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① 십업설(十業說)
불교에서 업(業, karma)은 일반적으로 업보(業報)라는 말로 통용된다. 업은 의도적으로 지어진 어떤 행위나 일을 뜻하고 보는 범어 ‘비빠까(vip쮄ka)’의 번역으로 다르게 무르익어간다는 의미이다.
다르게 무르익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도적인 행위나 일을 원인으로 해서 그 원인과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불자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라는 말을 살펴보자. 상식적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면 결과 또한 선한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악한 행동을 저질렀다면 응당 악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선인락과 악인고과’는 원인과 결과가 조금 다르다. 선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즐거움의 과보를 받고, 악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이와 같이 선(善)이라는 원인이 낙(樂)이라는 결과를, 악(惡)이라는 원인이 고(苦)라는 결과를 낳는 과정을 ‘다르게 무르익어가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무르익어간다고 해서 원인과 완전히 별개의 속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 초래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 창조신[브라흐만]과 그 신을 위한 제식이 규정대로 바르게 행해졌는지 아닌지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제식만 규정대로 바르게 행하면 그것에 의해 나쁜 운명도 좋은 운명으로 바뀐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서 모든 인간의 행위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 행해지고 그 행위에 대한 결과로서의 과보 역시 자기가 지은 행위에 대한 책임과 보상으로 나타난다는 인과응보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업보설은 불교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과보를 피하고 즐거움의 과보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부처님은 선한행위를 하기에 앞서 먼저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악한 행위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선한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해진 것이 바로 십악업(十惡業), 혹은 십불선업(十不善業)이다.
십악업의 근원이 되는 것에는 몸으로 짓는 행위[身業], 입으로 짓는 행위[口業], 생각으로 짓는 행위[意業]의 세 가지가 있다. 이중에 몸으로 짓는 신업에는 살생(殺生)과 도둑질[偸盜], 사음(邪?)이 해당되고 입으로 짓는 구업에는 거짓말[妄語], 이간질[兩舌], 욕설이나 험담[惡口], 궤변[綺語]의 네 가지가 해당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각으로 짓는 의업에는 탐욕(貪慾)과 성냄[瞋?], 그릇된 견해[邪見]가 포함된다. 그리고 이 십악업을 부정하고 행하지 않는 것을 십선업(十善業)이라 한다. 이와 같이 선업을 부정적인 어법으로 표현하는 것에 의해 악한 행위를 제외한 나머지 선한 행위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또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마음으로 짓는 행위, 즉 의업(意業)이다. 불교에서는 의업이 신업과 구업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로 의업을 생각의 업[思業]이라 하고 신업과 구업을 생각하고 난 뒤에 행하는 업[思已業]으로 분류한다. 결국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에 대한 우리의 윤리의식이 그 행위의 종류를 결정짓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들어 범죄가 갈수록 잔인해지고 인심도 각박해졌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찌 ‘요즘의 현상’에만 국한되겠는가. 이해하기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십악업과 십선업의 의미를 자각하고 악업을 행하지 않으려고만 해도 세상은 한결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