의 아들인 세조는 조선시대의 유례없는 호불 군주로서 친불교적 행보를 걸었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앙심에 더하여 민심의 회유와 지지기반 확충을 위해 불교에 적극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서를 간행하고 언해하였으며 서울 도심에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또한 지방의 유명 사찰들을 중건하고 다량의 사원전을 지급함과 동시에 제반 잡역을 감면해 주었으며 사찰 경내에 관리나 사대부가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했다. 이로 인해 특혜를 입은 일부 사찰은 산업을 경영하고 부를 크게 증식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세조대에는 역을 피해 도첩을 받지 않고 승려가 된 이들이 크게 급증하였다.

이후 유교국가의 정형이 갖추어진 성종대에는 지방의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언론을 주도하였고 세조대의 친불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억불책이 재차 강화되었다. 성종도 집권초기에는 대비의 영향으로 “이단인 불교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다만 믿지 않으면 되며 승려 또한 백성이므로 모두 없앨 수 없다”고 하였지만, 정치를 직접 장악한 후에는 억불의 강도를 높였다. 즉 도성안의 염불소와 비구니 사찰을 철거하고 국왕의 탄신재를 혁파하였다. 또한 세조대에 급증한 피역 승려의 수가 정치쟁점화 되면서, 도첩의 발급을 중단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해 일부를 환속시키기도 했다. 이는 승려의 수를 줄이고 향후 승려가 되는 공식 통로를 막는 폐불을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성종대에 반포된 조선의 공식 법제 〈경국대전〉에는 도승과 양종, 승과와 같은 불교 관련 조항이 포함되었는데, 그 초안은 앞서 세조대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승려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선교양종에 신고하고 3경을 외운 후 정포 20필을 내야 했으며 이 조건이 충족되면 양천의 신분을 불문하고 도첩이 발급되었다.

또 선종과 교종의 승과 규정을 정하였고 국가공인 사찰의 주지는 승과 출신의 승려 중 예조에서 임명하게 하였다. 반면 사찰의 신규 창건은 금지되었고 승려 수와 거주공간을 제한하였으며 토지와 노비를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하는 등 불교정책의 법제화와 동시에 억제 조치가 함께 명문화되었다.

연산의 폭정, 불교도 된서리
다음 연산군 대에는 즉위 초의 경우 불교에 대한 억압적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1504년(연산군 10) 왕이 생모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우발적 형태의 폐불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일부 관료와 유생들이 죽임을 당하고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이 폐쇄되면서 왕의 연회장으로 쓰이는 등 극심한 혼란상이 펼쳐졌다. 그 과정에서 세조가 창건한 도성 내 원각사가 기생의 처소로 쓰였고 양종도회소가 철폐되면서 한강 남쪽 교외의 청계사로 쫓겨났다.

또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승과가 시행되지 않았으며 다음 해에는 사원전을 전부 몰수하고 승려를 환속시키라는 명령까지 내려졌다. 이는 말 그대로 폐불이 단행된 것이었으며, 불교 측 기록에서도 연산군대를 떠올리며 “승려가 사태를 당한 암울한 시기”로 보았다. 하지만 몰수와 환속 조치가 내려진 같은 해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었고 따라서 실제로 폐불의 상황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처음에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종의 유훈을 내세워 일부 환수된 왕실 관련 수륙사와 능침사의 몰수 전답 반액을 되돌려주었고 도성 내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조광조 등 사림세력이 공론을 주도하면서 더 이상 승과가 시행되지 않았고 일부 폐사가 된 사찰의 전답은 유교 교육기관인 향교로 이속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1512년에는 양종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1516년에는 〈경국대전〉의 도승 조항이 삭제되었다. 승려의 자격을 인정하는 도승제가 없어진 것은 불교존립의 기본 전제인 인적 재생산의 법적 근거가 없어진 것이었고 이는 법제상의 폐불을 의미한다. 또 사림의 적극적인 요구에 의해 사원경제를 통해 왕실재정을 충당하던 내수사의 고금리 장리를 없애는 한편 능침사 외의 사찰에서 기신재를 행하지 못하게 하는 등 왕실불교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었다.

후대에 이때의 상황에 대해 “승려들이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절에 승려가 남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고, 또 선종의 사법계보가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한 것을 보면 이 시기 억불정책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기묘사화가 일어나 기묘사림이 축출되고 중종 후반대에는 척신세력이 정권을 운영하면서, 불교정책도 공리적 시책으로 전환되었다. 즉 공인받지 못한 불법적 승려의 급증이 사회문제가 되자, 무도첩 승려들을 국가의 공역에 활용하는 대신 신분증명서인 호패를 지급하여 승려로서의 활동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였다.

이처럼 연산군과 중종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인적 자원과 유형적 자산의 계승 측면에서 거의 폐불 상황에 이를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사찰판 불서의 간행이 16세기에 들어 급증하였고 벽송 지엄을 필두로 하여 선과 교의 전통이 교육을 통해 전승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각고의 노력과 자구책 마련을 통해 재생의 길을 모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16세기 중반 명종대에 선교양종이 일시적으로 재건되고 이후 임진왜란 때의 충의를 내세운 의승군 활동으로 인해 불교계는 부활의 전기를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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