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식민지 유산의 청산

기독교 지지한 정부 행태에도
기득권 세력 유지 위해 협조
타율적 정화로 비전 제시 없이
수준 낮은 승려 이미지만 부각

▲ ‘불법에 대처승 없다’는 정화표어가 선명하다.(1960.11.19.) 사진=〈한국불교100년〉
194581535년간의 일제 식민지 지배가 끝나고 감격스러운 광복의 환희를 맞이했다. 불교계도 식민지의 잿빛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종교, 전통종교로서 새 시대를 열어가야 했다.

해방과 함께 독립된 민족국가 탄생이라는 벅찬 기대에 들떠있던 19459월에 전국 승려대회가 열렸고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교단의 중추적 세력이 모인 이 자리에서 불교의 장래와 개혁 방향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찰령과 같은 식민지 유제를 혁파하고 중앙 교단기구를 설립하며 교헌을 제정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또 교구제와 교도제 시행, 사찰재산의 통합, 역경사업과 비구승단 보호 등 수행정신 선양이 중점 추진사항으로 의결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원칙인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 즉 기독교만을 공인하는 편파적 공인교 정책이 실시되었고, 기독교계 인사들을 대거 군정청에 뽑아 썼다. 더욱이 194511월에 공포된 군정법령 제21호에서 폐기되지 않은 구법령을 존속시킨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본사주지 인사권과 사찰재산 처분권을 총독이 가졌던 식민지 사찰령이 그대로 유지됨을 의미했다. 조선불교 중앙총무원과 교무회 측은 사찰령 폐지를 거듭 요청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정이 사찰령을 존치시키고 사찰재산 임시보호법을 시행한 것은 일본불교 적산 재산의 귀속 문제와 연관된 일이었다. 즉 사찰재산 처분권을 총독을 대신해 미군정 측에서 자의적으로 행사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에 있는 일본불교 사찰 및 재산이 불교계가 아닌 교회로 넘어간 경우가 적지 않았다.

▲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계 정화 희망 보도기사(서울신문, 1954.11.20.) 사진=〈한국불교100년〉
미군정의 편향된 종교정책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박문사의 경우도 한 예이다. 박문사는 대한제국의 현충원 격이었던 장충단 공원의 일부 부지를 양도받아 1932년 건립되었고 그 앞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옮겨 세웠다. 해방 후에는 불교계 혜화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쓰이다가 미군정에 의해 1947년 관유지로 귀속되었으며 이후 그 자리에 신라호텔이 세워졌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에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정하였다. 기독교 문명권인 서양이나 기독교 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이는 종교자유 및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하는 위헌적 조치였다.

미군정 하에서 기독교는 여러 특혜를 얻으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높여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을 비롯한 일부 정치가들은 미군정과 기독교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기독교 편향 정책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승만은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려 했고 특히 개신교와 미국 선교사들에게는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한국에서 활동하다 사망한 선교사나 지명도 있는 개신교인에게 국장과 사회장을 허용한 것에서도 지나친 종교편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신교계는 1950년대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개적으로 이승만을 지원하는 등 그에 대한 답례를 했다.

불교계는 이러한 상식에 어긋난 비정상적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일단 본사주지 등 식민지기 이래의 교단 주도세력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반대파인 혁신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 초기에는 우호적으로 협조하였다. 해방 직후 결의된 사찰령 철폐, 일본불교 적산 재산의 한국불교 귀속 문제도 더 이상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 편중 정책에 대한 불만도 공식석상에서는 제기하지 않았다. 한편 식민지 잔재 척결과 불교 제도개혁을 주장해 온 청년승려 등의 혁신그룹은 좌우대립이 격화되면서 좌익으로 내몰렸고 한국전쟁 때 월북하거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면서 이들이 내세웠던 교단 재정의 투명화, 사회평등과 같은 구호도 수면 아래로 잠겼다. 무엇보다 해방 공간에서 이루어졌어야 할 친일불교 청산과 자주적 종단 건설의 꿈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40년대 후반의 혼란한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주목할 만한 자생적 움직임이 불교계 내부에서 일어났다. 결혼을 하지 않은 청정비구 수행승들이 주도한 결사운동이 그것으로 뒤에 정화운동을 주도하게 되는 청담과 성철이 1947년에 일으킨 봉암사 결사가 대표적 예이다. 이들은 교법과 계율에 의한 선 수행 실천을 목표로 자주, 자생, 자립의 기치를 내세웠다. 비록 1950년에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결사가 중단되었지만 의미 있는 노력임에는 틀림없다. 한편 만암은 1947년 백양사에서 고불총림을 결성하고 승려자격, 일상 및 수행, 의무와 상벌, 재산관리 등의 제반사항을 정한 청규를 만들었다. 이후 만암은 불교계가 대처와 비구로 분열되고 선의 종맥 계승의식이 약화되어 있음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불교 정화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계율을 지키고 출가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현실을 감안해 비구=정법, 대처=호법으로 구분한 통합종단 형태를 추구하였다. 일단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의 삼보사찰을 수행비구들이 운영하고 점차적으로 단계적인 정화를 달성하자는 내용이었다.

