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업-③ 업과 무아

불교에서는 과거의 업은 현재에, 현재의 업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자신이 짓는 업의 작용력을 인식하고 노력여하에 따라 미래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업의 주체는 말할 필요 없이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자신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에 걸쳐 사제와 연기법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수행하게 되면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다는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그런데 불교의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 중에는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존재에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는 가르침이다. 이 말은 업을 짓는 행동의 주체인 ‘나’라는 존재도 없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삼세에 걸쳐 행하는 업의 주체는 무엇이고,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불교에서는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영원한 실체로서의 주체는 부정하지만 변화하는 주체는 인정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현재의 업의 주체는 과거의 업의 주체와 완전히 동일하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은 것이다. 즉 생멸하고 변화하는 현상적인 존재로서의 주체이고, 업과 업의 과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업과 업의 주체를 동일시 하는 관점에서 업을 분석해 보면 업은 (1) 선악의 의도, (2) 의도에 따라 실제로 일어나는 행위, (3) 의도나 행위에 의해 잠재적으로 남게 되는 그 행위의 영향력으로서의 힘이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로 분류된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선악의 의도’란 어떤 행위에 대한 동기나 목적을 말한다. 악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악업(惡業)으로서 뚜렷한 힘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행위자의 의도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운전미숙으로 사람을 치어 죽게 했다면 우리는 운전자가 잘못했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도에 따라 실제로 일어나는 행위’란 선하거나 악한 의도로 실제로 신체나 언어에 의해 행해지는 선하거나 악한 행동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선하거나 악한 의도를 의업(意業), 실제로 행해지는 신체에 의한 행위를 신업(身業), 실제로 행해지는 언어에 의한 행위를 구업(口業)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신업에 의한 폭력, 살인 등에서부터 구업에 의한 사기, 협박, 이간질 등에 이르기까지 의업을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행위들이 반드시 신ㆍ구ㆍ의 삼업을 다 갖추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실제 행동에 착수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마는 경우도 있다. 업은 의도와 행위, 다시 말해 목적과 결과가 다 갖추어져야만 그 힘을 발휘한다.

세 번째 ‘의도나 행위에 의해 잠재적으로 남게 되는 영향력’은 일종의 습관에 의한 잠재적인 힘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던 반드시 그 행위에 상응하는 영향력이 남는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부가 습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처음부터 열심히 하게 된 것은 아니었으나 힘들어도 참고 꾸준히 하다보면 열심히 한 공부의 영향력이 잠재적인 힘으로 남아 다음에 하는 공부를 좀 더 수월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나중엔 거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된다. 안 좋은 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시작한 도둑질은 어렵지 않다는 말이 있다. 안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한 도둑질의 영향력이 잠재적인 힘으로 남아 다음의 도둑질을 더욱 쉽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우리 각자가 질 수 밖에 없고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결정권도 자신에게 있으며 업을 변화시킴으로써 업의 영향력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도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무아설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 업의 주체의식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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