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번뇌 _③ 번뇌의 다른 명칭들

불교에서 인간의 삶이란 괴로움[苦]의 세계이다. 그 괴로움의 근원에는 번뇌가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근원인 번뇌에 대해 명확히 자각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대해 알아 채지조차 못하고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고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목적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경전에는 번뇌에 관한 수많은 설명이 있다.
우선 번뇌(煩惱)는 ‘극심한 고통’ ‘분노’ ‘무지’ ‘탐욕’ ‘집착’ 등을 의미하는 범어 ‘끌레샤(kleśa)’의 한역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번뇌의 근원인 것이다. 예컨대 살인, 도둑질, 사음의 세 가지 몸의 번뇌, 거짓말, 비방, 욕설, 궤변의 네 가지 말의 번뇌, 탐욕, 분노[원한], 회의[의심]의 세 가지 마음의 번뇌 등이 모두 끌레샤이다. 괴로움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번뇌에는 이렇듯 다양한 뜻이 있고 그만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번뇌와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수면(隨眠)이다. 수면은 번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굳이 수면이라고 한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수면은 범어 ‘아누샤야(anuśaya)’를 뜻풀이 한 것으로 본래는 나쁜 방향으로 향해가는 ‘경향’, ‘성향’의 의미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심신을 옭아매어 자유를 빼앗고 그로인해 괴로움에 끌려 다니는 인간이 점점 고통에 빠져 혼미해 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즉 번뇌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또한 번뇌의 종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번뇌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채 인간인식의 가장 깊은 곳에 해당하는 제8알라야식에 잠자듯이 잠재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잠재돼 있을 뿐 조건에 따라 표면의식에 일어나기 때문에 번뇌의 종자라는 의미로 수면이라고 한다.
번뇌와 수면과 같은 대표적인 번뇌이외에도 수많은 번뇌의 별칭들이 있다. 우선 번뇌의 옭아매는 성질을 강조한 전(纏)이 있다. 전은 범어의 ‘빠리아바스따나(paryavasthāna)’의 의역으로 분노나 욕망에 의해 소유된 상태를 말한다. 즉 분노와 탐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번뇌가 인간의 몸과 마음의 자유를 빼앗은 상태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선한 마음을 덮고 방해한다는 의미의 번뇌가 개(蓋)이다. 개는 범어의 ‘니바라나(nivaraṇa)’의 의역으로 ‘방해하는 것’ ‘간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마음을 덮어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말한다. 또한 번뇌의 속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결사(結使)이다. 결사는 범어 ‘쌈요자나(saṃyojana)’의 의역으로 함께 묶는 것을 뜻한다. 번뇌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옭아매서 고뇌의 세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문의 사(使)는 번뇌가 인간을 고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부리기 때문에 그 점을 강조하여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옭아매어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계(繫)도 박(縛)도 동일한 번뇌의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이 전, 개, 결사, 계, 박 은 번뇌가 인간의 삶의 모든 면에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속박되어가는 것을 강조한 번뇌로는 취(取)와 액(軛)이 있다. 취는 탐욕으로 인해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다. 액은 소를 수레에 메는 멍에를 말하는 것으로 소가 멍에로 인해 수레를 끄는 괴로움에 처해 있듯이 인간이 여러 가지 고뇌에 얽매이도록 하는 것을 비유로서 표현 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번뇌는 본래 환상과 같아서 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뇌는 닦아낼 수 있는 더러움과 같으므로 구(垢)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더러움이 외부로부터 덧붙여진 경우의 번뇌를 객진(客塵)이라고 한다. 번뇌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불어 들어온 먼지와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번뇌는 바르고 선한 것을 휩쓸어 없애 버리므로 사납게 흐르는 폭포에 비유되어 폭류(暴流)라고도 한다. 번뇌를 일컫는 말이 이토록 다양한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생들의 번뇌가 그 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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