1949년에는 정부에서 농지개혁법을 공포하고 19503월 그 시행령이 발효되었다. 그에 따라 직접 농사를 짓는 자경농의 농지 소유를 원칙으로 하는 유상매수와 유상분배 조치가 단행되었다. 당시 불교계 소유 농지의 경작은 자경 소작농이 대부분 담당하였는데 법의 시행에 따라 사찰 농지의 상당수가 헐값에 넘어갔고 불교계는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이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다. 특히 비구 수행승들은 여러 사찰을 떠돌며 일종의 기숙생활을 하였는데, 웬만한 사찰들이 재정상의 문제를 들어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불교계는 이러한 상황을 정치권에 알리며 해결책을 강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9537월 사찰보호유지책이 나와 원래 소유 사찰로 자경 농지를 반환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 종단의 교정을 맡았던 만암은 수행승의 생활고 해결과 수행 공간 마련을 위해 19544월 비구승에게 전통사찰 18개를 할당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주지들의 반발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 무렵 이승만의 불교정화 지지 담화가 발표되었다. 19545월 사찰에서 대처승을 축출하라는 대통령 유시가 내려졌고, 19624월까지 8년간에 걸친 불교정화운동의 서막이 열렸다. 이승만은 일본인 승려의 생활을 모범으로 해서 우리나라 불도에 위반되게 행한 자는 이제부터 친일자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가정을 가지고 사는 중들은 모두 사찰에서 나가서 살아야 하며 우리 불도를 숭상하는 승려만 정부에서 도로 내주는 전답을 개척하여 유지해 가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종권 및 사찰의 주도권을 놓고 대처와 비구 사이에 극심한 갈등과 대립이 펼쳐졌다. 19548월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사장을 올리자는 안건이 채택되었고 19558월 전국승려대회에서 비구승이 교단운영을 주도한다고 결정하였다. 정화 시행 후에 대처 측은 크게 반발하였지만 정부의 강경한 기조에 정면으로 맞서지는 못했다. 다만 승려대회로 종권이 비구 측에 넘어가는 상황이 되자 대처 측은 법적 소송을 전개하였는데 이 또한 대개 패소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불교정화는 식민지 유제의 척결이라는 정치적 명분, 비구승 중심의 수행 및 계율 전통을 회복한다는 불교적 가치를 내세운 것이었다. 이에 대처 측을 친일 행위자, 일제의 잔재로 규정하며,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선양하고 애국심을 제고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계속되는 기독교 우위정책에 불만을 품고 정치적 반대파가 되어버린 실세 대처 주지들을 내쫓으려는 정치적 의도도 깔려 있었다. 어쨌든 정부가 주도한 타율적, 강제적 정화의 결과 대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불교가 철퇴를 맞은 대신 기독교는 우월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비약적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19604.19 민주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고 정권이 몰락하였다. 이승만 정부 때 수세에 처해있던 대처 측은 비구 측을 관제 불교단체로 규정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권력이 교단을 좌지우지하는 법적 근거가 된 사찰령 구제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또한 대처 측의 사찰 재진입과 사찰 운영권에 대한 법정에서의 승소 사례가 이어졌다. 이에 반발하는 비구 승려의 할복 기도와 법원 난입 사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불교는 사회적 골칫덩이로 전락하였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군사정권은 비구와 대처 어느 쪽도 불교계의 대표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단일한 종을 만들어 자율적으로 불교를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분규의 해결과 통합이 지시되었다. 그 결과 19624월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탄생한 것이다. 5월에는 사찰령 대신 불교재산관리법이 시행되어 재산관리 뿐만 아니라 불교단체 등록과 운영도 국가에서 관리, 감독하게 되었다. 이는 식민지 사찰령 체제의 사실상의 연장이었고 정교분리나 종교의 자유는커녕 교단의 기본권과 자율성을 크게 후퇴시키는 조치였다. 1970년에는 대처 측이 별도로 태고종을 만들어 통합종단에서 탈퇴하면서 비구와 대처 측의 분쟁은 공식적으로는 끝이 났다.

불교정화는 식민지 체제에서 비롯된 승려 대처의 성행과 본사주지의 권력화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불교계의 세속화와 권력과의 결탁, 지도층의 부패와 타락은 사회와 민족에 기여해야 하는 대중불교, 민족불교의 이상적 모습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정화는 불교계의 당연한 과제였고 필연적인 시대의 요구였다. 하지만 주체적인 자정 노력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권력에 의해 타율적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현실적으로도 전체 승려의 10%도 안 되는 수백 명의 비구승들이 사찰 및 교단 운영을 전적으로 맡게 되면서 큰 혼선을 빚었다. 특히나 불교에 대한 기본 이해도 없는 이들이 정화 와중에 갑자기 승려가 되는 경우가 늘면서 이들 급조승으로 인해 불교계의 인적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다. 또한 수행비구가 주도하면서 선종 전통의 선명성은 부각되었지만, 교학이나 의례, 불교 문화예술 등 다채로운 전통이 끊기거나 비중이 크게 축소되는 부작용도 생겼다. 무엇보다 정화과정에서 일어난 분규와 폭력, 공공연히 세상에 알려지게 된 불교계의 어두운 이면은 평화롭고 청정한 불교의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식민지 유산의 청산을 내세운 불교 정화는 반드시 해야 할 당위적 과제였지만, 그 이면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식민지 때부터 모색된 주체적자율적인 종단 건립, 불교의 중요한 전통인 평화적화합적 해결방식은 정화의 현실 속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불교는 사회와 시대가 요구하는 보편적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오히려 무기력한 낡은 종교, 상식이 통하지 않고 수준이 낮은 승려의 이미지가 덧칠되었다. 그 결과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인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불교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상당부분 천주교, 개신교에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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