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전통의 유산, 왕실불교와 국왕

유교 국가 조선, ‘숭유억불’ 기조지만
왕실 일반인 신앙 관념은 불교
‘숭불군주’ 세조, 〈석보상절〉 편찬해
한양 가운데 원각사 창건 사리 봉안
불교식 상장례 의식·49재도 지속돼

▲ 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며 불교를 배척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부분이었고, 오랜 전통으로 내려왔던 불교 신앙을 전부 부정하지는 못했다. 실제 조선 전기 군주였던 세조는 높은 불심을 보여줬다. 사진은 세조가 세운 원각사 10층석탑.
조선은 이념과 정책, 의례 등의 공적 영역에서 유교 국가를 지향하였고 불교는 주류질서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왕실의 숭불과 불교 후원은 조선시대 내내 계속되었고 국왕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왕실과 유학자 관료 사이에서 불교신앙 및 후원을 둘러싼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이는 불교가 국왕의 장수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역대 국왕과 왕비 등의 사후 명복을 빌고 추숭하는 역할을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왕실 구성원의 다수가 비빈과 모후, 공주 등 국왕을 둘러싼 여성이었던 것도 불교신앙의 지속에 영향을 미쳤다.

왕실불교의 성격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500년은 배불의 시대였지만 왕자는 일관적으로 배불하였다고 할 수 없으며 태종, 연산군 등을 제외하면 차라리 숭불자로 볼 수 있다”는 지적이 1930년대 말에 포광 김영수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이는 국가의 공적 영역과 왕실불교 양자를 대표하는 국왕의 특수한 성격을 인식한 지적이었다.

조선시대 국왕은 유교적 질서의 정점에 서있는 존재였고 공식적으로는 ‘숭유억불’을 언명하고 실천하였지만, 국왕과 왕실의 안녕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며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불교에 반드시 적대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례와 같은 공적 영역과 사대부 계층에서 불교신앙과 재회가 배제되었고 점차 유교식으로 대체되었다. 불교에서 유교로의 전환은 불교 제의와 내세관이 유교식 제사와 조상 및 사후 관념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민의 신앙과 내세 관념은 물론 왕실불교의 전통은 강고히 유지되었다.

특히 조선전기에는 왕실에서 역대 선왕들의 ‘조종의 유훈’을 내세워 불교신앙과 의례를 공공연히 행하였고 고기를 올리지 않는 불교식 제의를 고수하다가 숭불행위라는 관료들의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왕실불교는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공론과 대립각을 세웠는데, 왕실의 대표적 불교의례인 수륙재는 조선 초기에 국상제로 거행되었고 선왕이나 왕실과 관련된 능침사와 원당 사찰에 많은 특혜가 부여되었다.

조선 초에는 고려로부터 이어진 불교전통의 유산이 뿌리 깊이 남아있었다. 조선 초부터 강한 배불론이 제기되고 억불책이 시행되었으며 유교식 상장례가 권장되었지만 부모의 왕생과 내세의 복락을 기원하는 불교식 사후 관념과 신앙을 일거에 없앨 수는 없었다.

부녀자의 산사 출입을 금하고 승려의 도성출입을 일시 제한하기도 했지만 개인 차원의 종교적 행위를 국가에서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교국가의 틀이 잡히고 억불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했던 성종대에도 “불사의 풍속이 여전히 상존하여 사대부의 집도 상을 당하면 재회를 예설하고 칠일재를 설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즉 15세기까지 부모의 묘 옆에 암자를 지어 재궁으로 삼거나 불단을 설치하여 명복을 비는 관행, 그리고 사십구재 등의 관습이 상류층에서도 이어졌던 것이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는 유교를 국교로 표명하였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고려 말 공민왕대에 국사와 왕사를 지낸 태고 보우나 나옹 혜근의 비에는 이성계가 문도로 기재되어 있으며, 태조는 즉위 후 조계종의 무학 자초를 왕사로, 천태종의 조구를 국사로 임명하였다.

