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선교융합: 이력과정과 삼문

간화선 중심 수행법 이력과정 반영
마음-이치-조사풍 습득 순 정리
종합적 성격 삼문체계 필요 따라
교단 결속력·선종 정체성 다져

17세기에는 문파와 같은 교단 조직이 형성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화되면서 이를 토대로 선교겸수(禪敎兼修)의 방향과 간화선의 선양을 기조로 한 승려 교육과정과 수행체계가 확립되는 등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청허계(淸虛系)의 조사이자 조선중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청허 휴정은 〈선가귀감(禪家龜鑑)〉 등 많은 저술을 남겼고 이후 교단의 사상 및 수행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교학을 입문으로 삼아 선과 교를 함께 수행하되 지해(知解)에 얽매이지 말고 궁극적으로는 간화선의 화두를 참구하라는 ‘사교입선(捨敎入禪)’ 방식을 주창하였다. 그 요체는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 수행방안으로써 이는 17세기 전반에 정비된 승려 교육과정, 즉 이력과정(履歷課程)에 그대로 반영되어 조선후기는 물론 현재까지도 강원 교육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력과정은 크게 사집(四集), 사교(四敎), 대교(大敎) 과정으로 나뉘는데, 먼저 사집 과정은 고봉 원묘의 〈고봉선요(高峯禪要)〉, 대혜 종고의 〈대혜서장(大慧書狀)〉, 규봉 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종밀의 저술에 보조 지눌이 주석을 붙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이다.

앞의 〈선요〉와 〈서장〉은 중국 임제종 승려의 어록과 서간문으로 간화선풍의 습득과 함양을 위한 책이었다. 송대의 대혜 종고는 간화선의 주창자로서 지눌 또한 그의 〈어록〉을 읽고 계발되어 간화선을 수용한 바 있으며 고봉 원묘는 간화선풍을 체계화시킨 원대의 승려로서 여말선초 이후의 선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 뒤의 〈도서〉와 〈절요〉는 선교일치를 제창한 종밀의 저술과 그에 대한 지눌의 주석서로써 정혜쌍수(定慧雙修), 돈오점수(頓悟漸修)에 입각한 선교겸수론을 그 요체로 한다. 즉 사집의 구성은 교학을 방편으로 용인한 선교겸수적 지향과 함께 지해에 얽매이지 않는 간화선의 선양을 그 요체로 하며 이는 지눌의 수행체계 및 방식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다음 사교과는 처음에 〈금강경(金剛經)〉, 〈능엄경(楞嚴經)〉, 〈원각경(圓覺經)〉, 〈법화경(法華經)〉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책들은 이전부터 매우 중시된 경전들이었다. 그 중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은 마음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으로써 선종 성립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경전이거나 선교일치의 소의 경전으로 송대 이후 크게 각광 받은 책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의 구조를 분석하고 본체와 작용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선종과 교종 모두에서 중시된 경전이었다.

〈법화경〉은 일승사상인 천태교학의 소의경전으로 신라, 고려에서도 널리 읽혔고 조선 전기에는 불교 의례나 신앙 면에서 중시되었다. 하지만 18세기 이전에 사교과에서 〈법화경〉이 제외되고 대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들어갔는데, 〈기신론〉은 여래장(如來藏)과 유식(唯識)사상을 종합하여 일심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규명한 논서로써 동아시아 교학 발전상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이는 논리적, 분석적 성격이 강하여 강원 교육에 보다 적합한 교재였고, 또 17세기 후반 이후 화엄교학의 연구와 강학이 대세가 되면서 선과 교의 공통 관심사인 마음의 구조를 밝힌 〈기신론〉이 〈법화경〉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대교과에는 〈화엄경(華嚴經)〉,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문염송(禪門拈頌)〉이 포함되었는데 이들 경서는 조선전기 승과(僧科)의 시험 교재였고 교종과 선종에서 가장 중시된 책들이었다. 화엄은 최고의 일승사상으로써 교종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해 왔는데 이력과정에서도 이전부터의 높은 위상을 반영하여 최고 단계인 대교과에 편입된 것이다. 〈전등록〉은 11세기 초에 나온 선종 계보서로써 부처로부터 이어지는 인도와 중국의 선종 계보를 망라한 전등사서(傳燈史書)이다. 다음 〈선문염송〉은 지눌의 제자인 진각 혜심(1178-1234)이 간화선 수행기풍의 진작을 위해 편찬한 책으로 역대 조사들의 공안과 법어, 게송 등을 수록한 것이다.

