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중국불서 전래와 화엄 전성시대

중국 표착선에 실린 1천여 불서
화엄교학 전성시대 크게 기여
관련 판목 마멸될 정도로 인출
조선 사상계 접점에도 일익 담당

18세기 이후에는 이력과정을 중심으로 강원에서 강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특히 대교과에 속한 화엄의 강경과 교학 연구가 중시되었고, 화엄 및 이력과정 교재를 대상으로 한 강의노트이자 주석서인 사기(私記)’가 다수 저술되었다. 화엄학 유행의 계기가 된 것은 중국 불서의 우연한 전래였다. 1681년 전라도 임자도 앞바다에 풍랑으로 좌초한 중국 상선이 표착하였다. 배 안에는 사람은 없고 의문의 불서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때 표류해 온 중국 배는 황벽판일체경(철안판) 판각을 위해 중국의 가흥대장경(가흥장) 간인본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었다. 가흥장은 1589년부터 약 100년간에 걸쳐 인각된 대장경으로 판각 비용 마련을 위해 인쇄본을 판매하였다. 그 가운데 일본의 새로운 대장경 조성을 위해 수출되던 한 질의 가흥장본이 태풍을 만나 조선에 유입된 것이다.

표착선에 있던 1천여 권의 불서 중 일부는 지방 관아에서 수습하여 조정에 올려 보냈다. 이 책들은 숙종의 명에 의해 다시 남한산성 개원사로 보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숙종은 불교에 해박한 승지 임상원에게 불서 가운데 유마경에 대해 설명해 보게 했지만 그가 고사하였다고 한다. 그 밖의 불서들은 전라도 인근 사찰에서 수습하여 보관하였는데, 부휴계의 적전인 송광사의 백암 성총(1631~1700)이 이를 다시 수집하였다. 그는 온 힘을 다하여 낙안 징광사와 하동 쌍계사 등에서 1975천여 판을 판각하여 배포하였다.

성총은 그 간행 경위에 대해 중국 배에 실려 온 불서의 태반이 조정에 유입되었지만 능가사, 소요사, 선운사 등 여러 사찰에서 책을 구해 소장하였기에 자신이 그 가운데 400여 권을 얻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가 간행한 불서는 모두 12종이었고 그 중 9종이 사교과의 금강기〉 〈기신론기, 대교과의 화엄 등 이력과정에 포함된 책들이었다. 또한 정토보서와 같은 염불 정토와 관련된 책도 직접 교감하고 주석을 붙여 간행하였다. 이는 당시 승려교육 및 삼문 수행체계가 정착되면서 이들 서책에 대한 수요가 매우 커진 현실을 반영한다.

▲ 지난 1월 9일 영축총림 통도사가 봉행한 ‘화엄산림 대법회’ 회향식. 사진은 이 행사에 참가한 사부대중이 위패 소대봉송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통도사

그런데 성총이 이 가흥장 불서를 간행할 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중국 화엄종 4조인 당의 징관이 쓴 화엄학 주석서 화엄소초였다. 화엄소초80권본 화엄경에 대한 징관의 주석서 화엄소와 그에 대해 징관 자신이 다시 상세하게 해설한 연의초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성총은 1682년 불갑사에서 가흥장본 합본 화엄경소초를 보고 1689년 징광사에서 각판을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에 구한 화엄경소초80권의 완질이 아니었고 반 이상만 온전한 상태였다. 이에 묘향산 보현사를 비롯해 각지 사찰에서 나머지 없는 부분을 구하여 1690년에 1차로 간행하였고, 1692년에 그것을 기념하는 대화엄회를 열었다. 하지만 이때의 간행본에도 여전히 일부 결락이 있어서 별도로 입수한 명의 영락남장 연의초를 참고하여 1700화엄경소초합본 80자호를 완성하여 재차 간행하였다.