또한 신덕왕후 강 씨를 위해 서울에 흥천사를 창건하고 궁궐의 내불당을 존속시켰으며 대규모 법회와 사경, 대장경 인쇄를 행하였다. 조선의 국왕이었지만 문묘에서 공자를 제사지내는 석전에는 가지 않고 문수 법회에 참가했을 정도로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다. 태조는 불교를 조상 때부터 믿어 왔다고 하며 왕실과 국가에 대한 불교의 외호를 숭신하였다. 그는 창업 과정에서 발생한 죄업을 씻어내고자 〈법화경〉을 금으로 사경하였고 고려 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한 법회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강력한 억불정책을 단행한 태종은 자신의 능에 사찰을 짓지 말라고 선언하고 국가 차원의 불사를 금지하였다. 하지만 수륙재 등 왕실의 불교행사는 금하지 않았고 특히 부친인 태조 및 생모와 관련된 불교의례와 불사는 대부분 용인하였다. 그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 자초의 비를 건립하였고 태조 사후 사십구재와 법회를 행하였으며 태조의 재궁 개경사와 원찰인 흥덕사를 짓기도 하였다.

세종도 재위 후반에는 불교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는데, “역대 제왕 가운데 불교를 숭신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나는 심하게 믿지는 않는다”라고 하면서 “이는 이단을 믿는 것이 아니고 조종의 유훈을 따르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 세종은 자신이 혁파했던 내불당을 다시 설치하고 불상을 봉안할 때 불교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1437년에는 흥천사 사리각을 금은으로 단청하여 중수하고 낙성 경찬회 때는 ‘보살계 제자 조선 국왕’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또한 대비의 추천 법회 때는 무학 자초의 제자 함허 기화가 종실을 상대로 법을 설하게 하였고, 세종의 장례도 사십구재와 소상 전후의 불사 등 불교식 의례로 치러졌다.

세종의 숭불에는 여러 개인적 심경 변화도 있었겠지만 승려가 된 친형 효령대군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효령대군은 당시 국왕 및 왕실과 불교계 사이의 주된 연결 통로였다. 그는 흥천사 불사, 한강에서의 수륙재 설행 등 왕실 불사에 깊이 관여하였고 세조대까지 왕실과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다.

세종의 왕자인 안평대군도 금불상을 주조하여 흥천사에 기부하는 등 당시 왕실 및 종실의 숭불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이는 불교가 왕실과 국가를 외호하고 번영을 기원한다는 고려 이래의 전통적 유산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숭불은 대표적 숭불군주였던 세조대에 이르러 정점을 이룬다. 그는 왕이 되기 전부터 불교를 신앙하였지만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한 후에는 더욱 더 불교에 의지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각지의 사찰에 행차하여 중건 불사를 하고 각종 면제 혜택을 주었는데, 양주 회암사, 여주 신륵사, 합천 해인사,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금강산 표훈사, 양양 낙산사 등 다양한 지역의 사찰을 대상으로 하였다. 또한 궁중 정악으로 석가모니의 영산회 광경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다.

▲ 한글 창제 이후 세조가 편찬한 〈석보상절〉
세조는 속리산 복천사의 발원문에서 자신을 ‘불제자’로 칭하였고, 무엇보다 서울 도심 안의 흥복사 터에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높이 12미터의 화려한 10층 석탑을 세우고 회암사의 진신사리 일부를 봉안하였다. 원각사의 비문은 김수온이 지었고 추기는 서거정, 글씨는 강희맹이 썼는데 이들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었다. 세조대에는 신미, 수미, 학조, 학열 등의 고승들이 활동하였고, 선종판사 수미가 불사를 위한 대규모 모금이 민간에 피해를 주는 것을 우려했을 정도로 조선왕조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흥불의 양상을 보였다.

