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없애려 한다면

▲ 그림 박구원

미래제가 다하도록
노력해도 불가능하다.
없애려는 마음이 다시
티끌이 되기 때문이다.

진리는 본래부터
눈앞에 완벽하게
드러나 있지만
스스로 망상에 덮여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인연들이
이런 저런 천차만별을
그림 그리듯 펼쳐낸다.

그래서 모든 공부는
이 마음 하나를
밝히는데 집중된다.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은 삼계를 부수기 위해서이다.

여래께서는 늘 여여해서 오고 가는 바가 없다. 여래께서 세간에 짐짓 출현하셨다는 것은 출현한 바 없이 출현한 것이다. 삼계라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없는 것인데, 없는 것을 또 부순다는 것도 방편설이다. 중생들은 삼계가 있는 것으로 속아서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방편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일체의 마음이 없다면, 삼계 역시 없다.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없다면 삼계도 없다고 해서, 마음을 없애려고 한다면 미래제가 다하도록 노력해도 불가능하다. 없애려는 마음이 다시 티끌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작은 티끌 하나를 100 조각으로 부수어 그 중 99개는 없애고 하나만 남았더라도, 대승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다. 100개가 모두 없어져야만, 비로소 대승으로는 훤출하게 벗어난 것이다.”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는 그런 어리석음은 다 허망한 것이다. 본래 쪼갤 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믿음을 내고, 그것을 체험하여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화두를 들 때도 쪼개서는 안 되고, 의심이 의정을 통해 의단으로 뭉치도록 지어나가야 한다. 대승의 공부는 번뇌를 모두 제거해서 보리를 얻는 게 아니라, 번뇌가 바로 보리라는 사실을 증득하는 것이다. ‘색즉시공’이지, 색을 다 없애서 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100 등분이 완벽하게 없어졌다는 것은 티끌 번뇌를 다 제거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고 말고 할 것이 본래 없다는 사실을 체득했다는 말이다. 진리는 본래부터 눈앞에 완벽하게 드러나 있지만, 스스로 망상에 덮여서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자성을 요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부처님께서 ‘삼계가 유심(唯心)’으로 삼계가 다 마음으로 건립된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인연들이 이런 저런 천차만별을 그림 그리듯이 펼쳐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대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만들어낸 근본원인인 마음이 무엇인지 그 정체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공부는 이 마음 하나를 밝히는데 집중된다. 결국 돈오 견성을 체험해야 황벽스님의 이런 가르침이 소화되지, 그렇지 않다면 다만 말이나 배우는 앵무새나 흙덩이를 쫓는 한나라 개에 지나지 않게 되어 마음 한켠에 항상 답답함이 남게 된다.

황벽스님은 초지일관 무위법을 가르쳤지, 유위법을 배우라고 하지 않았다. 나아가 무위법에도 머물지 말라고 하셨다. 상(相)을 여읜 무위법을 소화해야지만, 나아가 무상(無相)마저도 넘어서는 돈오법을 터득하여 상이니 무상이니 하는 일체의 견해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통찰지가 있는 사람은 짧은 순간의 인연이지만 이런 대목에서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자기를 탁 비춰 볼 수 있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척량골이 착 서면서, 그동안 정진한 것과 딱 계합되는 기연을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는 뼈저리는 정진을 통해서 이런 귀한 불법의 가치를 가납할 수 있어야지, 그렇지 못하고 못 알아듣겠다고 뒤돌아서 편하고 쉬운 수행만 찾아다니면 불조의 혜명도 끊어지고 천하의 불법이 다만 값싼 싸구려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대승에 대한 믿음을 내고, 더 이상 방편의 말들에는 끄달리지 않으며, 담담하게 마음을 수용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여유롭고 의연하게 정진해나가는 공부인의 모습이 귀한 시절이다.

 

16. 상당설법

 황벽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곧 부처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으며 동일한 심체(心體)를 지녔다.

 지금까지 배휴 재상이 묻고 황벽스님이 대답하였는데, 여기서는 황벽스님께서 상당법문 하신 것을 배휴가 기록하고 있다. ‘마음이 곧 부처다.’ 하는 말에는 가시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 뜻을 알면 다행이지만, 모르면 공부인이 소화하기에 제일 껄끄러운 것이 이 말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부처다.’ 하는 말이 금과옥조처럼 비쳐지지만, 불법에서는 ‘마음이 부처다.’고 해도 방망이로 두들겨 맞는다. 불법은 법안(法眼)과 불안(佛眼)을 말하는데, 이런 높은 안목에서는 모든 자취를 싹 쓸어버리지 한 물건도 남겨두지 않는다. 한 물건도 용납하지 않는데, 하물며 이런 언구 따위야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하지만 상당해서 설법하는 인연이라면, 또 이런 말을 들려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나마 불법을 가장 요긴하게 일러주는 말이 이런 표현들이다. 마음이 곧 부처인데, 위·아래 없이 일체 중생이 다 개유불성(皆有佛性) 하고 동일한 마음 바탕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은 불이법이고, 평등법이며, 무루법이자 무위법이다. 일체가 한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오셔서 오직 일심법(一心法)만을 전하셨으니,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곧장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만, 어리석은 중생이 그림자에 속아 육도 윤회를 하고 있다. 마음을 깨달으면, 겉모양에 관계없이 일체가 본래 마음자리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공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선의 입장에서는 또 이런 이치가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말장난이 되기 쉬우므로, 경우 따라서는 주저 없이 쳐버리기도 한다. 이치를 붙드는 즉시 깨달음을 등지게 되는 것이 또한 마음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연 따라 말해주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치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단칼에 쳐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 뜻을 잘 새겨서 이쪽저쪽의 양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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