백암 성총이 간행한 화엄경소초는 송 이후 명대까지의 주석 및 교열 성과를 반영한 중국의 최신 교정본에 기초한 것이었다. 특히 징관 화엄교학의 결정판인 연의초는 당시 조선에서 쉽게 구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18세기 후반의 연담 유일은 우리 동방에 청량 징관의 화엄소초가 이미 들어와 유통되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연의초는 인멸되어 전하지 않아서 화엄강사들이 화엄소를 지남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백암 성총이 화엄경소초합본 80권을 얻어 판각하고 유포시킨 후에야 동방의 학자들이 연의초의 무애법문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입수된 가흥장에는 연의초앞부분의 총론격인 현담에 대해 원의 보서가 해설한 방대한 양의 주석서 회현기가 들어있었고 이 또한 성총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로써 조선 강학계에서 화엄교학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가 진척될 수 있었다.

화엄학의 대표 주석서 간행은 18세기 이후 강학의 활성화와 다수의 화엄사기 저술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화엄교학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화엄사기 및 과문의 작성은 청허계와 부휴계 등 계파를 막론하고 크게 유행하였다. 먼저 가흥장 불서를 간행했던 백암 성총이 속한 부휴계에 대해 이조불교에서는 화엄의 법유가 그 법맥을 통해 이어졌다고 평하였다. 부휴계에서는 모운 진언(1622~1703)이 가흥장 화엄소초의 유입 직후 화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화엄경칠처구회품목지도를 지었다. 또한 그의 손제자 회암 정혜는 화엄경소은과를 저술하였고 그 자신은 중국 화엄종 5조 종밀의 후신으로 추앙되었다. 한편 성총의 전법제자 무용 수연은 1688년 송광사로 성총을 찾아가 화엄소초를 전해 받았고 그 정수를 얻었다고 평해진다. 또 성총에게 화엄 원융의 뜻을 직접 전수받았다는 석실 명안은 화엄법계품을 판각한 바 있다. 특히 18세기 후반 부휴계의 적전인 묵암 최눌은 화엄의 대의를 총괄한 화엄품목을 지었고 여러 경전의 요체를 정리한 제경회요를 찬술하였다.

청허계의 주류문파 편양파에서도 화엄 강학과 교학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묵암 최눌의 불조종파도에 소개된 편양파 주류 계보는 모두 교학에 밝고 화엄강학으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먼저 월저 도안(1633~1715)은 조사인 편양 언기와 스승 풍담 의심의 유훈을 이어받아 화엄경에 대한 한글 음석 작업을 완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총에 의해 간행된 연의초회현기에 근거해 한글로 장과 구절을 나누었다고 한다. 보현사에 주석했던 도안은 화엄의 대의를 강구하고 원교의 진수인 화엄 법계에 뜻을 두었으며, 승속 1천여 명을 모아 경전들을 간행하기도 했다. 한편 그가 대둔사 화엄강회에 참여해 법석을 넘겨받고 종사로 추앙된 일은 편양파 주류가 대둔사와 남방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도안의 동문이었던 상봉 정원도 화엄경과문 4과 가운데 일실된 3과의 누락부분을 교정해 화엄일과를 작성하였는데, 요지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평을 들었다.

화엄교학의 이해 심화와 사기 저술의 성행양상을 반영하여 18세기에는 대규모 화엄법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편양파 환성 지안(1664~1729)은 당대 화엄학의 일인자였던 모운 진언의 인정을 받았으며, 그의 강설은 성총이 간행한 화엄소초에 모두 부합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당시 지안의 명성은 그가 강의한 1725년 금산사 화엄대법회 때 1400여 명의 청중이 운집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몇 년 후인 1729년에 앞서의 법회 관계로 그는 무고를 당하여 옥에 갇혔고, 제주도로 유배간지 1주일 만에 병으로 입적하였다. 지안은 산들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솟구쳐 오른다는 임종게를 남겼고, 저술로는 선종 5가의 특징을 약술한 선문오종강요가 전하고 있다. 도안의 문도 설암 추붕도 대둔사 강회에서 화엄강회록을 남겼고, 그의 제자 상월 새봉이 1754년 선암사에서 연 화엄강회에는 1200여 명이나 참가하여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