무엇보다 세조는 1461년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다수의 불서를 간행하고 한글로 언해하였다. 불서의 번역과 간행에는 효령대군과 신미, 신미의 동생인 김수온 등 승려와 관료가 함께 참여하였다. 최초의 한글불서인 〈석보상절〉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직후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가 직접 편술한 부처의 일대기였다. 간경도감의 설립과 불서 간행, 한글 번역은 불교의 대중 교화와 한글 보급, 불교기록유산의 전승이라는 면에서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간경도감은 성종 초에 혁파되었지만 왕실의 후원으로 각종 불서의 간행이 이어졌고, 16세기 이후에는 왕실이나 국가 차원의 불서 간행은 크게 준 대신 사찰에서 간행해 내는 사간판 불서가 급증하였다.

세조대 이후에도 왕실은 대비나 왕비를 중심으로 불교신앙과 불사 후원을 계속해 나갔다. 억불정책이 시행된 성종대에도 세조비 정희 왕후의 후원으로 대규모 사찰 중창이 이루어졌고 선왕 및 왕실관련 사찰은 특별히 보호되었다. 내불당은 물론 양종 사찰과 원각사, 왕실 수륙재를 거행하는 북한산의 진관사, 장의사도 사세를 유지하였으며, 세조의 능침사인 봉선사와 원당인 용문 만덕사 등에는 잡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법제상의 폐불이 단행된 연산군과 중종대에도 왕실의 숭불 행위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또한 명종대에는 선교양종을 재건한 문정왕후에 의해 도성 내에 비구니 사찰 인수사가 세워졌고 태종의 어진을 모신 장단 화장사나 왕실의 원당에는 왕릉에 건립되는 홍문이 세워져 사류의 출입이 금해졌다. 명종 사후에는 왕비의 후원으로 금강산에서 명복을 빌기 위한 무차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대회를 주관한 이는 선교양종의 판사를 역임했던 청허 휴정이었다.

조선전기에 행해진 대표적 불교행사로는 연등회와 수륙재를 들 수 있다. 연등회는 고려 말부터 4월 초파일에 전국적으로 행해졌는데, 태종대에 공식적인 설행이 금지되었지만 왕실과 민간에서 그 명맥을 오래도록 이어갔다. 물과 육지의 모든 중생과 혼령, 귀신의 고통을 구제하고 선왕과 선후의 사후 명복을 빌기 위한 수륙재는 왕실의 주된 불교의례였고 조선 초에는 국상제로도 개설되었다. 연산군과 중종대에는 왕실의 추천재와 기신재가 혁파되면서 수륙재에 합쳐져 행해졌다. 수륙재는 민간에서도 거행하였지만 주로 왕실의 후원을 받아서 원당 등에서 대규모로 열렸던 것이다.

불교가 동아시아 세계에 미친 종교적 영향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업과 윤회로 대표되는 내세관과 정토왕생 신앙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현세와 내세의 복을 기원하는 불교신앙은 없어지지 않았다. 즉 관음신앙, 지장 및 시왕 신앙, 극락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염불정토신앙 등 현세의 안정과 내세의 명복을 비는 신앙 행위가 대상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행해졌다. 또 진언과 다라니를 위주로 하는 밀교식 의례도 왕실과 민간에서 중시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국가의례와 같은 공적 영역과 사대부 등 주류계층에서 불교식 의례가 점차 배제되었고 유교의례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하지만 15세기까지도 전통적인 불교식 제의와 법회가 사적 영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개국 후부터 화장이 금지되고 유교식 상제례가 적극 권장되었지만, 16세기 이전에는 사대부를 제외하고 대중에게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 이는 사후의 명복과 정토왕생을 추념하고 기원하는 불교식 내세관과 신앙이 고려시대 이래 강고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세적 특성이 강한 유교적 관념과 제의로는 완전히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유교식 상제례가 일반화된 조선후기에도 사십구재와 같은 불교재의가 이어져 온 것을 보면 전통의 유산이 갖는 저력과 대중적 기반은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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