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업-② 업보윤회설(業報輪廻說)

 선한행위에 대해서는 즐거움이라는 결과가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괴로움이라는 결과가 생긴다는 자업자득의 윤리가 불교의 업설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선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가난하고 힘들게 살다 가는 경우도 있고, 악한 행위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온갖 영화를 누리다 가는 경우도 많다. 고대 인도에서는 이렇게 불합리한 현상에 대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친 인과관계[三世因果]로 설명하고 있다. 삼세인과의 가르침에 의하면 현재에 괴로움이 지속되는 것은 과거에 행한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이고 이 생이 끝날 때까지 누리는 부귀영화는 과거에 행한 선한 행위에 대한 과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전생까지 포함시킨 과거를 말한다. 그리고 현세에 행한 행위는 미래의 삶에 영향을 준다.

이와 같이 선악의 업이 그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이루어질 때까지 삼세에 걸쳐 존속하고, 그 과보에 의해 각각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의 세계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업보윤회설이다. 이 여섯 세계[六道]중 지옥ㆍ아귀ㆍ축생을 3악취(惡趣)라 하고, 아수라ㆍ인간ㆍ천상을 3선취(善趣)라 한다. 인간의 선악의 정도에 따라 악한 행위를 한자는 악취에, 선한 행위를 한자는 선취에 태어남으로서 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업보설을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사견(邪見)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사견이란 선도 악도 선악의 과보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견이 있는 한 사제설(四諦說)이나 연기설(緣起說)과 같은 불교의 독자적인 가르침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업보윤회설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설명 가능한 윤리의식이고 이러한 윤리의식이야말로 부조리한 고(苦)의 세계에 대한 자각과 그 고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수행의지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업보윤회설을 절대적인 숙명론이나 결정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인도의 신분계급제도인 카스트(caste)가 기원전 1300년 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고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것은 인도인들이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의 삶과 계급이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스트란 제사 종교 학문을 담당하는 바라문과 왕족이면서 군대 정치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 농업 상업 등에 종사하는 평민 바이샤, 노예계급인 수드라의 네 계급을 말한다. 이 중에 자신이 현생에 수드라 혹은 바이샤로 사는 것은 전생의 악업 때문이므로 현생에 자신의 계급 속에서 순종하면서 열심히 살면 내생에는 크샤트리아나 바라문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업보윤회설을 숙명론이나 결정론으로 잘못 해석한 경우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업설은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 예컨대 십이연기설중 첫 번째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을 멸하지 못한 자는, 즉 연기에 대해 무지한 자는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행(行), 즉 업의 잠재력 혹은 업에 의해 여섯 갈래의 세계[六道]에 태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명을 멸한 자는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육도에도 윤회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육도에 윤회하며 집착과 고통속에 사는 중생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업에는 반드시 책임과 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의 업에 대한 과보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결정된 것이 아니고 노력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노력이란 다름 아닌 무명을 멸하고 사제와 연기법을 깨닫고자 하는 노력이다. 진리를 깨달아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는 이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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