이력과정의 전체 구성과 내용을 보면 종밀에서 지눌로 이어지는 선교겸수의 전통과 고려 말 이후 주류가 된 임제종 간화선풍의 결합 양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집과의 구성은 선교겸수와 간화선풍의 지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교과도 선종과 교종 모두에서 중시된 마음과 관련 경전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교과는 교학의 대표인 화엄과 선의 기풍 및 역사를 보여주는 책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선교겸수, 화엄, 간화선을 동시에 중시한 지눌의 사상적 영향력을 반영한 것이었고 간화선 우위의 선교겸수라고 하는 휴정의 수행 방향과도 부합하는 체계였다. 또한 간화선과 임제법통, 선교겸수와 화엄교학은 내용상 서로 모순되는 것이었지만 선종을 표방하면서도 선종과 교학 전통을 함께 계승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편 이력과정의 구성은 마음[心]-이치[理]-조사풍의 습득[史] 순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는 의리[理]를 파악하고 마음을 수양한 후 역사서를 통해 식견을 기르는 율곡 이이(1536-1584)의 성리학 독서순서와 유사한 체계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논어〉, 〈맹자〉 등의 사서를 언해하고 성리학 학습의 방향을 제시했던 이이는 “오서, 오경은 이회(理會)와 의리를 얻는 것이고 성리서는 의리가 마음에 항상 젖어들게 만드는 것이며 사서는 고금의 사변에 통달하여 식견을 기르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력과정에 대한 영월 청학의 해설을 보면, “사교는 경전을 통해 이치를 깨닫는 것이고 사집은 점수와 참구를 통해 마음의 깨우침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대교(大敎) 〈전등록(傳燈錄)〉과 〈염송(拈頌)〉은 조사풍을 배워 올바른 수행방향을 알도록 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문과 과거에서 ‘사경교의’와 ‘사서의심’을 시험 보았음을 고려하면 이력과정의 구성과 명칭이 유교사회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배태되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선과 교의 겸수와 함께 염불도 수행체계 안에 포섭되었다. 휴정은 선, 교, 염불의 삼문을 제시하였고 편양 언기가 이를 체계화 하였는데 그에 의해 선, 교, 염불의 삼문은 각각 경절문(徑截門), 원돈문(圓頓門), 염불문(念佛門)에 배당되었다. 이 삼문체계는 격외선풍인 선문의 간화선, 본래의 마음을 반조하는 교학,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염불법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중생의 근기는 각각 다르지만 모든 법은 하나의 일심에서 나오므로 삼문이 동일하다는 인식이 표명되었다.

당시에는 공인된 종파가 없이 모든 불교전통을 포섭해야 했던 상황이었고 이를 반영하여 종합적 성격의 삼문체계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수행방식을 다 통합하는 ‘전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중심으로 교학과 염불 수행을 병행한다는 차원에서의 포괄적 종합이었다. 즉 무조건적인 통합이나 무분별한 회통이라기보다 각 수행방식의 독자성이 용인되는 열려있는 공존 체계로 해석된다.

1769년에 나온 〈삼문직지〉에서는 “삼문이 서로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고 하여, 근원적 일치와 개별적 차이의 양자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선, 교, 염불의 전통이 모두 명맥을 이어나갔고 하나의 수행에 집중하는 ‘전수’를 기본 전제로 다른 수행방식도 겸하는 ‘겸수’의 사례가 다수 등장한다.

휴정은 〈심법요초〉에서 선의 ‘참선문’과 함께 ‘염불문’을 설명하면서 ‘원돈문’의 사구(死句)가 아닌 ‘경절문’의 활구를 참구해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유심정토와 사방정토를 동시에 언급하였다. 이를 계승한 언기는 경절문, 원돈문, 염불문의 삼문을 체계화시켰다. 그는 경절문을 ‘상근기를 위해 마음을 가리키는 격외선풍의 선문’, 원돈문은 ‘하근기를 위해 의리를 세워 언어로 이해하게 하는 교문’, 염불문은 ‘서방정토를 염상하는 염불법으로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신의 본성이 바로 미타’라고 정의하고 수행의 측면에서 염불선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격외선풍의 간화선, 본래의 마음을 비추고 반조하는 교학, 자성미타의 염불수행을 구조화한 것이었는데, 언기는 중생의 근기에 차이가 있지만 모든 법은 일심에서 나오므로 삼문은 동일하다고 보았다.

앞서 지눌이 수립한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간화경절문’의 삼문은 정혜쌍수와 돈오점수의 선교융합을 기조로 상부구조에 간화선 수행을 추가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의 삼문은 간화 경절문은 같지만 원돈문은 교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지눌의 삼문에는 없는 염불문이 들어간 점이 특징이다.

이는 기존의 전통을 포괄해야 했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모든 수행방식을 필수적으로 다 해야 하는 ‘전수(全修)’는 아니었다. 즉 각 수행방식의 ‘전수(專修)’를 전제로 한 겸수와 공존의 추구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후 진허 팔관의 〈삼문직지〉(1769)에서도 “삼문은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라고 하여, 근원적 일치와 각 수행법의 독자성을 동시에 인정하였다.

이처럼 17세기에는 문파 조직과 경제적 토대 구축의 기반 위에서 법통을 통해 교단의 결속력과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졌고, 나아가 선과 교의 수행 및 사상 전통을 동시에 계승하였다. 이 시기 불교계의 변화는 조선후기 불교의 원형 성립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며 이때 형성된 전통은 근대기까지 큰 변동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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