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각과 소리, 빛깔이
그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다.

깨닫지 못하면

▲ 그림 박구원

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고롭게 끌려 다니다
한 생을 다하게 된다.

법 밖에 마음 없고,
마음 밖에 법이 없다.
누러면 누렇고, 푸르면 푸르다
무심히 고개 들어 앞을 보니
눈 가득히 푸른 산이다
산은 높고, 물은 흐른다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고
경계에 의지해 생기니
경우 때문에 그 많은
지혜가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가? 그대가 마음을 일으켜 부처라는 견해를 짓기에 문득 이룰만한 부처가 있다고 여기며, 중생이라는 견해를 짓기에 곧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그대의 견해일 뿐이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아직 공부가 익지 않은 사람에게는 방편으로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신다고 말해준다. 그런 초보적인 믿음을 통하여 깊이 들어가면, 비로소 불법에 대한 바른 안목을 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공부가 익어 말귀를 알아먹는 사람에게는, 지금 황벽스님이 배후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실상을 바로 직지해준다. 본래 마음자리에는 중생과 부처라는 상대적인 관념은 아예 붙지 못하는 것이다. 눈앞에 분명한 이 자리에는 부처도 세울 수 없고, 제도할 중생도 없다. 중생이니 부처니 분별하는 것은 모두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견해를 일으킨 것일 뿐이다.

만약 일체의 견해가 없다면, 부처는 어느 곳에 있겠는가?

한 생각 일으키는 그 자리가 바로 불성이 있는 자리다. 불성이 없으면 한 생각도 일으킬 수 없다. 그렇지만 불성으로 인연되어 일어난 생각은 다 허망한 그림자다. 허망한 그림자에 좇아가지만 않는다면, 발 딛는 곳마다 부처 없는 곳이 없다. 부처라는 견해마저 없는 곳에, 발 딛는 곳마다 연꽃이 피어난다.

마치 문수가 부처라는 견해를 일으키자마자 바로 두 철위산으로 떨어진 것과 같다.”

쓸데없이 견해를 지으면, 문수라 할지라도 지옥에 떨어진다. 알고 쓰면 방편이지만, 모르고 쓰면 허망한 것이다. 하루 종일 말하더라도, 한 마디도 말한 바가 없는 줄 알고 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깨달았을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이럴 때는 상대가 아무리 높은 재상이라도 한 대 때려주는 게 좋을 것이다. 배휴로서는 가장 궁금한 대목을 물은 것일지라도, 바로 앞에서 입 열면 즉시 그러친다고 그렇게도 일러줬건만, 아직도 알고 싶은 정식이 헐떡이니까 이렇게 또 물어오는 것이다.

“물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깨달음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일상의 어묵동정 간에 모든 소리와 빛깔이 모두 부처의 일[佛事] 아님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는가? 머리 위에 머리를 얹지 말며, 입 위에 입을 더하지 말라.

일거수 일투족, 모든 물음, 모든 생각, 모든 소리와 빛깔이 단지 그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불사 아닌 일이 없다. 여기에 계합되지 못하면, 하릴 없이 밖으로 찾아나서 천지를 떠돌게 된다. 찾는 그것이 부처인데, 이걸 모르니 공연히 사방으로 부처 머리에 똥칠을 하고 다닌다. 연야달다가 자기 머리를 찾아다닌 꼴이 꼭 머리가 머리 찾는 것과 같다.

그저 다른 견해만 내지 않으면 산은 산, 물은 물이요, 승(僧)은 승, 속(俗)은 속일 뿐이다.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이 모두 그대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그대의 본래면목이다. 그러니 허다한 일들이 어디 다른 데 있겠는가?

다른 견해만 내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 펼쳐진 모습 그대로 안팎이 여여부동하다. 다 한마음의 조작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자리를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 과거에서부터 미래제가 다하도록 영원히 이것뿐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고롭게 끌려 다니다 한 생을 다하게 된다. 만법귀일이며 허다한 일들이 다만 이 일뿐인데도, 여기에 어두우니 경계의 노예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처럼 허망한 일생을 보내게 된다.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 가득히 푸른 산이다.

법 밖에 마음 없고, 마음 밖에 법이 없다. 누러면 누렇고, 푸르면 푸르다. 무심히 고개 들어 앞을 보니, 눈 가득히 푸른 산이다. 산은 높고, 물은 흐른다.
허공 세계가 밝고 깨끗하여, 한 터럭만큼도 그대에게 견해를 짓게 하지 않는다.

청산이나 허공은 우리에게 한 견해도 짓지 않게 하는데, 스스로 그림자를 만들어 씨름하며 울고 웃고 뒹군다. 한바탕 일장춘몽에서 깨어나 허허 웃는 사람이 아름답다.

그러므로 모든 소리와 빛깔들이 그대로 부처의 지혜로운 눈이다.

비록 모든 소리와 빛깔이 부처의 눈이지만, 무명에 가리운 사람은 이런 말을 소화해낼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대개 이런 말을 배워서 알음알이로 간직하고 또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해보지만, 어느새 여기에 집착하여 융통성 없이 자기 세계에 갇힌 완고한 사람이 되기 쉽다. 언제나 부처되려고 하던 사람이 마구니가 되는 것이다. 항상 하심하고, 우직하게 초심을 잘 간직해나가는 것이 마음공부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제나 무소득이어야 바른 길이다.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고 경계에 의지하여 생기니, 경우 때문에 그 많은 지혜가 있는 것이다.

법은 경계를 대하면 천차만별로 벌어지기에, 수많은 경우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응병투약으로, 병이 많으면 약도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다양한 모습으로 벌어질지라도, 근본을 알게 되면 다만 하나의 일로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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