이들과 함께 편양파 교학전통을 대표하는 설파 상언, 연담 유일, 인악 의첨에 의해 18세기 화엄교학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설파 상언(1701~1769)화엄경25회나 강설하였고 화엄소초의 불분명한 부분을 해인사 대장경본과 일일이 대조하여 살폈다고 한다. 그 결과 기존의 잘못된 곳을 정정하여 구현기1권과 화엄은과를 남겼다. 상언이 쓴 화엄 십지품을 대상으로 한 사기에는 그의 제자가 찬한 것으로 보이는 발문이 적혀있다. 그에 의하면 화엄경은 근기에 따른 설이 아닌 불성에 계합하는 지극한 설이다. 여러 경전 중에 가장 뛰어난 근본이며 그 가운데 십지품은 더욱 깊이가 있다. 이 사기를 쓴 설파장로는 근래의 화엄종주이며 교의 바다의 지남이다고 평하였다. 또한 1770년 징광사에 불이 나 성총이 간행했던 화엄소초의 판목이 불타자, 상언이 1775년에 이를 정밀히 교감하여 중간하였고 영각사에 경판각을 세워 보관하였다. 이후 이 영각사본은 목판이 마멸될 정도로 많이 인출되었다고 하며, 1855년 남호 영기가 봉은사에서 다시 복각하였다.

연담 유일(1720~1799)은 상언에게 수학한 이후 30여 년간 화엄 강석을 폈다. 그는 상언의 화엄소초주석을 조선 화엄과의 금과옥조로 높이 평가하였고, 화엄학의 성행과 관련하여 징관, 종밀을 칭송하였다. 유일은 화엄 현담과 십지품등에 대한 다량의 사기를 남겼는데 그의 화엄사기는 유망기라는 명칭으로 전해진다. 조선후기 화엄교학의 성행양상은 유일이 주석했던 대둔사의 강학전통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엄강학을 매개로 한 12대 종사와 강사를 배출한 대둔사의 교학전통은 법맥상 청허계 편양파와 소요파가 주축이 되어 형성하였다. 이들은 서산유의를 내세워 해남 표충사를 지정받았고 대둔사가 8도 선과 교의 종원임을 자부하였다. 이는 임제법통과 화엄종풍이 결합된 조선후기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이다. 한편 경상도에서 활동한 인악 의첨(1746~1796)도 설파 상언에게 수학하였고 상언의 화엄은과에 의거해 화엄소초에 대한 사기를 썼다. 이들의 사기는 화엄교학 이해의 심화와 강학 전수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19세기 호남과 영남의 강원에서는 각각 유일과 의첨의 사기가 중시되어 전해졌다고 한다. 후대에 화엄은 유일의 사기가 보다 자세하고 이력과정 사교과에 대한 주석은 의첨의 사기가 더 좋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했다.

화엄학은 고려전기까지는 중국 화엄을 체계화시킨 지엄과 법장, 그리고 신라 의상계 화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고려 초의 균여가 그 대표적 계승자였다. 그러다가 송의 진수 정원과 교류한 의천 이후에는 징관의 화엄교학이 보다 중시되었다. 고려후기 보조 지눌은 선교일치를 제창했던 당의 종밀, 그리고 이통현의 실천적 화엄론의 영향을 받았다. 지눌 이후 조사선과 화엄의 공조 및 융합은 한국불교의 고유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전기에는 불교와 함께 화엄교학도 침체되었지만, 교종의 승과시험 과목에 화엄경이 들어가는 등 교학의 최고봉으로서의 위상은 최소한 유지되었다. 또한 조선후기 이력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대교과에 화엄이 포함되었고, 선교겸수에 염불을 추가한 삼문체계의 정립으로, 간화선과 화엄이 양립하는 이중구조는 지속될 수 있었다. 더욱이 최신버전의 화엄소초가 간행,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18세기에는 화엄의 전성시대가 열렸고 그 중심에는 징관의 화엄학이 있었다. 일심을 매개로 화엄과 선을 연결시키려 했던 징관의 화엄교학은 화엄과 선의 이중주에 적합한 것이었고, 성리학이 주도한 당시 조선 사상계와의 접점을 찾는 데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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